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전주 목사 >
왕선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댔다.
“...형님.”
마천목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하다.
“참으로 기가 막혀서.”
어처구니가 없다.
나눈 대화만 떠올리면 구국의 충신이 따로 없다.
...그런데 이인임이다.
그의 생각, 그의 관점.
그래. 맞다. 그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 고려는 가장 좋은 나라다.
철저하게 진실만 내뱉었다.
어떤 거짓도 없다.
...그 말에 혹한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
정갈하고 잔잔한 어조라니.
...미친놈.
“형님.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하십시오.”
“술이나 먹자.”
있는 술을 그대로 마셔버렸다.
그래야 흑역사를 지울 수 있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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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기가 오른 이인임은 연신 히죽거렸다.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아. 재밌는 친구를 만나서.”
“아까 주막에 있던 사람을 이르십니까?”
“그렇지.”
이인임은 여전히 히죽거렸다.
“저번에 전주에서 의병 일으킨 사람이 왕선이라고 했지?”
“예.”
“몰락한 왕족이었고?”
“그렇습니다.”
“그래. 그런데 저놈이 왜 개경에 있을까?”
“알아볼까요?”
“됐어. 그냥 내버려 둬.”
이인임은 덮었다.
짧은 시간 즐거움을 준 대가였다.
...어차피 대충 짐작이 가긴 했다.
“최영과 정몽주를 잘 감시해.”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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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십니까?”
“어, 어.”
“그러게 이기지도 못할 술을 왜 그렇게 드셨습니까.”
“속이 상하니까 마셨지.”
왕선은 부대끼는 속을 겨우 참았다.
“그나저나 천목아.”
“예. 형님.”
“이인임이 나 모를까?”
“음. 송구합니다만, 형님을 어찌 알겠습니까? 멀리 떨어진 전주에 사는데.”
“그래. 그런데 내가 의병을 일으켰어. 심지어 왜구를 격퇴하고.”
“음.”
“개경에 알려지지 않았을까?”
“누군가 장계를 올렸다면 알 수밖에 없지요.”
“전주 목사 유영이 장계에 나를 거론했겠지?”
“그럴 겁니다. 남의 공을 탐하는 사람은 아닌지라.”
“골치 아프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그를 단속해야 했는데.”
“그런데 그 많은 장계를 이인임이 다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이름을 외우고 있기는 어려울 건데.”
“아. 그렇긴 한데, 내 이름을 말했을 때 이인임이 반응하는 거 같았거든.”
진짜다.
속으로 왕선의 이름을 되새겼으니까.
“형님 느낌이 그랬다면 그런 거겠죠.”
“뭐라고 하면 좋을까?”
“예?”
“개경에 온 이유를 만들어야지.”
“이대로 전주에 가면 이인임도 방도가 없을 건데요?”
“아니야. 이인임이 전주를 주시하게 될 거야.”
“어차피 몰아낼 거 아닙니까?”
“몰아낼 건데, 실패할 때도 대비해야지.”
“음.”
“일단 가자.”
“어디를요?”
“청탁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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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임은 입을 오므리면서 반겼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어젯밤에는 결례를 범했습니다. 광평군 어른이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나도 자네가 의병장 왕선일 줄은 몰랐어.
...역시 알고 있다.
그러면 이인임은 이걸 언급할 건가?
“됐네. 뭐. 대단한 이름이라고 소문내고 다니겠는가.”
“그래도...”
“짧은 대화였지만, 참으로 즐거운 시간이었어. 그 정도면 충분해.”
“송구합니다.”
“그래. 어디 출신이라고 했지?”
말하지 않는다.
왕선으로서는 좋은 수다.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습니다.”
이걸로 이인임의 신뢰를 산다.
“그래? 뭔가?”
이인임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러나
-어디 한번 보자. 너의 속을.
철저하게 계산된 미소다.
“소생은 전주 출신의 의병장이었습니다.”
“전주? 의병장?”
“예.”
“의병장도 아니고 의병장 출신이었다?”
“이제 의병장이 아니라서요.”
“어디 보자. 그래. 전주에 의병장이 왜구를 물리쳤다는 장계는 받은 적이 있지. 왕족 출신이라고 하던데?”
