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아노미 현상 >
전주는 빠르게 변화했다.
고약한 악취를 유발하고 질병의 원흉이었던 배설물은 점차 자취를 감췄다.
박자청이 만들어낸 직사각형 모양의 똥통이 곳곳에 설치된 덕이다. 원래 박자청은 동서남북이 제법 공개된 상태인 굉장하게 민망한 똥통을 만들었다. 이를 본 왕선이 노발대발하며 철저하게 사방을 막고, 여닫을 수 있는 문을 설치하게 했다.
이렇게 첫 번째 변소가 만들어지자 장인을 징발하여 닥치는 대로 찍어냈다.
물론 평생 가졌던 습관이 쉽게 변하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백성들은 골목에서 시원하게 똥오줌을 해결했다.
이렇게 되자 애써 변소까지 달려가던 백성들의 발걸음도 은근슬쩍 골목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러니까 여전히 전주는 똥통이었다.
야심 차게 추진한 변소는 전시행정의 그것을 방불케 한 것이다.
“주공. 이대로 가면 변소는 천덕꾸러기가 될 겁니다.”
“음.”
전녹생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잔뜩 묻어 있다.
“···민심이 희한합니다. 최근에는 전주 관청 앞에 똥을 싼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실이다.
정말이다.
그러니까 똥이나 먹으라는 뜻이었다.
왕선은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원래 시대를 앞선 정책은 힘든 거요.”
“주공. 전주 목사에 부임한 이후 가장 먼저 시행한 일입니다. 이대로 무산된다면 차후가 어렵습니다. 아무리 목사의 권위를 휘두른다고 하더라도 민심을 얻지 못하면 폭거로 이어질 뿐입니다.”
그랬다. 단지 변소를 만들면서 동원된 인력과 자원이 문제가 아니다. 이건 전주 목사로서의 일을 수행하는 데 지표가 될 사안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옳은 말이다.
...오밤중에 몰래 와서 전주 관청 앞에 똥 싸는 행위를 보면 말 다한 거다. 이건 이대로 저항 의지를 표출한 거니까.
“전 선생의 생각을 듣고 싶소.”
“주공. 통치는 엄격해야 합니다. 백성의 고집을 지켜만 본다면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어기는 백성을 벌하자?”
“예.”
“이를테면 곤장?”
“마음을 독하게 드셔야 합니다.”
왕선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전녹생의 의견이 틀린 건 아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전 선생. 세상에서 가장 바꾸기 쉬운 게 뭔지 아시오?”
“주공.”
“바로 법과 제도요.”
“법과 제도를 바꾸는 건 무수한 토론과 갈등을 유발합니다. 어째서 가장 쉽습니까?”
“전 선생의 말처럼 법과 제도를 손보는 건 무척 어렵소. 왜? 단물을 빨아먹는 무리가 반드시 저항하기 때문이라오.”
“한데, 어째서 가장 쉽다고 하십니까?”
“그것보다 어려운 게 있어서 그렇소.”
“대체 그것이 무엇입니까?”
왕선은 오른손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바로 인식.”
“예?”
“법과 제도의 교체란 오랜 토론을 거치더라도 시대의 요구가 있다면 결국 해낼 수 있소. 그렇게만 된다면 내일부터 시행하겠노라 공포하면 되오. 그러나 오늘 살던 백성이 내일부터 바뀐 세상에 바로 적응하는 건 불가능하오. 백성에게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은 그저 하루가 이어지는 거니까. 그래서 격렬한 토론과 갈등 끝에 만들어진 법과 제도가 제대로 정착하는 건 참으로 어렵소. 바로 이때 위정자들은 이를 명분과 무기로 삼아서 법과 제도를 원래대로 바꿀 것을 주장하오. 민심을 들먹이면서.”
“음.”
“그리고 그거 아시오? 때로는 법과 제도를 바꾸는 일의 가장 위력한 저항은 민심일 수도 있다는 걸. 바로 지금처럼.”
전녹생은 입을 닫고 경청했다.
왕선의 말은 물 흐르듯 이어졌다.
“단지 차이점은 위정자는 이권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지만, 백성은 무지하거나 습관을 고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오. 그런데 엄한 통치로 백성을 억제한다? 이해하지 못한 법과 제도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 말은 개혁에 저항하는 위정자는 설득하지 않고 그냥 죽이면 된다는 말과 똑같은 거요.”
“···주공.”
“보시오. 위정자는 그렇게 끈질기게 설득하면서, 왜 백성에게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소?”
왕선은 단호하게 말했다.
“어차피 법과 제도는 백성이 따라야 제대로 정착되는 거요. 그러지 않고 강제로 내려 먹이면 결국 원래대로 돌아가게 될 거요. 해서, 나는 전 선생의 말을 따를 수 없구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지극한 현실은 백성을 모두 설득할 수 없습니다.”
“지극한 현실은 개혁의 반대세력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소? 전주 목사의 올곧은 권위는 민심을 타고 발생하는 것이지, 민심을 억 누른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오. 나는 그렇게 생각하오.”
-과연.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 주공은 진정한 왕재다.
...갑자기? 결론이 왜 그렇게?
왕선은 어물쩍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백성이 변소 정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요.”
“하면 이대로 두고만 보실 겁니까?”
왕선은 손사래를 쳤다.
