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두 글자 >
마천목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결례가 많았소.”
“그러면 내가 의병장. 동의하오?”
“···그러시오.”
“아쉬워하지 마오. 왕족이 의병장을 하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겠소?”
“그건 그렇지만.”
“아. 그리고 댁보다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말 편히 하겠네.”
“···그러시오.”
“그러시오? 허. 연장자이고 심지어 왕족이거늘. 설마 계보에서 멀어졌다고 왕족이 왕족으로 안 보이나? 그러시오? 허. 그러시오?”
왕선이 쏘아대자 마천목은 마지못해 수긍했다.
“···그러십시오.”
“그렇지.”
“그런데···.”
“진짜 족보 맞으니까 의심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왕선은 싱그럽게 웃었다.
“자 그러면 전주 관내에 소문내게. 왕족 출신의 의병장이 의병을 모집한다고.”
“그리하지요.”
“기대하리다.”
“...왕 선생께서는 같이 안 가십니까?”
“허. 의병을 일으키겠다는 사람이 이렇게 모른다.”
“예?”
“손자가 이르길 용병의 원칙에는 가벼운 수레 천 대와 무장한 수레 천 대, 갑옷 입은 병사 10만 명, 천 리 길에 걸쳐 나를 식량, 국내와 국외의 비용, 빈객 접대비, 아교와 칠에 쓰는 재료, 수레와 갑옷을 정비하는 비용 등이 하루에 천금씩 소모되기 때문에 이런 준비를 하지 않으면 감히 군사를 일으킬 수 없다고 했네.”
마천목은 눈을 껌뻑였다.
“미,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군자금 구해오겠네.”
“방법이 있습니까?”
“걱정하지 말게.”
“아.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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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이 도착한 곳은 고래등만한 기와집이다.
이곳은 전주에서 소문난 갑부 양홍의 집이었다.
“이판사판 공사판이지. 양홍도 못 잡으면 이성계를 어떻게 상대하겠어?”
왕선은 심호흡을 크게 했다.
그리고
-쾅!
시원하게 대문을 걷어찼다.
놀란 머슴들의 시선이 한몸에 느껴졌다.
왕선은 단전에서 기를 모아서 버럭버럭했다.
“어허!”
“예?”
“손님이 왔거늘!”
“누, 누구십니까?”
“양홍을 보러 왔다!”
대놓고 양홍의 이름을 꺼냈다.
그제야 머슴들은 부랴부랴 움직인다.
“송, 송구합니다.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됐고. 양홍은?”
“별채에 계십니다.”
“별채?”
왕선이 도끼눈을 뜨자 머슴은 자라목을 한다.
“백주에 별채? 미쳤군.”
백주에 별채에 있으면 안 된다는 법도라도 있단 말인가?
별 희한한 법도가 아닌가.
머슴은 목구멍까지 말이 올라왔으나 왕선의 기세가 워낙 대단한지라 냉큼 집어넣었다.
“그, 그러게 말입니다. 모셔올까요?”
“내가 가지.”
머슴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분위기상 제 입으로 꺼낸 말이었으나 만일 정말로 양홍을 데려오라고 했다면?
상대를 떠나서 일단 양홍은 자신에게 성질을 냈을 거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뭐하나? 앞장서야지.”
“알, 알겠습니다.”
왕선은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뒷짐을 쥔 채로 걸었다.
그리고
“저 사람은 누구냐?”
의아함이 가득한 양홍의 목소리.
머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모르는 사이란 말인가?
그랬는데 대문을 걷어차고 고함을 지르고 행패를 부렸단 말인가?
머슴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왕선을 노려봤다.
왕선은 그를 슬쩍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고생했네.”
“허. 이보시오.”
“이보시오? 자네 미쳤나?”
머슴은 찔끔하더니 눈치를 살핀다.
왕선은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양홍을 쳐다봤다.
“양 부자. 언제까지 앉아서 나를 맞이할 거요?”
“나를 아오?”
“전주에서 제일 부자가 아니오?”
“그게 나를 아는 건가?”
“계속 세워둘 거요?”
“미친놈이군. 당장 내쳐라.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경을 칠 것이야.”
순식간에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머슴들이 노려보면서 움직일 때였다.
“나는 사해 용왕의 혈통. 감히 함부로 몸에 손을 대면 경을 칠 것이다.”
사해 용왕의 혈통.
고려 땅에서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아주 간단했다.
“왕족입니까?”
양홍의 말투가 대번에 바뀌었다.
왕선은 매섭게 노려봤다.
“전주 관청에 내야 할 곡식을 빼돌렸지?”
상황이 상황인지라 왕선도 말투를 바꿔줬다.
“뭐, 뭐요?”
-내가 1천석 빼돌린 걸 어떻게 알지?
일단 찔러본 거다. 보나 마나 구린 데가 있을 거라서.
