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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1화 (11/187)

< 11화 시대를 앞서간 정책 >

박자청이 측우기 제작을 시작했다.

전녹생은 서류 더미를 들고 왕선을 찾았다.

“아니, 이게 다 뭐요?”

“자연을 해결했으니 인간의 영역을 건드려야지요.”

“허.”

정말 부지런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감탄, 또 감탄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말해보시오.”

“첫째로 조세제도를 건드리는 겁니다.”

“그건 내 권한 밖이군.”

아직은.

그건 개경의 권력이 흔들린 다음에 할 수 있는 거다.

“그렇습니다. 두 번째는 토지 생산력을 높이는 겁니다.”

“그게 좋겠소.”

“하면, 시비법을 잘 마련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 선생이 아는 바가 있구려.”

“주공께서 개경에 가셨을 때 농민들과 한담을 나눴지요.”

“역시 훌륭하오.”

“과찬입니다.”

전녹생은 옅게 웃으면서 말했다.

“여러 유형의 토질이 있는데 그에 따라 품종, 파종 방식과 시비법이 다릅니다.”

“오. 그렇소?”

“예. 우선 수전(논), 한전(밭)으로 나눕니다.”

“그렇구려.”

“양전(良田), 숙전(熟田), 미전(美田), 비전(肥田), 박전(薄田)으로 나누고, 황지(荒地)도 따로 나눌 수 있습니다. 또 토양의 성질에 따라서···.”

전녹생은 참으로 진중한 인사였다. 매사 일을 허투루 할 경우가 없다. 꼼꼼하다. 일을 맡기면 걱정이 없다.

그런데 유일한 단점이 있다. 서론이 정말 길다. 물론, 다 좋은 내용이라서 들으면 살이 되고 피가 되기는 한데 길어도 너무 길다. 왕선이 그걸 모두 듣고 있을 이유는 없다. 자고로 지도부는 결정과 집행을 하는 게 주된 역할이 아니겠는가?

왕선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전 선생. 시비법이요.”

“아. 송구합니다.”

“아무래도 척박한 논에 필요한 시비법이 우선 되어야겠지요?”

“과연 그렇습니다. 농지는 옥토보다 박전이 더 많은 법이니까요.”

“그러니까요.”

“척박한 수전에는 우마분(소와 말의 똥)과 연지저엽(가지가 붙어 있는 떡갈나무 잎), 인분을 사용하면 좋습니다. 만일 밭벼를 재배한다면 숙분과 요회를 섞은 분회를 사용합니다.”

“가장 양질의 시비는 무엇이오?”

“분회와 우마분입니다.”

“조달할 수 있소?”

“가능합니다.”

전녹생처럼 무거운 인사가 허튼소리를 할 리는 없다.

왕선은 흡족하게 웃었다.

“아. 하나 추가하세요.”

“무엇입니까?”

“추비법.”

“추비법이요?”

“작물이 자라는 도중에 시비하면 더 큰 효과가 있을 거요.”

“음.”

“왜 그러오?”

“송구합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인지라 거름의 양을 가늠해봤습니다.”

“결과는?”

“조금 더 면밀하게 검토해봐야 하겠지만 당장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왕선은 경청했고, 전녹생의 말은 이어졌다.

“또, 실은 인분이 가장 좋기는 한데 인위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하리다.”

“주공께서요?”

“내가 미친 듯이 먹고 만들겠다는 거요.”

“주공?”

“농입니다.”

“하하...”

아직 오랜 세월을 함께 하지 않았으나 평생 유학을 공부한 고지식한 사람이다.

그랬다. 분위기가 실로 엄중하다.

이건 왕선이 무리수를 투척한 거다. 그러니까 잘못한 거다. 사과하는 게 도리다.

“미안하오.”

“······.”

“어쨌든 그 문제는 내가 백성들과 잘 풀어보겠소.”

“알겠습니다. 하면, 소생은 추비가 가능하다는 전제로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탁월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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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백성들은 삼삼오오 모였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그러니까 아무 데서나 볼일 보지 말라는 거 같은데?”

“그러면 어디서 싸?”

“지정구역? 그런 걸 만든다는군.”

“허. 참으라고? 그게 말이 되는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만.”

그들이 이렇게 열을 내는 이유는 왕선이 내린 명령 때문이었다.

전주 백성의 반응은 아주 부정적이었다.

