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고려의 꿈과 자부심 >
“천목아.”
“예. 형님.”
“될 수 있다면 말로 해결할 것이다.”
“벌써 백번은 말씀하셨습니다.”
“천 번을 말해도 부족함이 없다.”
“···송구합니다.”
왕선은 재차 강조했다.
“개경은 전주와 달라. 작은 충돌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거다.”
고려의 정치 권력이 집중된 곳이니까.
“예. 꼭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이제 들어가자.”
왕선과 마천목은 500년 고려의 심장부 개경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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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의 중심가라고 할 수 있는 십자로는 엄청난 인파로 북적였다.
“형님. 개경입니다.”
그래. 개경이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이 그토록 발을 딛고 싶어 했던 개경.
왕선은 알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놀랍습니다.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 열심히 입을 떠드는 학사 그리고 군...사?”
주변을 구경하던 마천목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도성이지만 배치된 군사가 상당히 많군요.”
그제야 왕선은 감상에서 벗어났다.
“주변이 어수선하지?”
“제대로 살펴보니 오가는 사람들 모두 날이 선 상태입니다.”
마천목의 말대로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은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전시를 방불케 합니다.”
계엄령 수준의 공안정국이다.
“이인임의 고려는 항상 이런 모습일 거야.”
“···만일 정말로 그렇다면 아쉽군요.”
“왜?”
“상상했던 도성의 모습은 고려의 500년을 먹고 자란 튼튼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의 그것을 보입니다.”
“오.”
“왜 그러십니까?”
“가끔 보면 자네 동물적 감각이 아주 뛰어나단 말이야.”
“동...물적 감각이요?”
“칭찬일세. 창칼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숨을 쉬는 무장이라면 동물적 감각이 뛰어나야지.”
“칭찬이라고 하시니 감사합니다만 희한한 표현을 사용하시는군요.”
“원래 선각자는 희한해.”
“아. 네.”
“됐고. 어서 최영 장군이나 만나러 가자.”
“아. 바로 수소문하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볼일은 없습니까?”
이왕 온 김에 포은 정몽주도 만나고 싶긴 하다.
하지만 그럴 시간은 없다. 자고로 본진은 오래 비워두지 않는 게 고금의 진리니까.
그때 큰 소란이 일었다.
“당장 비키거라!”
수십 명의 무사가 복잡한 십자로를 더 어지럽힌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그러나 그들이 지나칠 예정인 길목만은 아무런 장애물도 없다.
그리고 호위를 받는 거대한 가마가 있다.
“광평군 어른의 행차 시다!”
광평군? 이인임이다!
왕선의 시선이 곧장 가마로 향했다.
그 순간 철통처럼 에워싸여진 가마의 발이 슬쩍 움직였다. 왕선은 마른침이 넘어갔다. 어찌나 건조해졌는지 목이 따가울 정도다. 하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가마의 주인을 반드시 확인하고 싶다. 모두 고개를 숙였으나 왕선은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욕망을 담은 눈동자가 보였다.
이인임이다.
왕선은 눈을 부릅떴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갑자기 등에서 식은땀이 올라왔다. 경직된 표정은 도저히 숨길 수가 없다.
그런데
-무료하군.
그렇게 눈동자는 사라졌다.
왕선은 그 자리에 굳은 채로 멈춰섰다.
...무료하다니?
일국을 손바닥에 올리고 마음대로 주물러 대는 권신이다.
그런데 무료하다니?
그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나 너무나도 강렬한 첫인상이다.
“형님.”
“어, 어?”
“이인임이 지나갔습니다.”
“어, 어. 그래. 봤네.”
“그런데 왜 그렇게 넋이 나가셨습니까?”
“아. 아무것도 아닐세.”
왕선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수소문은 해봤나?”
“예. 알아내긴 했습니다만.”
“고생했네.”
“어렵지 않았습니다. 최영 장군의 사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더군요.”
“서두르지.”
궁금증이 가득한 마천목이었으나 더 묻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왕선은 이인임의 가마가 지나간 길을 복잡한 눈으로 한 번 더 쳐다보고 마천목의 뒤를 따랐다.
최영의 사가는 제법 큰 기와집이었다.
그러나 상당히 허름했다. 모르고 지나갔다면 고려의 수문장이 사는 곳이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신다더니 그 말이 딱 맞습니다.”
