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본격적인 시작(제목 수정) >
“서운하지는 않소?”
“···아니라면 거짓입니다. 솔직히 시원섭섭합니다.”
“의도한 건 아니었소.”
반은 진실이다.
만일 이인임이 왕선에 대해서 몰랐다면 전주 목사를 차지하는 일은 없었을 거니까.
계획은 최영이 바로 칼을 뽑는 상책과 거병하는 중책이 있었다. 최영을 잘 흔들어봤지만, 첫 번째는 무리였다. 그는 그런 인사니까. 그래서 의병을 집결시켜 개경을 흔드는 방향, 그러니까 고려의 의기를 집중시켜 이인임을 축출하는 것으로 상황이 흘러갔다.
그러나 일이 틀어졌다. 하여, 전주에서 힘을 키우는 세 번째가 도출된 거다.
어쨌든 이런 자세한 내막을 유영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다.
“의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웠으니 합당한 관직이 내려진 겁니다. 그 장계를 올린 것도 접니다.”
담담하게 말했으나 씁쓸한 기분만은 어쩔 수 없다.
왕선에게 벼슬이 내려지더라도 전주 목사가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긴 했다.
“이제 어찌할 거요? 개경으로 갈 생각이오? 아니면 귀향 할 거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사실 잡고 싶었다. 하지만, 어렵다.
전주 목사를 역임한 유영이다.
아무리 그대로 신임 전주 목사의 수하에서 일하는 건 쉽지 않다.
세간에서 말들이 무성하게 나오기도 할 거고.
“그동안 고생했소.”
“선정을 베푸십시오.”
“반드시 그러겠소.”
유영은 더 말하지 않고 전주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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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는 고려의 젖줄이다.
그리고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의 앞글자를 따서 정한 명칭이다.
그만큼 전주는 전라도의 상징적인 지역이다.
중앙 권력을 움켜쥔 이인임은 전주 목사의 권한을 평가절하했다.
그건 맞다. 모든 권력이 개경에서 나오는 세상에서는 무조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를 부정한다면? 모든 권력이 개경에 집중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분산된다면?
전주는 더할 나위 없는 천하의 요충지가 될 거다.
바로 이곳을 왕선이 품은 거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이다.”
왕선은 양손에 힘을 잔뜩 실었다.
전주 목사가 되면서 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그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고, 권한도 막강해지는 걸 의미한다.
당장 눈에 띄는 힘은 역시 병사의 규모다.
“총 500여 명입니다.”
군적과 병사의 수를 일일이 대조한 마천목의 보고.
왕선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주공.”
전녹생이다.
“안색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아. 실은 병사의 수가 적은 거 같아서.”
“어느 정도 규모를 생각하십니까?”
“못해도 천명은 되어야 전주 일대를 제대로 장악할 수 있지 않겠소?”
“장악입니까?”
아차차.
실언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돌려본다.
“왜구가 어느 방면으로 공세를 취할지 모르지 않소. 그 말이외다.”
“그러시군요. 그런데 천 명의 상비군을 두려면 군량이 만만치 않습니다. 당장은 무리입니다.”
“마땅한 방법이 없소?”
“꼭 천명이어야 합니까?”
왕선은 다시 생각해봤으나 결론은 비슷하다.
천명은 있어야지 제대로 시작할 수 있다.
“최소 천명이오.”
“결국, 군량을 더 확보해야 하는데 결국 농업을 진흥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뭐요?”
“농업은 자연과 사람의 힘이 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자연이라. 강우량 같은 걸 말하오?”
“그렇습니다.”
“음. 강우량은 어찌 파악하오?”
농업을 잘 끌어가려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는 게 옳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자연적인 요소를 뺄 수 없다.
햇볕? 물? 바람? 뭐. 이런 것들.
이 중 가장 시급한 건 물이다. 가뭄이라도 닥치면 골치 아프다.
이 나라는 강우량의 지역적 차이가 심하고 무엇보다도 특정 계절에 강수가 집중된다. 농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를 잘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우기를 최대한 예측하는 방법과 대비책.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세밀한 강우량 기록이 필요했다.
“우택(雨澤)이라고 하여 땅속에 스며든 빗물의 깊이를 측정해서 파악하는 방법이 보편적입니다.”
왕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좀 이상한 거 같은데?”
“한계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건조한 땅과 습한 땅이 흡수하는 물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양의 비가 내려도 결과가 다르게 나오겠구려.”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로는 이 방법이 유일합니다.”
