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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6화 (6/187)

< 6화 신하로서 >

“전녹생이라고 하오.”

복숭아나무에 갔더니 연륜이 느껴지는 학자가 있다.

왕선은 어리둥절한 표정.

“왕선이라고 합니다.”

“전주에 내려와서 세월을 보내다가 천목을 알게 되었다오. 정의로운 사람이오.”

“잘 알고 있습니다.”

“천목이 의형제의 맹약을 맺는다길래 증인으로 오게 되었소. 행여라도 이 늙은이가 주제넘은 짓을 한 거라면 사과드리오.”

“전 선생께서는 왕자의 사부님을 역임하셨던 분입니다. 학문이 아주 출중하지요.”

혹시라도 왕선이 마뜩잖아할 걸 우려한 마천목의 말이다.

왕선은 그의 걱정을 가볍게 일축하면서 예를 갖췄다.

“이거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결례를 범했군요.”

전녹생은 소탈하게 웃었다.

“하하. 아닙니다. 나이 든 노인의 허명에 불과하지요.”

“겸손이 과하십니다.”

“이런. 천목이 덕분에 얼굴에 금칠하게 되었구려. 이 늙은이야말로 왕 선생을 보고 싶었소.”

“저를요?”

“왜구를 격멸한 의병장. 명성이 자자하오.”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의병과 관군이 한 거지요.”

“허.”

“왜 그럽니까?”

“천목과 전주 목사가 아니라 의병과 관군이라고 했소?”

“천목은 의병이고 전주 목사는 관군이지요.”

짤막한 왕선의 말에 담긴 뜻은 남달랐다.

단지 공을 넘기는 수준이 아니라 백성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보인 거다.

전녹생은 내심 감탄했다.

“왕족이라고 들었소.”

“계보에도 없는 몰락한 왕족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왕족이오.”

“하하. 왕족은 적통의 4세손, 방계의 3세손까지 인정됩니다.”

“그래도 왕족이오.”

“하하...”

“왕 선생의 몸에 태조의 피가 없소?”

“그건 아니지요.”

“그러면 왕족이오.”

전녹생은 유독 왕족을 강조했다.

-정통 왕족의 비루함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고려를 다시 세울 줄 알았던 금상도 날이 갈수록 암군의 모습을 보이고, 왕자는 왕재가 없다. 그런데 이 사람은 참으로 다르구나. 그래. 이 나라 고려의 왕족이라면 응당 이래야지.

왕선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한스럽도다. 만일 이런 사람이 왕자였다면.

이건 곤란하다.

왕선은 입을 열었다.

“전 선생.”

“왜 그러오?”

“나는 큰 뜻을 품고 있습니다.”

“큰 뜻?”

전녹생의 눈에는 호기심과 기대가 어렸다.

“이 나라 고려를 반석 위에 올리는 ‘신하’가 되고 싶습니다.”

신하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그러나 전녹생의 머릿속에 그 단어는 빠르게 사라졌다.

앞에서 강조한 말이 선명하게 남은 거다.

“어떻게 올리고자 하오?”

“일단 왜구부터 쓸어버려야지요?”

전녹생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박장대소한다.

“하하하!”

“답변이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참으로 우문현답이었소. 그래. 왜구부터 정리해야지. 이 나라의 가장 큰 근심이 왜구가 아니면 뭐겠소?”

“우문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아니외다. 우문이었고 현답이었소. 지난 내 삶이 부끄러울 정도로.”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잠시 소외됐던 마천목이 끼어들었다.

전녹생은 부드럽게 웃었다.

“많은 학자와 토론했지. 어찌하면 이 나라를 바로 잡을 수 있을까? 어떤 답이 나왔을까?”

“궁금합니다.”

“요순이 나오고, 주나라가 나오고, 성현이 나오고, 덕치가 나오고, 왕도가 나왔다.”

“······.”

“탁상공론했다는 말이야. 모두 옆구리에 서책이나 끼고 앉아서.”

“아.”

“왕 선생의 말대로 이 나라가 처한 가장 큰 위기는 왜구이거늘. 이를 언급한 학자가 단 한 명도 없어.”

“아니, 한 명도 없었습니까?”

“그래. 아···.”

“왜 그러십니까?”

“이 논의 자체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어서. 지금 생각해보니 그는 이 답을 알고 있었구려.”

“그게 누굽니까?”

이번에는 왕선이 끼어들었다.

“왕좌지재라고 불리는 사람이라오.”

“포은 정몽주.”

