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미륵이니라-8화 (8/187)

< 8화 주막에서 만난 사람 >

“형님.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마천목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왕선은 옅게 웃으면서 답했다.

“최영 장군이 미치고 싶다더군. 식솔들이 걱정이야.”

“그건 소제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두 분이 손을 잡은 겁니까?”

“그건 손을 내밀어봐야지.”

“오늘 내민 게 아닙니까?”

“오늘은 말만 주고받은 거고. 막상 현장에서 어찌 나올지는 모르지.”

“음. 확실하게 담판을 짓지 그러셨습니까?”

“아서라. 사람의 입이 한개 인 이유는 말조심하라는 거야. 아무리 좋을 말도 계속하면 상대가 실증을 느끼고 의심할 수가 있어.”

“음.”

“그러면 골치 아픈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는 거야. 적절하게 끊어야지.”

“복잡하군요. 소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주지. 최영 장군이 날 죽이려고 하면?”

“막아야지요.”

“막을 수는 있고?”

“소제는 죽겠지요. 그동안 형님은 도망치시면 됩니다.”

“너를 죽일 정도로 오늘 일이 간절하지는 않아.”

“······.”

“너를 살리고 세 번째 방책을 찾는 게 합당해.”

마천목은 눈만 껌뻑였다....이대로 있으면 저 소처럼 큰 남자의 입에서 낯부끄러운 말이 나올 거다.

왕선은 냉큼 발을 옮겼다.

그새 날은 어두워졌다.

“곧장 전주로 내려가자.”

“알, 알겠습니다. 앞장서겠습니다.”

마천목은 평소보다 능동적으로 나섰다.

왕선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다만 조금 아쉬웠다. 포은 정몽주를 만나지 못한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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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못 나가오?”

“내가 그걸 어찌 아오?”

“허. 문을 지키는 병사가 그걸 모르면 누가 아오?”

“지키긴 지키지. 시키니까.”

“뭐요?”

“시키니까 하는 거지 속사정은 모른다는 말이라오.”

마천목은 성문을 시키는 병사와 실랑이를 이어갔다.

그랬다. 성문이 완전히 봉쇄된 거다.

“그러면 언제 나갈 수 있소?”

“동이 트면 열고, 달이 뜨면 닫고. 뭐 그런다오.”

“그러면 우리는 밤새 어디 있어야 하오?”

“참으로 기가 막힌 질문이구려.”

“천목아. 됐다. 적당한 곳을 찾아보자. 어디 하룻밤 잘 곳도 없겠느냐?”

“알겠습니다. 당신 내가 형님 때문에 그냥 넘어가오.”

“참으로 기가 막힌 사람이구려. 그쪽이 이 사람 형님이오? 대단한 동생을 뒀소.”

왕선은 멋쩍게 웃으면서 냉큼 걸음을 옮겼다.

“천목아. 개경에서는 시비에 휘말리지 말라고 했는데?”

“송구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 말투가 속을 빡빡 긁어대더라고요.”

“그래도 참아야지. 객지에서 싸우면 우리만 손해야. 여기는 눈감으면 코 베어 가는 개경이라고.”

“송구합니다. 형님. 주의하겠습니다.”

“됐다. 어서 주막이라도 찾아보자.”

“이 넓은 도성에 주막 하나 없겠습니까?”

참으로 희한했다.

그 말이 끝나자 바로 주막이 보인 거다.

어수선한 개경의 분위기 탓인지 사람은 별로 없다.

“주모. 술상 좀 내오시오.”

“술은 왜?”

“개경 술맛이 궁금해서요. 혹시 안 됩니까?”

“아니다. 먹자.”

“사실 조금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냉수 한 그릇만 내다 줄지는 상상도 못 했지요.”

“그러니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지.”

“하긴. 그렇긴 하지요.”

그때 왕선의 등 뒤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그 말은 최영 장군의 부친이신 최원직 공의 유훈이었다오.”

노인으로 추정됐는데 목소리가 참으로 정갈했다.

어찌나 마음을 편하게 하는지 왕선은 그 여운을 잠시 즐길 정도였다.

내친김에 얼굴을 보지도 않았다. 그냥 그러고 싶다.

“하하. 그렇습니까? 미처 몰랐습니다.”

“최원직 공의 발자취가 가볍지는 않으나, 최영 장군의 명성이 워낙에 거대한지라 사람들이 잘 모른다오.”

“귀공께서는 두 분을 잘 아는가 봅니다?”

“최원직 공은 연배가 위인지라 잘 겪지 못했으나 최영 장군만큼은 잘 아오.”

“음. 들어보니 소생보다 연배가 한참 위가 분명하군요.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초면인데 그래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그러면 결례를 범하겠네.”

노인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집 술맛이 아주 괜찮다네. 종종 시간 내서 올 정도로.”

“방금 맛을 봤습니다. 나쁘지 않군요.”

“종종 들려서 맛을 보면 좋을 건데 들어보니 개경 사람이 아니라고?”

“예. 견문을 넓히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던가?”

“난세지요.”

“그렇지. 난세일세. 참으로 안타깝네.”

그 목소리에는 한스러움이 가득 담겼다.

어찌나 한스럽던지 술잔을 내려놓을 정도였다.

“어르신의 목소리에 시름이 가득합니다.”