“그건 아니지요. 길거리에 똥오줌이 떠다니는 걸 내버려 두면 곤란하지요. 단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한 것이외다. 그리고 그 시간을 하루라도 빨리 앞당기는 게 관리의 역할이고.”
“벌하지 않고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벌하지 않고 불이익을 주려고 하오.”
“불이익이요?”
“노상 방뇨를 한 사람의 인적을 파악하시오. 그들에게는 변소에서 탄생할 시비의 혜택을 주지 않을 거요.”
전녹생은 감탄했다.
“그런 방법이 있군요.”
“이후 1년 동안 노상방뇨를 하지 않으면 사면하는 걸로. 어떻소?”
“과연 주공이십니다. 엄하게 통치하기보다는 백성이 스스로 정책의 효용성을 깨닫게 하자는 것이군요.”
“가장 눈에 보이는 것이 그거니까. 즉,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거지요.”
“지당하십니다.”
“또한, 똥오줌이 없어지는 만큼 질병이 줄어들 거요. 노상방뇨를 하는 사람은 질병을 옮긴다는 무서운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거요.”
“오.”
전녹생은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다.
-과연 왕재로다.
...왕선은 이제 슬슬 부담스럽다.
되도록 빨리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지만. 아직 남은 게 있다.
제일 핵심적인 내용이 남았다.
“그리고 하나 더 있소.”
“무엇입니까?”
“대회를 하나 열까 하오.”
“대회요?”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표어대회.”
“예?”
“자고로 의식을 바꾸는 가장 위력한 방도는 자발적인 참여라오.”
그렇게 제1회 전주 목사배 표어대회가 시작됐다.
-----
“이게 무슨 말이야? 똥오줌을 참지 못하면 거름을 안 준다고?”
“그게 아니라 변소 말고 다른 데서 싸다가 걸리면 거름은 안 준다는 걸세.”
“안 걸리면?”
“그건 감사한 일이지.”
“허. 어쨌거나 어처구니가 없군. 똥을 싸면 거름을 안 준다니.”
“이 사람아. 그게 아니라 똥을 아무 데서나 싸면 거름을 안 준다는 말이야.”
“됐네. 저번에 변소까지 뛰어가다가 바지에 질려 버렸어. 다시는 안 참을 거야.”
“그 나이 먹고 똥오줌도 못 가리는 게 자랑인가?”
“누가 자랑했나? 다짐했지.”
“잘났네.”
불이익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구시렁댔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래도 목사 나리가 사람이 참 좋아.”
“뭔 소리여? 똥이나 퍼붓고 싶은데.”
“진정하게.”
“정말 마음 같아서는 관청 앞에 똥 싸고 싶어.”
“허. 혹시 그거 자네였나?”
“쉿.”
“이 사람아. 잘 생각해봐. 다른 목사였다면 난리가 났어. 당장 군사들이 뛰어다니면서 노상 방뇨한 사람들을 끌고 가서 곤장이라도 쳤을 거야.”
“음. 듣고 보니 그 말도 맞군.”
“나는 변소에 갈 거야.”
“같이 갈까?”
“좋지.”
그리고 다른 소식이 민심을 흔들었다.
“표어?”
“그렇다더군.”
“그게 뭔가?”
“변소 정책에 대한 짧은 말을 표현하라더군.”
“왜?”
“전주성 곳곳에 적을 거라더군.”
“그거 적으면 우리가 읽을 수는 있나?”
“못 읽지.”
“그런데 왜 해?”
“난들 알겠나?”
“그리고 우리가 글자를 적어서 낼 수는 있나?”
“아. 관청 가서 말로 하면 대신 적는 사람이 있다더군.”
“그건 좋군.”
“참가할 건가?”
“뭐하러? 바쁘네.”
“하긴.”
대부분 냉소적인 반응.
그러나 곧바로 알려진 내용은 바람의 방향을 한 번에 틀었다.
[표어대회 장원 : 1년간 조세 면제, 쌀 100석 지급]
[표어대회 부장원 : 1년간 조세 면제, 쌀 50석 지급]
[표어대회 부장원 : 1년간 조세 면제]
상상을 초월하는 상금이 공포됐다.
민심은 술렁였고 참가자는 폭발했다.
전주 관청 앞에는 연일 사람들로 장사진이 펼쳐졌다.
새로운 내용이 공포됐다.
[노상 방뇨를 행한 죄인은 표어대회 참가를 불허한다]
전주의 골목이 깨끗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표어 참가자들을 맞이한 사람이 있었다.
“변소 정책에 대해서 다시 설명하지.”
전녹생이 엄한 표정으로 교양 수업을 진행했다.
자고로 알아야 명문이 나오는 법이니까.
-----
전녹생은 바쁘게 움직였다.
“주공.”
그의 이마에는 땀이 가득하다.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숨넘어가겠소.”
“송구합니다.”
“어떻소?”
“수백 명이 표어를 제출했습니다.”
왕선의 시선은 전녹생이 가져온 종이꾸러미로 향했다.
가장 위에 적힌 표어가 보였다.
[똥 싼 배도 다시 보자.]
[똥오줌 구별 말고 변소 가서 잘 싸자.]
심장에 새길 수준의 명문이 아닐 수 없다.
< 12화 아노미 현상 > 끝
ⓒ 날아오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