“그렇소.”

역시.

“그를 만날 수 있습니까?”

“하하하. 왜. 그를 곁에 두고 싶소?”

“아니라면 거짓말이지요.”

“포은을 곁에 두려면 왕좌에 앉아야 하오만?”

“포기해야겠군요.”

“음. 그런데 보름달이 없다고 밤공부를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소?”

“물론입니다. 반딧불이라도 잡아서 할 건 해야지요.”

“내가 그 반딧불이 되고 싶소만.”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겸손이 과하십니다. 태산을 덮을 보름달을 어찌 반딧불이라고 하겠습니까?”

“그건 정몽주고.”

“하하하.”

“너무 아쉬워하지는 마시오. 정도를 따라가면 포은과 가까워질 수는 있으니까.”

“그렇군요.”

“대신 소생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잘 부탁하오. 전 선생.”

“예. 주공.”

주공.

주인의 공대말이다.

지금 전녹생은 완벽하게 왕선의 사람을 자처한 거다.

고려의 신하가 아니라 왕선의 사람이다.

“자. 그러면 증인 해주겠소?”

“물론입니다. 이 뜻깊은 자리에 소생이 있어서 참으로 기쁩니다.”

“나 또한 전 선생을 얻어서 기쁨을 참을 수 없소.”

“그러면 천지신명께 고하겠습니다.”

“시작하시오.”

오늘 왕선은 한 명의 동생과 한 명의 수하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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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충격적인 소식이 전주를 뒤흔들었다.

고려 31대 왕 왕전이 홍륜에게 시해당한 거다.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그리고 명덕태후를 비롯한 왕실 인사의 거센 저항을 짓밟고 이인임이 왕우를 왕좌에 앉혔다. 바야흐로 혼돈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전 선생. 왕의 사부님이 되었구려. 감축드리오.”

“···주공.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감복할 일입니다만.”

전녹생은 한숨을 쉬었다.

“신하 된 도리로 참으로 불충하고 불순한 말이지만 나라로 볼 때는 우환입니다.”

왕우를 가르친 사람이 전녹생이다.

그가 얼마나 둔재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학문을 가르치면서 얼마나 탄식했던가?

지금은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는 탄식이 새어 나온 거다.

“무엇보다 이인임이 후견인이라.”

“왜 그러오?”

“이인임은 선왕의 충신이었으나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소?”

“보십시오. 벌써 태후마마를 겁박하고 왕실을 조롱했습니다. 재상들은 모두 그의 당여가 되고 있습니다. 선왕이 아니라면 그를 제압하여 써먹기는 힘듭니다. 금상께서는 그의 손바닥에서 놀아날 겁니다. 이 나라가 걱정입니다.”

공민왕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왕선은 탐탁지 않았으나 입을 대지는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이인임의 시대가 개막된 건 막을 수 없다.

문제는 그가 그냥 평범한 권신이 아니라는 거다. 가진 능력을 떠나서 흘러가는 권신이 아니다. 이인임 집권기는 고려의 병폐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시기, 종기가 곪을 대로 곪아버린 시기다. 그러니까 이 시대가 조선으로 가는 길목이다. 조선 건국을 앞당기는 고려 망국의 본격적인 서막. 뭐 그런 거.

결국, 이걸 그냥 내버려 두면 역사는 그대로 진행된다.

고작 전주에서 아등바등하는 왕선이다. 이성계를 어찌하기는커녕 나비효과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꼼짝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거다.

복잡한 생각을 하던 왕선은 전녹생의 한스러운 눈과 마주쳤다.

-만일 주공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났더라면. 그랬다면 뭔가 바뀌었을까? 용상의 주인이 바뀌었을까? 되었다. 이제와서 이 무슨 쓸데없는 생각인가.

...곤란한 생각을 하고 있다.

왕선은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판을 엎어야 한다. 어떻게 판을 엎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이인임의 시대를 빠르게 종결할 수 있을까?

번뜩이며 스치는 게 있다.

“전 선생.”

“예. 주공.”

“최영 장군 아시오?”

“고려 땅에 최영 장군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친분이 있소?”

“격의 없이 술 한잔 걸칠 사이는 됩니다.”

“만나게 해주시오.”

“예?”

“개경으로 가겠소.”

“주공. 지금 개경은 위험합니다.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사람은 이인임이 넘기지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말고 서찰 하나 써주시구려. 쥐도 새도 모르게 냉큼 다녀오리다.”

< 6화 신하로서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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