“송구합니다. 계보에서 멀어진 몰락한 왕족에 불과합니다. 다만, 의병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는지라 감히 왕족을 팔았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허허허. 그걸 내가 용서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나? 왕실의 일이거늘.”
만일 이 문제를 이인임이 문제 삼았다면 일은 복잡해진다.
그런데 우호적인 말이 나온 거다.
됐다. 이러면 일이 잘 풀리는 거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소생의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어제 말했지 않나? 왜구를 쓸어버려야 한다고. 자네가 큰 공을 세운 게 자명하거늘 어찌 벌한다는 말인가.”
왕선은 한껏 자세를 낮췄다.
“그나저나 개경을 떠난다고 들었는데?”
“실은 청이 있습니다.”
“청?”
“소생더러 찾아오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이인임의 눈에 약간의 실망감이 스쳤다.
-음. 제법 남달라 보였는데 어쩔 수 없나?
권신이 청탁하러 온 사람에게 실망한다?
이건 이대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왕선은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물러가는 게 좋을까?
아니면 직진하는 게 좋을까?
결정했다.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싶습니다.”
승낙하면 좋고.
거절해도 좋다.
승낙하면 신뢰를 얻은 거고.
거절하면 무시를 당한 거다.
“원하는 자리라도 있나?”
“소생은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설마?”
“전주를 다스리게 해주십시오.”
“허. 이제 약관을 벗어난 거 같은데 욕심이 과하군?”
“송구합니다. 하지만 잘 해낼 수 있습니다.”
“전주 목사가 누구지?”
“유영입니다.”
“무능한 인사가 아닌데.”
“하지만 잘하지도 않지 않습니까.”
“잘함의 기준은?”
“전주를 노리는 왜구에게 한 번이라도 패한다면 거두십시오.”
목사는 정3품 외직이다. 전주는 전라도의 상징적인 지역이다.
해서, 전주 목사는 상당한 요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단한 권세가 누릴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동북면 병마사 이성계가 그처럼 강한 사병을 가지고도 고려의 주도세력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현실을 상기한다면 전주 목사라는 관직이 낼 수 있는 실제적인 힘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그랬다. 고려의 권력은 개경에서 나오는 거다.
즉 작금의 고려에서 전주 목사는 허울 좋은 자리에 불과하다. 적어도 이인임의 관점에서는.
그렇지만 전주 목사를 아무에게나 내줄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를 만나러 개경에 온 건가?”
-최영과 정몽주의 동향을 살피고 있으니 진위는 금방 확인할 수 있겠지.
왕선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최영 장군을 만났습니다.”
“허.”
“성과는 없었고요. 어젯밤 주막이 인연이라면 인연으로 생각하고 찾아온 겁니다.”
“이렇게 묻지. 내 사람이 되겠다는 건가?”
“몰락한 왕족입니다.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싶을 뿐입니다.”
“말 돌리지 말고.”
“부정한 방법이 아니라 왜구를 격멸하고 선정을 베풀어 가문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내 말에 대답하라고 했는데?”
“쥐를 잡는데 흰 고양이 검은 고양이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를 딛고 일어나겠다?”
“소생을 전주 목사로 임명한 것이 광평군 어른의 최대 치적으로 남게 해드리겠습니다.”
왕선은 덧붙였다.
“반드시.”
이인임은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참에 왕족을 하나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더 큰 공을 세우면 군호도 내리고.
“하긴. 왜구 수백을 격퇴했는데 상은 내려야겠지. 거기다가 왕족 출신이기도 하니 명분은 더할 나위 없이 좋군.”
“하, 하면···.”
“주상께 고하겠네.”
“참으로 감사합니다.”
“바로 내려갈 텐가?”
“아닙니다.”
“그러면?”
“최영 장군의 사가로 갈 생각입니다.”
“거긴 왜?”
“자랑하러 갈 겁니다.”
“큭.”
이인임은 파안대소.
“하하하. 자네 참으로 마음에 드는군.”
“송구합니다.”
“하하하. 진심일세. 그래. 어서 가보라고.”
“예. 광평군 어른.”
왕선이 나간 직후 이인임은 웃음을 멈췄다.
