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대승 >
“정말 야습이 있습니까?”
“반반일세.”
“반반이라고요?”
마천목과 유영은 떨떠름한 표정.
“선수를 잡은 아군이 먼저 만나자고 했지.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왜장이라면 아군이 시간을 끌려고 한다고 생각할 거야. 그러니 야습을 할 수밖에.”
“만일, 아니라면 어찌 되는 겁니까? 진짜 만나자고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더 편하고 좋은 거지.”
“그게 어째서 그렇게 됩니까?”
그건 영업비밀.
왕선은 손을 내저으면서 분위기를 환기했다.
“일단 야습을 대비하게. 적이 오지 않더라도 철저한 경계는 바람직한 거니까.”
맞는 말이다.
마천목과 유영은 각각 의병과 관군을 통제했다.
그리고 등요광의 서찰이 당도했다. 왕선은 시원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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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물자 금세 사방이 어두워졌다.
오늘은 평소보다 유독 어둡다.
“하늘이 돕는군.”
등요광은 득의양양하게 웃으면서 병사를 이동시켰다.
500명의 왜구는 쏜살같이 움직였다.
“대장님. 고려군의 주둔지가 보입니다.”
“어떻지?”
“소수의 경계만 있습니다.”
“역시.”
“대장님의 계책대로 고려군은 방심하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내부에 문제가 있었을 거야. 그런데 만나기로 했으니까 세상 편하게 있을 거고.”
“맞습니다.”
“좋아. 준비는?”
“완벽합니다.”
등요광은 싸늘하게 웃으면서 칼을 빼 들었다.
“모조리 쓸어버려. 해가 뜨면 전주성을 피바다로 만들 수 있게.”
“예!”
그 즉시 왜구는 돌격을 시작했다.
등요광의 눈에는 희열이 넘쳤다.
거침없이 돌격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듬직하다.
“와아아아아아아!”
거대한 함성.
고려군의 지척에 이르자 외친 거다.
이제 기겁하면서 죽어나 갈 고려군의 모습을 보는 것만 남았다.
“와아아아아아아!”
드디어 병사들이 고려군 주둔지에 발을 내밀었다.
손이 움찔움찔한다.
이제라도 함께 달려가서 마음껏 칼을 움직이고 싶다.
“좋아.”
등요광은 칼을 휘두르면서 미친 듯이 달렸다.
밤바람이 참으로 시원했다.
-와아아아아아아!
사기 충만한 병사들의 함성이 하늘을 놀라게 할 정도다.
...놀라게 할 정도다? 갑자기?
그때 시원하던 밤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
아주 잠시.
곧바로 급격하게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갑...자기?
그 순간 사방에 밝아졌다.
“!!!”
-쏴아아아아아앗!
-쏴아아아아아앗!
불화살이었다.
당황한 등요광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확인했다.
“!!!”
“대, 대장님! 속았습니다!”
“젠, 젠장! 퇴각, 퇴각해!”
“병사들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이런 멍청한!”
사태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고려군의 군막에 진입한 병사들을 기다린 건 엄청난 크기의 화마였다.
화마는 무서운 기세로 살아 숨 쉬는 모든 걸 삼켰다.
인간의 발걸음으로는 피할 수 없는 속도였다.
인간의 힘으로는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목숨을 취하는 사신과도 같았다.
“빌어먹을!”
등요광의 입에서 절규가 터졌을 때다.
천만다행으로 화마의 사정권에 들어가지 않은 왜구들의 발목이 잡혔다.
-부아아아아앙!
마천목이었다.
화마의 기세를 피하던 병사들에게 마천목의 창은 황천길의 안내판과도 같았다.
화마를 피하면 창이 휘둘러졌고, 창을 피하면 화마가 있다.
허둥지둥.
그새 화마는 더 큰 힘을 발휘했다.
그리고
-쏴아아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아아앙!
다시 화살이 쏟아졌다.
왜구들의 눈에는 절망이 일었다.
절망 뒤에 보인 건 황천길이었다.
멀찍이서 전황을 살피던 왕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목사.”
“예.”
“저 왜장이 뭐라고 떠들어 대는 거요?”
“글쎄요. 아무래도 욕설이 아니겠습니까?”
“미친놈일세. 남의 땅에서 욕이나 하고 말이야.”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저 왜장 생포할 수 있겠소?”
“생포요?”
“잡아서 할 일이 좀 있어서요.”
“음.”
“아. 무리하지는 마시오. 그 정도로 가치 있는 목숨과 일이 아니라서.”
“시도는 해보겠습니다.”
“그러시오. 아. 하나 더.”
“예.”
“숨 쉬고 눈알만 붙어 있으면 충분하오. 사지는 필요 없으니까.”
“눈...알이요?”
“그렇소.”
“예. 그러면 확실하게 생포할 수 있습니다.”