...보다 못한 왕선이 직접 나섰다.

“사람이라면 배설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다.”

“당연히 가립니다. 옷에 싸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내 말은 그게 아니다. 길거리에 막 싸지 말라는 말이다.”

“급하면 해결해야 하지 않습니까.”

“누가 무작정 참으라고 했느냐? 신호가 오면 급히 달려가란 말이다.”

“그게 참는 겁니다.”

“무릇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어야 한다.”

“!!!”

눈을 부릅뜨는 백성들.

막 전주 목사로 부임한 왕선이다.

비록 의병장으로서 이름을 날렸으나 신출내기에 불과하다.

분노한 군중은 왕선의 어설픈 정책을 질타하고 있는 거다.

물론 이건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나 왕선은 일반적인 관리와는 달리 백성과 가까운 의병장 출신이다. 해서, 의견 표출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왕선은 난감했다.

아무리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전주 목사라고 할지라도 수백 명이 웅성거리면서 따지고 들면 난감하다.

여전히 수백 명이 웅성거렸다.

그들 역시 왕선만큼 아니 왕선 이상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진실 된 충격이 그들의 머리 위에 내려친 것이다.

...놀랍게도 그건 거대한 ‘분노’로 표출됐다.

“아무리 전주 목사이시지만 똥오줌을 싸지 못하게 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맞습니다. 개돼지처럼 아무 데서나 싸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조금 전에는 급하면 막 싼다고 했는데? 대체 기준이 뭘까?

왕선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렇습니다. 그것만 지키면 됩니다.”

...아니. 당신들이 아무 데서나 싸고 있다고.

왕선은 헛웃음을 지었다.

“개돼지는 길 가다가 막 싸지만, 사람은 싼 곳에만 쌉니다.”

...그게 그거지.

이거 생각하지 못한 난관이었다.

왕선은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이거 너무 시대를 앞서간 정책을 시행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러모로 이는 반드시 시행되어야 한다.

...때로는 시대를 앞당겨야 할 필요도 있는 법이다. 따라오지 못한 백성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더라도. 그것이 어떤 부작용을 일으키더라도.

...미쳤네.

이게 뭐라고 이런 거창한 생각에 빠진 것인가?

여전히 웅성거리는 분노에 찬 군중.

일단 분노의 노래를 멈췄다.

아주 잠시 자조적인 웃음을 짓던 왕선은 근엄한 눈빛으로 좌중을 쳐다봤다.

제대로 각 잡고 설득해야 한다.

...똥오줌을 아무 데서 싸지 못하게 말이다.

전주 목사 왕선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쳐다만 보고 있다.

묘한 분위기.

그것은 상당한 시간 지속됐다.

그런데도 왕선은 여전히 침묵.

이리되자 백성들의 웅성임은 점차 가라앉았다.

“다 떠들었나?”

백성들은 눈치를 살폈다.

흥분한 나머지 상대가 누구인지 잠시 잊었다.

아무리 의병장을 거치면서 친근한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왕족 출신의 전주 목사다.

자신들이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다.

당장이라도 경을 칠 것만 같다.

“내가 한 말을 똑바로 들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진보를 위한 설득이 시작됐다.

“송구합니다. 목사 나리.”

“정확하게 말하겠다. 앞으로 전주목에는 배설물이 돌아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목사 나리 어찌 똥오줌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정말로 직설적이고 적나라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오. 백성이여.

왕선의 이마에는 힘줄이 살짝 솟구쳤다가 사라졌다.

“그러니까 새로운 법도를 지금부터 말하겠다는 말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똥오줌과 법도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임금님도 똥오줌을 보지 않습니까?”

“혹시 나리께서는 똥오줌을 싸지 않습니까?”

“이 사람아. 그걸 말이라고 하나?”

“저번에 변소에 가는 걸 내가 봤어.”

순식간이다. 순식간에 다시 개판 됐다.

갈 길이 구만리이거늘. 여기서 발목이 잡히다니.

...역시 시대를 앞서가는 정책이로다. 이래서 선각자의 길이 어렵다고 하는 게 아닐까?

왕선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일단 개판을 다시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

“그만.”

“정말 나리께서 변소에...송, 송구합니다.”

“송구합니다.”

왕선의 볼이 살짝 씰룩였다.

“물론 사람이라면 모두 똥오줌을 싼다.”

