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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4화 (14/187)

< 14화 꼬리와 몸통 >

변소 정책은 순탄했다.

시비법의 전면 확대만 남았다.

전녹생이 잘 해낼 것이다.

왕선은 홀가분하게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변소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런데

“형님께서 명령을 내리셨습니까?”

“명령? 그게 무슨 말이지?”

“아. 변소의 똥을 퍼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뭐?”

“백주에 너무나도 당당하게 퍼가길래 형님께서 명하신 일로 알았는데 아니었습니까?”

...이건 무슨 개똥 같은 말인가?

왕선의 눈썹이 휘어졌다.

“언제?”

“조금 전이었습니다.”

어이가 없다.

백주에 똥을 훔쳐가는 도둑놈이라니.

변소에 싼 똥을 지키는 경비까지 필요할 정도로 이 사회가 각박하단 말인가?

“천목아.”

“예. 형님.”

“도둑놈 잡아.”

“도둑놈이요?”

“네가 봤다며? 똥 도둑놈 말이다.”

“허. 살다 보니 별 희한한 도둑놈이 다 있군요. 상상도 못 했습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당장 잡아 들여.”

“알겠습니다.”

마천목은 곧장 관청을 뛰쳐나갔다.

왕선은 왠지 모를 불안함이 엄습하는 걸 느꼈다.

...변소로부터 아직 벗어날 수 없다는 불길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 거다.

그리고

“뭐라? 누구의 명을 받았다고?”

“전주 김씨의 김언지 선생입니다.”

“전주 김씨? 김언지?”

이건 어디서 굴러먹던 듣보잡일까?

마천목이 잡아 온 십수 명의 인부들은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말을 이었다.

“소인들은 그저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

“변소의 똥은 관청의 재산이다. 너희는 그걸 훔친 거고.”

“백주에 똥통의 똥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도둑질이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참으로 딱하구나. 하지만 법도는 모르고 어겨도 처벌당한다.”

“목, 목사 나리. 소인들은 억울합니다.”

정말 억울할 수도 있다. 이 사람들은 시킨 대로 했을 뿐이니까.

그러나 풀어줄 수는 없다.

선처란 시의적절하게 베풀어야 한다. 무턱대고 남발하면 통치의 근간이 흔들리는 법이다. 바로 지금이 딱 그랬다.

만약 잡혀 온 인부들이 제 욕심에 똥통을 건드렸다면 한번은 선처해줄 수 있다. 무지함에서 비롯한 일이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안은 그런 간단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배후에 전주의 명문가가 버티고 있다.

정확한 사유는 알 수 없으나 별로 아름답지 않은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이때 인부들을 풀어주면? 전주 명문가는 제 이름에 전주 관청이 화들짝 놀랐다고 생각할 거다. 그들의 콧대만 높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오늘의 일은 전례가 되어서 ‘잘 몰랐다는 명분’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질 것이다. 수시로 전주 관청의 방침과 다른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크다.

백성은 백성대로 무지함을 꺼낼 것이고, 명문가는 착각의 늪에 빠져서 민심을 호도할 거다.

“천목아.”

“예. 형님.”

“모두 하옥해.”

“알겠습니다.”

인부들은 통곡하며 사정했지만 왕선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다.

“그리고 전주 김씨? 김언지? 당장 잡아 와.”

“반항하면 어찌할까요?”

“전권을 내리지. 알아서 해.”

“알겠습니다.”

마천목은 득달같이 병사를 이끌고 관청을 나섰다.

전녹생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왕선을 쳐다봤다.

“주공. 전주의 명문가와 척을 지면 앞으로 어려움이 생길 겁니다.”

“이대로 달고 가는 건 더 어려울 것 같소만.”

“하지만···.”

“아아. 너무 우려하지 마시오. 아직은 아무것도 나온 게 없소. 괜히 속단해서 걱정하면 늙습니다.”

“소생은 천목이 그들에게 빌미를 제공할까 봐 그런 겁니다.”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아마도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어째서 그리 보십니까?”