마천목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너도 최영 장군처럼 해봐.”
“꼭 그렇게 해볼 겁니다.”
“최영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인사라고.”
중후한 목소리.
왕선과 마천목의 고개가 돌아갔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보인다.
“응당 고려의 남아라면 큰 목표를 가져야 하거늘. 고작 최영 따위를 목표로 하다니. 딱하군.”
“고려에서 최영 장군보다 큰 사람이 어딨다고 말을 함부로 하십니까?”
“왜 없나? 이성계도 있고, 정지도 있고.”
“최영 장군이 없었다면 그 사람들이 지킬 땅도 없습니다.”
“음. 그게 또 그렇게 되나? 자네 이름이 뭔가?”
“마천목입니다.”
“그래. 어쨌든 굳이 목표가 필요하면 이성계로 삼고, 꿈이 필요하면 더 넓은 세상을 보게. 최영은 쓸모없는 늙은이야.”
“말씀이 과하십니다.”
마천목의 얼굴은 시뻘게졌다.
언제 폭발할지 모를 정도로. 상당한 투기였다.
그런데 노인은 오히려 너스레를 떨었다.
“허허. 나와 한번 해보겠다고?”
“흥. 아무리 연배가 높다고 하더라도 말씀을 함부로 하셨습니다.”
“허허. 정말로 해보겠다고?”
“흥. 지금이라도 말씀을 정정하십시오.”
“정정이라.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는 있군. 건방지게 사과하라고 했으면 혼쭐을 내주려고 했는데.”
“뭐요?”
“그나저나 자네 무인이라면서 상대를 보는 눈이 그렇게 없나?”
화가 폭발한 마천목.
그러나 왕선이 손을 내저으며 만류한다.
부드럽게 웃으면서 한 걸음 나섰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형, 형님?”
마천목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선은 최대한 공손하게 예를 취했다.
“왕선이라고 합니다.”
“자네 나를 아나?”
“고려 최고의 명장 최영 장군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명장은 무슨 얼어 죽을.”
마천목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형, 형님. 저 괴상한 노인이 최영 장군이라고요?”
“어허! 천목아. 어서 예를 갖춰라.”
“그, 그것이···.”
여전히 믿지 못하는 마천목.
노인은 알 듯 모를 듯 웃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최영의 사가로 들어갔다.
“!!!”
왕선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너 최영 장군에게 찍힌 거 같은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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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린 건 없네.”
최영의 말대로다.
정말 차린 게 없다.
...냉수가 담긴 그릇이 딱 세 개.
괜히 심기가 틀어져서 손님을 이리 대접하는 건 아니었다.
최영은 누가 와도 이랬다.
마천목은 조심스레 냉수를 들이켜더니 자세를 한껏 낮췄다.
“송구합니다. 장군.”
“됐네. 괘념치 말게.”
“감사합니다. 장군.”
“그래. 그러면 지금 해볼까?”
“예?”
“나와 겨뤄보겠다며?”
짓궂은 최영의 말.
마천목은 안절부절.
왕선이 옅게 웃으면서 나섰다.
“하하. 장군. 이 친구 죽습니다.”
“죽기는. 노친네한테 힘이 어딨다고.”
“왜 없습니까? 장군께서 힘을 쓰시기만 하면 이 나라가 엎어질 건데. 단지, 안 쓰시는 거지요. 안 그렇습니까?”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
“그 깐깐한 전 선생이 서찰까지 준 걸 보면 보통 인사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속이 굉장히 음흉하군.”
“음흉하면 속내를 보이지 않지요. 소생은 다 꺼내고 있습니다.”
“음. 나는 냉수를 다 마시면 손님을 배웅해준다네.”
그 말과 함께 최영이 그릇을 들었다.
한 모금 마신다. 왕선이 슬쩍 보니 절반 정도 남았다.
...한 모금에 반이나 마신 거다.
그러니까 왕선이 꺼낸 말이 상당히 불편하다는 걸 의미한다.
단지, 전녹생의 체면을 생각해서 대화를 나누는 정도.
“전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고?”
“예.”
“그게 아니었다면 이미 그릇에 물은 없어졌을 거야.”
“전 선생보다 최영 장군이 백배는 깐깐하십니다.”