“부족하지만 나랏일을 맡고 있네. 그러나 사람들이 뜻을 따라주지 않아.”

“허. 어째서 그렇습니까?”

“내 길이 틀렸다고 보는 거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르신의 길을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렵지 않지.”

“경청하겠습니다.”

“일단 한잔하고.”

“하하. 저도 한잔 마시겠습니다.”

참으로 기묘한 장면이었다.

두 사람은 허물없이 대화를 나눴으나 얼굴조차 확인하지 않은 사이다.

등만 마주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길이라.”

“예.”

“보잘것없는 노인이지만 바라는 게 있네.”

“무엇입니까?”

“천년 고려.”

그 말에 담긴 간절함.

그 말에 담긴 거대함.

그 말에 담긴 신념.

왕선은 가슴이 울렁였다.

...이 사람과 더 대화하고 싶다.

“난세라고 합니다. 백성은 고려를 원망합니다.”

“백성은 고려를 원망하지 않네.”

“어째서 그렇습니까?”

“백성은 참된 나라가 아니라 좋은 위정자를 바라니까. 백성이 원망하는 건 나라가 아니라 지주와 마름이지.”

“참된 나라라면 좋은 위정자가 있지 않습니까? 하여, 학정을 일삼는 무리를 벌할 수 있습니다.”

“고려의 세월이 500년일세. 항상 좋은 위정자가 있고, 시절이 아름다울 수는 없지. 무릇 나라에는 흥망성쇠가 있으니까.”

“어르신께서는 고려에 대해 자부심이 크군요.”

“나는 고려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나라라고 생각하네. 하여, 이 나라 고려를 지키고자 하네.”

노인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이어졌다.

“이 나라 고려만큼 좋은 나라는 없으니까.”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이 어르신과 뜻을 달리합니까?”

“내가 살아온 세월이 길지는 않으나 짧지도 않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 크고 작은 흠이 있지.”

“흠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쉽지만 그 흠을 가지고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 하지만, 나는 자부하네.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보다 이 고려를 더 연모함을.”

“그들은 고려를 연모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고려의 땅을 연모하지. 이 땅을 탐하는 무리에 불과해. 고려가 아니라 땅을 쫓고 맹목적인 충성을 하는 자들이지. 무지한 백성이 나라와 사직보다 다른 걸 바라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죄악이지.”

격한 내용이었으나 여전히 노인의 어조는 잔잔하다.

왕선은 그 뜻을 되새겼다.

그리고 궁금했다.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이런. 주책없이 내 말만 했군. 자네는 어떤가?”

“오늘 크게 배웠습니다. 소생도 천년 고려를 품겠습니다.”

“하하하. 이렇게라도 내 뜻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군.”

“고려에서 나고 고려에서 자랐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고려에서 나고 고려에서 자랐다라. 그래. 그러면 고려를 위하는 게 당연하지.”

정말 이 사람은 누굴까?

아직은 알아낼 단서가 없다.

최영과 비슷한 연배. 관직에 있다.

...대체 누구지?

“어르신께서는 난세를 어떻게 해결하실 겁니까?”

“일단 닥친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닥친 문제요?”

“하하. 자네 생각이 궁금한데?”

“동시에 말하는 건 어떻습니까?”

“일단 한잔하고.”

“현자의 말씀입니다.”

“자네 재치있군. 마음에 들어.”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술잔을 들었다.

“마시지.”

“예.”

그리고 동시에 내뱉었다.

“왜구부터 쓸어버려야지.”

“왜구부터 쓸어버려야지요.”

“허.”

“하하.”

“놀랍군.”

“저도요.”

“서책만 읽은 작자들은 늘 백성을 팔거든. 하지만 당면한 문제는 그게 아니지.”

“일단 외부의 적을 처리해야지요.”

“그래야. 난세의 종식을 선언할 최소한의 자격이 생기지.”

“앞으로 어르신의 길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이대로 갈 것이네.”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다면서요?”

“신경 쓰지 않네.”

“어째서 신경 쓰지 않습니까?”

“그들이 다 덤벼도 감당할 자신이 있거든.”

“하지만 정치는 현실입니다.”

“다 덤벼도 짓누를 힘이 있네.”

왕선은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때 약간의 소란이 들렸다.

“아. 이제 가봐야겠네. 참으로 즐거운 대화였어.”

“벌써 가십니까?”

“나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으니까. 더 있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 난세를 해결해야지?”

대체 누굴까?

고려에 이런 사람이 있었나?

“아. 자네 이름을 알 수 있을까?”

“왕선입니다.”

“좋은 이름이군.”

그 말과 함께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보낼 수 없다. 이름이라도 알아야 한다.

반드시 큰 힘이 될 사람이다.

왕선도 따라 일어섰다. 등을 돌렸다.

인자함이 가득한 노인이 보인다.

...그 순간 그의 눈과 마주쳤다.

-오랜만에 무료함에서 벗어났구나.

“!!!”

왕선의 눈이 출렁였다.

“나는 이인임이라고 하네. 나 알지?”

이인임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왕선이라고? 언제라도 나를 찾아오게. 귀하게 쓸 거니까.”

말을 덧붙였다.

“난세. 끝장내야지?”

< 8화 주막에서 만난 사람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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