“그들이 변소의 똥을 가져가면 안 되는 걸 몰랐을까요? 그게 내가 심혈을 기울인 정책이라는 걸 모르고 그랬을까요? 만일 정말 그렇다면 흔쾌히 이번 일을 넘어가리다. 그러나 아닐 거요. 알면서도 그런 거요. 왜? 해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전주에 똬리를 튼 자신들이 전주 목사의 위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해서, 그들은 당당하게 전주 관청으로 올 거요. 아주 당당하게. 지은 죄가 없어서 당당한 게 아니라 죄를 없앨 자신이 있으니까.”

전녹생은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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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은 조금 어긋났다.

전주 김씨의 좌장 김언지는 적당하게 엉망이 된 상태다.

“하도 말을 건방지게 하길래 손을 좀 봤습니다.”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은 마천목이다.

보아하니 제 뒷배를 믿고 마천목에게 함부로 한 거 같다.

“마천목이라고? 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다.”

김언지는 씩씩거린다.

“저자를 당장 벌하시오.”

벌해주시오도 아니고 벌하시오?

아주 명령조다.

왕선은 턱을 살짝 튼 채로 김언지를 쳐다봤다.

“하찮은 군관 따위가 내 몸에 손을 댔단 말이오.”

“하찮은?”

“마천목이라는 작자 말이외다.”

“내 의동생인데?”

“하. 그래서 저자를 벌하지 않겠다는 거요? 나라의 녹을 먹는 목사라면 사사로운 감정보다 법도에 따라 선정을 베풀어야 하거늘.”

“선정이라.”

할 말이 많지만 귀찮다.

“뭐. 됐고. 마천목은 내 의동생이기도 하지만 전주 관청에 속한 몸이외다. 내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오.”

“목사가 나를 때리라고 했다는 거요?”

“당신이 세 치 혀로 목사를 모독했소. 그걸 내가 어찌 참소?”

화가 치민 마천목이 대갈성을 질렀다.

역시 생각대로 김언지가 심각하게 나댄 모양이다.

“하. 드디어 네놈이 함부로 설쳐댄 거라는 걸 실토하는구나! 병사들은 뭐 하고 있는 것이냐! 당장 저놈을 포박해!”

급기야 전주 관청에 속한 병사들에게도 명령질한다.

병사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핀다.

김언지의 말을 따르자니 왕선이 두렵고, 무시하자니 전주 김씨의 텃세가 감당 안 된다.

“이해할 수 없군. 관청의 재물을 탐하다가 잡혔거늘.”

“관청의 재물? 변소의 똥이 왜 관청의 재물이오?”

“그러면 전주 김씨의 소유이오?”

“그 변소에는 전주 김씨에 속한 사람들이 싼 똥이 있소. 그걸 가지러 간 것에 불과하오.”

“기적의 논리군.”

“뭐요?”

“전주 관청에서 권농하고자 만든 변소요. 그걸 사사롭게 탐한 거고.”

“하.”

김언지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왕선을 노려봤다.

“언제부터 전주의 권농을 목사가 챙겼소?”

“권농은 목사의 의무. 아니오?”

“하하하. 이보시오. 목사. 전주의 권농은 전주의 명문가가 알아서 합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시오.”

김언지는 조롱하듯 웃으면서 다시 병사들에게 일갈했다.

“당장 마천목을 포박해!”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군.”

왕선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왜구가 이 강산을 유린하고 있다. 난세도 이런 난세가 없어.”

“지금 한가하게 시절이나 논할 때요?”

“천하가 난리거늘 한가하다니.”

“뭐요? 목사!”

김언지는 화를 참지 않았다.

“지금 목사가 할 일은 권농이나 시절을 논하는 게 아니라 저 무도한 작자를 벌하는 거요. 내가 몇 번을 말해야 하오?”

왕선은 그의 똑바로 주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전 선생. 관청의 재물을 훔친 자는 어찌 처결하오?”

“태형이나 장형에 처해도 무방합니다.”

태형과 장형이라.

충분히 무거운 처벌이다. 마음만 제대로 먹으면 반병신은 물론이거니와 목숨을 뺏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마음에 차지 않는다.

“그건 평시고.”

“예?”

“왜구가 지천에 깔린 지금이 전시라고 생각하오만? 전시에 군의 재물을 훔치고, 지휘관의 명령에 불복하면 어찌 되냐고 묻는 거요.”