“워낙 청탁하러 오는 사람이 많아서. 전 선생의 보증이 있어서 들어오게 한 거고, 의병을 일으킨 의기를 높게 사서 말을 더 들어주는 걸세.”
판단을 잘못했다.
전녹생의 서찰은 냉수를 내주는 수준의 힘만 발휘한 거다.
“냉수가 언제 없어질지 모르니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서로 그게 편하겠지?”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가진 힘을 사용해주십시오.”
“자네 왕족이라고 했지?”
“계보에도 없는 몰락한 왕족입니다.”
“몰락한 왕족도 때에 따라서는 왕이 될 수 있네. 보위를 이을 사람이 없으면 말이야.”
“예?”
“왕족이 내게 와서 힘을 쓰라고 한다? 듣기에 따라서 괴상한 내용이 될 수도 있네만.”
“······.”
“답변에 따라서 내가 자네 머리통을 박살 낼 수도 있고.”
스산한 살기가 새어 나왔다.
일전에 마천목이 보인 그것에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마천목이 살기를 뿜어내면서 주체할 수 없는 악귀의 모습을 보였다면, 최영은 몽땅 갈무리된 전신의 기세였다.
그런데도 최영의 안색은 작은 변화도 없다.
나지막하게 내뱉은 말에 어찌 이런 힘이 실릴 수 있을까?
...그래. 맞다. 이 자는 최영이다. 과연 고려 최고의 명장답다.
“이유를 말씀드리면 됩니까?”
“살고 싶으면.”
“그전에 계획을 말씀드리지요.”
“들어보지.”
“거병할 겁니다.”
“허.”
“하여, 개경으로 진군할 겁니다.”
“역모 계획을 털어놓는다? 꽤 고약하군.”
“이건 두 번째 계획입니다. 장군께서 호응해주시길 바랍니다.”
“나더러 역모에 동참하라?”
최영은 물그릇을 들더니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절반으로 줄었다. 이 물이 없어지면 머리통을 날려버리겠다는 무언의 압박이다.
“원래 최고 상책은 장군께서 힘을 쓰는 건데 소생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러실 생각이 없어 보여서요.”
최영은 답변하지 않고 다시 물그릇을 든 채로 말했다.
“이유.”
마지막 기회.
거대한 압박.
“꿈이 있습니다.”
“나는 해몽하는 사람이 아니야.”
“품은 게 있다고 하지요.”
“용상을 품었다고 말하게. 그러면 이 불쾌한 대화를 끝낼 수 있으니까.”
“자부심.”
“자부심?”
“예. 자부심입니다. 500년의 자부심.”
최영의 표정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왕선은 옅게 웃으면서 물잔을 들었다.
절반을 마셨다.
최영의 눈에 이채가 띄었다.
“궁금하군. 자부심이라. 그게 뭔가?”
“북진입니다.”
최영의 눈이 철렁였다.
왕선은 다시 물잔을 들었고 마셨다.
물은 거의 남지 않았다.
“왕실의 종친으로서 이 난세를 종식하는 데 힘을 보탤 겁니다. 하여, 주상을 올곧게 보좌하여 이 나라 고려의 꿈을 이루고 자부심을 되찾을 겁니다.”
왕선의 어조는 격정적이었다.
“고려의 꿈과 자부심.”
물잔을 들었다.
“북진.”
“!!!”
“요동을 정벌해낼 겁니다. 물론, 이 나라의 지금을 생각하면 도저히 이룰 수 없지요. 하여, 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자부심입니다. 이 나라의 국호가 고려인 근본이자 자부심입니다.”
최영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가는 게 보일 정도로 침착함을 잃었다.
조금 전에 보인 거대한 기세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다.
“미친놈이군.”
“미쳐야 꿀 수 있는 꿈이지요.”
“언제까지 미칠 거지?”
“영원히.”
왕선은 싱글거리면서 말했다.
“이제 답변을 들을 차례가 된 거 같습니다.”
최영이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왕선의 손이 움직였다.
...남은 물을 모두 마신 거다.
“이런 냉수가 떨어졌군요. 하면, 소생은 일어나 보겠습니다.”
답변을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나가려는 순간 미세하게 떨리는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도 미치고 싶네. 영원히.”
< 7화 고려의 꿈과 자부심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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