그날 저녁.
“광평군 어른.”
“어찌 됐지?”
“최영 장군이 왕선을 내쳤습니다.”
“그래?”
“예. 소인의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
“잘 알겠네. 수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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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임은 빙그레 웃음을 보였다.
“장군.”
“광평군.”
“왕선이 다녀갔다고요?”
“날 찾아와서 광평군의 눈에 들었다고 자랑하더이다.”
“하하하. 그랬습니까?”
이인임은 기분 좋게 웃었다.
“광평군. 그놈이 무척 고약하던데.”
“그래도 제법 쓸만할 것 같소.”
“음. 주상께 내가 청할까 하오.”
“최영 장군이요? 왜요?”
“하는 모양새가 괘씸해서 말이외다. 내가 좀 굴려보게.”
“음.”
“싫으면 됐소.”
“아. 아니외다. 장군께서 하세요.”
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을 물끄러미 보는 이인임의 눈이 가라앉았다.
“아. 장군.”
“왜 그러시오?”
최영이 등을 돌렸다.
“왕선이 뭐라고 하던가요?”
“나더러 힘을 빌려달라고 하더군.”
거짓이 아니다.
그리고 왕선은 진실만을 말했다.
...그놈은 내 사람이다.
이인임은 익살스럽게 웃었다.
“고약한 놈이 분명하군요.”
“애송이에 불과하오.”
“하하하. 알겠습니다.”
이인임은 맑게 웃으면서 등을 돌렸다.
최영은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
“뭐? 전주 목사?”
“아. 광평군이 내준다더군요.”
“허.”
“장군.”
“왜 그러나?”
“이제 화를 내주세요.”
“뭐?”
최영은 황당한 표정.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
최영은 생각이 복잡했다.
...이인임이 없는 고려라.
그리고
...북진.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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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도통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개경을 벗어난 마천목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복잡한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네가 볼 때 이인임과 최영 장군의 관계는 어떤 거 같지?”
“이인임은 간악한 권신이고 최영 장군은 고려의 수문장입니다. 같이 논하는 거 자체가 무리입니다.”
“틀렸어.”
“예?”
“두 사람은 친해.”
“예?”
“적당하게 친해. 이를테면 정치적 동반자? 뭐. 그런 거지.”
“아, 아니. 최영 장군이 어째서 이인임과 손을 잡았다는 겁니까?”
“손을 잡은 거는 아니고 그냥 정치적 동반자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친구는 우정이지만 정치적 동반자는 이해관계지.”
“최영 장군이 권신과 이해를 같이 한다는 말씀입니까?”
마천목이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한다.
하지만, 왕선은 가볍게 일축했다.
“최영 장군은 왕의 충신이 아니라 고려의 충신이야.”
“그게 그거 아닙니까?”
“그러면 이인임을 죽여야지. 왕을 겁박하는데. 안 그런가?”
“······.”
“선왕이 승하하고 혼란에 빠진 고려를 정치적 경륜이 뛰어난 이인임이 잘 수습할 거라고 믿은 거지. 그래서 그를 지지 한 거야.”
“음. 최영 장군이 생각을 잘못했군요.”
“그렇지. 하지만 그런 거물일수록 본인 판단이 틀렸다는 걸 쉽게 인정하지는 않지.”
“그래서 복잡하게 오간 겁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나는 둘 사이에 작은 돌멩이를 던진 거야.”
“돌멩이요?”
“어. 돌멩이. 진정 고려를 위한다면 이인임이 아니라 내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고 전한 거지.”
“음.”
“정확하게는 최영 장군을 충동질 한 거야. 이 나라 고려의 국시. 북진을 거론하면서.”
“북진을 그릴 수 있는 고려는 이인임이 없어야 한다? 뭐. 이런 겁니까?”
“바로 그거야.”
마천목은 드디어 이해했다.
“정말 대단합니다.”
뭐. 이 몸의 진짜 주인이 가졌던 혜안이라고 할까?
왕선은 웃음으로 대신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찌합니까?”
“어쩌긴. 전주를 최대한 발전시켜야지.”
“그런 다음은요?”
왕선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 9화 전주 목사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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