전녹생은 굳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엄한 군율에 따라 참할 수 있습니다.”

“전시에 관청의 재물을 탐하고, 목사를 희롱했다. 지엄한 군율에 따라 죄인 김언지를 참형에 처한다.”

“!!!”

김언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요? 차, 참형?”

“언제부터 명령을 두 번 내려야 하지?”

“나, 나를 죽이겠다고? 당신 미쳤소? 전주에서 전주 김씨를 건드리고 멀쩡할 거라고 생각하오?”

“천목아. 참하라.”

“알겠습니다.”

마천목이 창을 고쳐잡았다.

드디어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한 김언지는 사색이 됐다.

“이, 이보시오. 목사. 이러지 마시오. 오해가 있소.”

“심지어 사사롭게 전주목의 병사를 움직이려고 했다. 이는 군권을 넘본 행위. 사안에 따라서 대역죄에 해당한다.”

“!!!”

“지금 죄인 김언지를 참한 뒤 전주 김씨를 모두 잡아서 추국할 것이다.”

일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김언지는 깨달았다.

전주 목사 왕선은 지금까지 겪었던 유형의 관리와 다르다.

전주의 유력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말은 자신이 무슨 말을 꺼내더라도 아무런 위협이 되질 않는다는 거다.

그렇다면 지금 괜한 객기를 부렸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 줄 모른다.

설마 진짜 죽이지는 않겠으나 태형이나 장형에 처해 질 가능성이 있다.

지금 이 순간 힘의 우위는 명확하게 전주 목사에게 있으니까.

수치스럽지만 참아야 한다. 그래야 봉변을 당하지 않는다. 전주 김씨의 좌장이 고작 이런 곳에서 곤장 따위나 맞을 수는 없다.

일단은 손을 내밀어야 한다. 이 수모는 나중에 전주 김씨와 다른 가문의 힘을 집결해서 본때를 보여주면 된다. 그때가 되면 전주 목사는 사색이 된 채로 비굴하게 구걸할 거다.

그러면 된다. 자고로 대장부는 대사를 위해서 작은 수모는 감내해야 하는 법이다.

김언지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목, 목사. 내가 실언한 거요.”

이쯤 하면 될 거로 생각했다.

전주 김씨의 좌장이 사과했지 않은가?

그런데

“참하라. 그리고 전주 김씨를 모조리 잡아 오라.”

“알겠습니다.”

마천목의 창이 큰 궤적을 이루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아아아아앙!

김언지의 주변을 휘돌면서 공포를 극대화했다.

놀란 김언지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단지 위협일 것이다. 위협에 불과하다. 전주 목사가 미치지 않은 한 자신을 죽일 리는 없다.

그런데도 너무 두렵다.

“허. 백주에 이 무슨 일이란 말이오?”

나지막하지만 노기가 담긴 목소리.

기품이 보이는 복장을 한 노인이었다.

“전주 이씨의 좌장 이문정입니다.”

전녹생이 나지막하게 말한다.

왕선의 눈썹이 살짝 휘어졌다.

전주 이씨?

시선이 움직였다. 이문정의 눈을 쳐다봤다.

-전주 김씨만 내세워도 무탈할 줄 알았는데.

왕선의 볼이 씰룩였다.

-신임 목사가 이토록 사리 분별을 못 할 줄은 몰랐군.

왕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거 몸통은 전주 이씨구나. 괜히 꼬리만 잘라낼 뻔했다.

“목사. 아무래도 오해가...”

“천목!”

이문정의 말을 자르며 왕선이 외쳤다.

“내 명을 듣지 못한 것이냐!”

그 즉시 멈췄던 마천목의 창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부아아아아아아아앙!

전주 김씨의 좌장 김언지의 숨통이 끊어졌다.

이문정의 눈이 충격으로 얼룩졌다.

“대역죄의 혐의가 있는 전주 김씨다. 가문의 적통부터 종놈까지 모조리 잡아 와.”

실로 거침없는 명령.

전주 관청의 습도가 거세게 올라갔다.

< 14화 꼬리와 몸통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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