“효용성은 어느 정도요?”
전녹생은 쓰게 웃었다.
“필요해서 적고, 적으니까 보는 겁니다.”
“해결할 방법을 찾아봐야겠구려.”
“마땅한 방법이 있습니까?”
“적당한 그릇을 만들어서 빗물이 고인 푼수를 기록하면 어떻소?”
“···그릇을 말입니까?”
“그렇다오. 그게 멀쩡한 땅을 들쑤시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낼 것 같소만?”
“음.”
“왜 그러오?”
“그릇을 바닥에 두면 빗물이 사방으로 튀거나,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정확하게 파악이 되겠습니까?”
맞는 말이다. 그런 현상을 해결하지 못하면 정확한 강우량을 파악할 수가 없다.
그러나 훗날 만들어지는 측우기는 이런 문제점을 깔끔하게 해결한다. 문제는 왕선이 그 원리 따위를 알거나, 기억할 리가 없다는 거다.
“정확한 지적이오. 솜씨 좋은 장인을 찾아서 방법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소.”
“소생이 경험 많은 장인을 수소문하겠습니다.”
“그러시오. 잘 만들어서 비가 내린 시각, 비가 그친 시각을 기록하면 강우량을 파악하는 게 수월할 거요.”
“알겠습니다. 주공.”
일단 하나씩 시작하자.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아. 잠시 후에 돌아다닐 생각인데 같이 가시겠소?”
“소생이 모시겠습니다.”
“좋소.”
두 사람은 전주의 농지를 유심히 살폈다.
일하는 농민과도 다양한 대화를 나눴다.
그러던 중 왕선의 눈에 하천이 하나 보였다.
“음. 전 선생.”
“예.”
“비가 오면 하천의 수위가 올라가고, 가물면 내려가지 않겠소?”
“오. 이를 잘 활용하면 강우량을 파악할 수 있겠군요.”
“바로 그렇소.”
“하하하. 주공을 보필하다 보니 소생의 안목이 넓어지는 거 같습니다.”
“허. 전 선생이 이 사람의 얼굴에 금칠하오?”
“하하하. 소생이 그랬습니까?”
두 사람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그리고 지금 왕선은 측우기와 수표의 제작을 명한 거다. 물론, 미약하게 운을 띄운 수준에 불과하다. 이를 듣고 제대로 해내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닐 거다.
전녹생이 수공업에 조예가 깊은 사람도 아니고, 장인들이 짧은 시간에 뚝딱 만들어 내는 것 역시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해내야 한다.
“저...”
훈훈한 분위기를 뚫고 들어온 나지막한 목소리.
눈치를 살피면서 어물쩍 입을 여는 농민이다.
“말하게.”
“인근 하천 가운데 넓적한 돌을 놓고, 그 위를 깎아 받침돌 두 개를 세웁니다. 그사이에 모난 나무 기둥을 끼우면 효과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말에 좌중은 조용해졌다.
왕선이 명령했고, 전녹생이 알겠노라 답했으나 구체적인 방안이 깜깜하다는 건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걸 이르고 있지 않은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왕선은 눈을 껌뻑였다.
입을 열려고 할 때 그의 말이 조금 묘하다는 걸 느꼈다.
...있다가 아니라 들었다?
“누구에게 들었느냐?”
“송, 송구합니다.”
“송구할 필요 없다. 어서 말해보라.”
“실은 소인이 원래 경상도에 살았습니다.”
...이봐. 누가 당신 호구를 말하라고 했어?
“그때 알던 노비를 최근에 만났습니다.”
“노비?”
“예. 그 노비가 소인더러 가뭄을 잘 피하라면서 말해준 겁니다.”
노비라.
음. 장영실? 설마?
“혹시 이름이 장영실인가?”
“아닙니다.”
그럴 줄 알았어.
아주 조금 실망했다. 하지만 수표의 원리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 분명하다. 전주를 발전시키려고 하는 왕선의 처지에서 아주 절실히 필요한 인재다.
“그러면?”
“박자청이라는 노비였습니다.”
“박자청?”
“황희석 어른의 노비입니다.”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지?”
“일전에 황희석 어른이 인근을 들렸습니다.”
왕선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전녹생에게로 향했다.
“판서 황천록의 아들로 얼마 전에 출가한 인물입니다.”
“출가? 출가했는데 노비는 왜 데리고 다니오?”