“똥오줌입니까?”

“···그렇다.”

아. 오늘 일이 더럽게 꼬인다.

왕선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뱉으면서 ‘설득’을 이어갔다.

“내 말은 똥오줌을 변소에서만 처리하라는 거다.”

“소인들도 아무 데서나 싸지 않습니다. 저길 보십시오. 똥오줌이 한군데 집중된 상태입니다. 물론 모자란 인사가 조금 실수를 하긴 하지만 어쨌든 변소라면 일종의 변소입니다.”

“그건 변소가 아니라 노상 방뇨다. 이는 중대한 범죄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똥오줌을 배출하는 행위를 어째서 범죄라고 하십니까? 개돼지처럼 막 싸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과 개돼지가 무엇이 다른지 아는가?”

“사람은 변소에 싸고 개돼지는 아무 데서나 쌉니다.”

...왕선은 이 논쟁을 한시라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지극한 사실을 깨우쳤다.

안 그러면 허파가 뒤집힐 수도 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사람의 똥오줌은 중요한 거름으로 사용된다. 모르는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평생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길거리에 볼일을 본다. 이건 거름을 허공에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음.”

“해서, 나는 변소에 똥오줌을 모아내겠다는 거다. 왜? 너희도 알겠지만, 똥오줌이야말로 최고의 거름이기 때문이다. 더 풍족한 추수를 위해서 다소 급하더라도 참고 달려갈 정도의 인내도 가지지 못하는가?”

“······.”

“내가 너희 똥오줌을 모아서 횡령이라도 할까 봐 그러나?”

그런데

“헤헤.”

가장 앞줄에 있던 어린 여아가 해맑게 웃었다.

그 순간만큼은 왕선도 마주 보고 웃을 수밖에 없다.

분위기는 부드럽게 풀어졌다.

“나는 너와 네 부모에게 풍족한 가을을 만들어 주고자 이런 말을 꺼냈단다.”

“똥을 길거리에 안 싸면 밥을 많이 먹을 수 있나요?”

“물론이지.”

“정말요?”

“그래. 이건 사람만이 할 수 있단다. 왜? 사람은 농사를 지으니까.”

“아. 개는 농사를 짓지 않으니까 똥오줌을 마음대로 싸는군요!”

“그렇지. 참으로 영특하구나. 네 말이 참이다. 그게 바로 사람과 개돼지의 차이지.”

왕선과 여아의 대화는 순식간에 퍼졌다.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영역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전주 목사가 백성을 괴롭히려고 만든 악법이 아니라 백성을 더 살찌게 하려는 선정임을.

점차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미처 몰랐습니다. 소인들은 똥오줌도 마음대로 싸지 못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할 수 있겠는가?”

“해보겠습니다.”

...참 대단한 결심이 아닐 수 없다.

왕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여아를 쳐다봤다.

“아픈 데는 없느냐?”

“없어요.”

“앞으로 아플 일이 없을 것이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리?”

여아를 데리고 있던 노인이다.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내가 의서를 읽었는데 배설이 잔뜩 쌓인 거리에서 악취가 나고 질병이 생긴다고 하더군.”

“하, 하면···.”

“그래. 변소에 똥이 쌓일 만큼 질병은 줄어들 거야.”

“정, 정말입니까?”

“아무렴. 본관이 너희에게 거짓을 말해 뭐하겠나? 그러니 똥통을 가득 채우게.”

“예, 예. 목사 나리. 그리하겠습니다.”

힘겹게 설득했다.

사회의 진보를 끌어내는 일은 이렇게도 힘든 거였다.

그래도 해냈다.

이제 남은 건 실무다.

과학적인 구도의 똥통. 그러니까 변소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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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자청.”

“예.”

“똥통 좀 만들게.”

박자청의 눈이 흔들린다.

미간도 살짝 찌푸려졌다.

왕선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똥통 따위는 만들지 못하겠다는 뭐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설마 똥통 따위나 만들 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설마...”

“당장 만들겠습니다.”

“크게 만들게.”

“알겠습니다.”

“천하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고 멋진 똥통을 만들어 보게.”

“해, 해내겠습니다.”

“그래. 너를 믿어 보겠어.”

“천하제일의 똥통을 만들어 내겠습니다.”

“기대하지.”

아주 흡족했다.

< 11화 시대를 앞서간 정책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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