“좋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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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이었다.
500명에 육박하던 왜구는 전투에서 갑절 이상 죽었다.
살아남은 왜구는 지리멸렬하여 흩어졌는데 맹렬하게 추격해서 거의 다 죽였다.
마천목은 창을 질질 끌면서 모습을 보였다.
“400구가 조금 넘습니다.”
“정확하게.”
“413구입니다.”
확인된 왜놈들 시체 수다.
왕선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불에 타서 죽은 놈들까지 포함한 건가?”
“예.”
“미처 확인할 수 없는 경우는?”
“애매한 숫자도 포함 시켰습니다.”
“그거 빼면 어느 정도인가?”
“392구입니다.”
“음. 이래저래 빼고 더했을 때 최소 50명은 살아서 도주했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그 50명이 뭉쳐 다니지는 않을 겁니다. 그 정도면 인근 관청의 군사들이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유영이다.
왕선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산속에 숨어 있거나 뭐 그러겠소?”
“예.”
“우리 약초꾼이 산에 갔다가 그놈들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헤어지겠소? 그거 참 바람직하군. 고려 약초꾼과 왜구가 친구 사이? 국경을 넘어선 우정? 뭐 그런 거?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야. 안 그렇소?”
유영의 얼굴이 뻘게졌다.
“내가 말했지 않소? 죽는 사람이 당신 식솔이라고 생각하라고. 어?”
“송, 송구합니다.”
“당장 군사 풀어서 싹 다 잡아 오시오.”
“그, 그리하겠습니다.”
군사 전략적인 내용을 덧붙였다.
“무조건 잡아야 할 거요. 그것들 남겨두면 왜구 놈들 다시 올 때 기를 쓰고 결합할 거니까.”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무려 전주 목사 유영이 탈탈 털리고 있다.
주변을 지키던 부관들은 시선을 돌려서 먼 산 만 쳐다봤다.
그리고
“이놈이 그놈 맞소?”
“아, 예. 왜장 등요광입니다.”
생포된 등요광의 몰골은 말 그대로 거지꼴이었다.
팔 하나 없는 거지꼴.
“등요광?”
“수치스럽도다.”
“저놈이 또 뭐라고 하는 건가?”
“···부끄럽다고 합니다.”
역관이다.
그를 쳐다본 왕선은 미간을 찌푸렸다.
“수치스럽다고 한 거 같은데?”
“그, 그것이 왕 선생께서 불쾌하실까 봐 그랬습니다.”
“있는 그대로 전해야지. 외교에서 미세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데.”
“송구합니다.”
“제대로 합시다? 역관 나리?”
“송, 송구합니다.”
왕선은 등요광을 지그시 쳐다봤다.
뜨거운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났다.
“됐다.”
무슨 말일까?
모두 왕선만 쳐다봤다.
“저거 밖에 끌고 가서 불태워 죽이게.”
“예?”
애써서 잡아 왔는데 이대로 죽이란다.
당혹스럽다.
“아니다.”
“예.”
역시. 이래야 보람이 있지.
그런데
“전주성에 끌고 가서 화형에 처하도록. 백성들 돌팔매질도 속 시원하게 시키고. 우리 백성들도 살풀이를 좀 해야겠지. 그래. 그게 맞아. 그게 저놈에게 가장 어울리는 죽음이야.”
왕선은 더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심장 박동 소리를 느꼈다.
“왕선. 떨리나? 이제 시작이야. 잘 보라고.”
전주에 왕선이라는 이름 두 글자가 또렷하게 새겨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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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집에서 피로를 풀던 왕선.
마천목이 상당히 경직된 표정으로 다가오는 걸 쳐다봤다.
“대장님.”
그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싱긋 웃었다.
“불가.”
“예?”
“미안한데 나는 관우, 장비 아니면 곤란하네.”
마천목은 눈을 껌뻑이다가 말했다.
“대장님의 의제가 되고 싶습니다.”
“내 말 못 들었어? 관우, 장비가 아니면 곤란해.”
“제가 관우, 장비만큼 강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그래. 나도 자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닐세.”
“그러나 장비처럼 장판교에서 홀로 다리를 지킬 결기가 있고, 관우처럼 목숨으로서 의기를 지킬 수 있습니다.”
사실 마천목 정도면 훌륭하다. 전장을 압도하는 위력을 분명하게 증명했다.
일당백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물론, 사람이 단순하고 병법의 기초가 없기는 하지만, 그건 차차 배우면 될 일이다.
비슷한 연배인 왕선이 워낙에 똑똑하긴 한데, 그건 원래 이 몸의 주인이었던 ‘진짜’ 왕선이 비정상적으로 천재인 거다.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복숭아나무.”
“예?”
“거기로 가지.”
자고로 형식은 갖춰야 하는 법.
그게 예법이다.
< 5화 대승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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