“영원히 속세를 떠나는 게 아닐 겁니다.”
“음. 그래. 뭐. 이건 중요하지 않지. 만날 수 있소?”
“바로 수소문하겠습니다. 근처에 있다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다만, 황희석이 쉽게 수락할지는 의문입니다.”
“일단 만나봅시다.”
“소생이 가보겠습니다.”
“부탁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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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았다.
황희석은 아직 전주 인근이었다.
제 나름대로 보살행을 하고 있단다. 그런데 노비는 왜 데리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덕에 박자청이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아직 약관도 안된 박자청은 상당히 날카롭게 생겼다.
쉽게 말해서 한 성질 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그런 다음 받침돌과 나무 기둥은 쇠갈고리로 묶어 고정하고, 나무 기둥에 척(尺), 촌(寸)의 푼수의 수를 새기면 하천의 수위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확실한 효과가 있나?”
“무조건 있습니다.”
대단한 자신감이 아닐 수 없다.
“만들 수 있나?”
“어렵지 않습니다.”
“만들어 보겠나?”
“그건 어렵습니다.”
“만들었으면 하는데?”
“소인은 황희석 어른을 모시는 중입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
짧은 대화를 통해서 들여다본 박자청은 말 그대로 욕망 덩어리다.
천한 신분을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다.
그런데 전주 목사가 찾아 왔다. 처음에는 그저 일손이 부족해서 온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능력을 높게 평가하면서 온 거다.
해서, 박자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나름 머리를 쓰고 있는 거다.
“농업을 진흥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왕선의 말을 대꾸하지 않고 느닷없이 말을 돌린다.
다른 이유는 아니다. 제 가치를 더 돋보이려는 생각이다.
“그렇다네.”
“농사짓는 사람의 걱정은 수재와 한재가 첫째고 그다음은 바람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소인이 경작해보니 우리나라는 남풍이 불면 큰비가 오고, 북풍이 불면 맑습니다.”
“훌륭하군.”
박자청은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러나 말투에는 어떤 주저함도 없다.
“기단을 만들고 대나무에 기다란 깃발을 매달면 바람을 방향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하면, 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박자청은 제 가치를 올리는 데 최선을 다했다.
“다시 묻지. 만들 수 있나?”
“백번이라도 가능합니다.”
“만들어 보겠나?”
“소인은 천한 신분인지라 자유롭지 못합니다.”
굳이 속을 들여보지 않더라도 박자청이 원하는 건 뻔했다.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괜히 물었다.
“원하는 걸 말하라.”
“소인을 데려가 주십시오.”
“네 주인의 대접이 박하더냐?”
“아닙니다. 참으로 좋은 주인을 만나서 지금껏 부족함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배가 고플 때는 배부른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배불리 먹고 난 다음에는?”
박자청은 선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정말입니다.”
“박자청?”
왕선의 목소리는 살짝 틀어졌다.
그러나 박자청은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답했다.
“예.”
“군자처럼 베풀고 싶은 게 아니라 남부럽지 않은 재물을 가지고 싶은 거잖아. 안 그런가?”
박자청의 눈동자가 철렁였다.
왕선이 파악한 박자청은 말 그대로 욕망 덩어리다.
입신양명부터 재물까지.
그런 사람이 남을 위해서 선을 행한다? 어불성설이다.
왕선에게 큰 환심을 사고자 측은지심을 꺼낸 거다. 하지만, 박자청은 잔머리만큼이나 심계가 깊을 수는 없다. 약관도 되지 않았고 노비라는 신분이 겪을 수 있는 경험 자체가 보잘것없을 거니까.
물론, 이 사람이 권력을 탐하는 건 아니다. 노비라는 신분을 가진 박자청이 거기까지 생각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자고로 욕심은 현재 위치에서 볼 수 있는 수준에서 생기는 거니까.
어쨌든 제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댄 거 같다.
“다시 묻지.”
“노비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좋아. 일단 거기부터 하지.”
“재물도 많이 모아 보고 싶습니다.”
“안 막아. 제 능력껏 재물을 축적하는 걸 왜 막겠나? 부정부패만 일삼지 않으면 되니까 마음대로 해봐.”
황희석은 전녹생이 설득했다. 처음에는 마뜩잖은 반응을 보이던 황희석도 최영이 직접 천거한 전주 목사와 척을 지는 건 부담스러웠는지 결국 수긍했다.
< 10화 본격적인 시작(제목 수정)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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