역시 곧바로 생각하지 않는가.
“1천석 정도 되는군.”
양홍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좋아. 토지 겸병까지는 이해하겠어. 그런데 공전의 쌀을 빼돌린 건 너무 하지 않나? 가뜩이나 나라 사정도 개판인데.”
“!!!”
“혹시 전주 목사 유영도 한 통속?”
양홍은 주변을 돌아보면서 황급히 외쳤다.
“모두 물러가라.”
“예, 예.”
주변이 조용해지자 왕선은 다리를 슬쩍 만지작거렸다.
양홍은 어색하게 웃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벌써 여기저기 쑤시는군.”
“어서 드시오.”
“굳이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
왕선은 성큼성큼 걸어서 별채로 들었다.
양홍은 눈치를 슬쩍 보더니 뒤를 따랐다.
별채에는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보아하니 팔자 좋게 술판이나 벌인 게 분명하다.
왕선은 술잔을 툭툭 치면서 비꼬았다.
“백주에 팔자 좋구려?”
“하하. 선대의 공덕이지요.”
“선대의 공덕은 무슨. 향리 출신이.”
“······.”
“나 정도는 되어야 선대의 공덕을 찾는 거지.”
“그, 그렇지요.”
아무리 양홍이 전주 제일의 부자라고 하더라도 왕족에게 함부로 할 수는 없다.
나라 꼴이 아무리 개판이라도 왕족은 왕족이다.
마음 독하게 먹으면 전주의 돈 많은 향리쯤은 순식간에 박살 낼 수 있다.
“그나저나 군호가 어찌 됩니까?”
“군호?”
“예. 군호를 불러야 맞지 않습니까.”
“됐소. 그냥 왕 선생이라고 하시구려.”
“하지만···.”
“거. 왜 그렇게 따지는 게 많소?”
“아무리 그래도 왕족을 함부로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왕선에게 군호 따위가 있을 리 없다.
몰락한 왕족이 아닌가.
미지근한 반응을 본 양홍의 눈이 가늘어졌다.
“군호. 말씀해주시지요?”
“음.”
“군호 말해달라고 했소만?”
“···양 부자?”
“허. 어이가 없네. 백주에 쳐들어와서 이 난리를 친 것도 부족해서 왕족을 사칭해?”
“아들은?”
“뭐?”
안색을 험악하게 찌푸리는 양홍.
왕선은 그의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개경에 있는 내 아들은 왜?
왕선은 묘한 웃음을 보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개경에 보냈더군?”
“허. 전주 땅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이인임에게 뇌물을 줬더군.”
“!!!”
“이인임은 노하면서 돌려보냈고.”
“!!!”
“그러자 경복흥에게도 뇌물을 줬지?”
“!!!”
“역시 효과는 없고.”
놀란 양홍의 입은 벌어졌다.
왕선은 술잔을 다시 툭툭 쳤다.
“맛나겠는데?”
“한, 한잔 받으십시오.”
술병에서 술잔으로 술이 이동하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금상께서 정정하시거늘. 뇌물을 준다고 효과가 있겠나?”
“그, 그것이.”
아무리 개판이라도 공민왕이 살아 있다. 구린 데가 많은 이인임과 경복흥이라도 눈치껏 해 먹는 시기다. 고작 전주의 향리 아들을 출사시켜주려고 뇌물을 받지 않는다. 자고로 큰물에서 노는 거물들은 송사리가 주는 건 안 받아도 된다.
“군호를 알려달라? 미쳤나? 내가 누구라고 소문내고 다닐까?”
“하, 하면···.”
“대충 알아듣지?”
양홍의 눈은 크게 흔들렸다.
보아하니 개경과 연줄이 있는 왕족이 분명하다.
그리고 어떤 모종의 임무를 맡은 것 같다. 그러니 이런 자세한 속사정을 알고 있는 거다.
그를 슬쩍 쳐다본 왕선은 술잔을 기울였다.
“1천 석이라.”
양홍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을 차렸다.
모종의 임무. 그건 자신의 부정과 관련이 있는 거다.
야단났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왕, 왕 선생.”
“개경에 고하겠어. 전주 목사 유영도 한통속이라고 했지?”
“아, 아닙니다. 목사와 일면식도 없습니다.”
“그건 두들겨 보면 알겠지?”
난리다. 죄 없는 목사가 처벌을 당하면 뒷감당할 수 없고, 그게 아니더라도 곡식을 빼돌린 사실을 목사가 알아도 경을 친다. 이래저래 큰일이다.
“왕, 왕 선생. 이번만 넘어가 주십시오.”
“넘어가달라?”
“예, 예.”
“넘어가는 게 아니라 원래대로 바로 잡아야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왕선은 서찰을 하나 내던졌다.
“이건 주상께서 내리신 격문이 아닙니까?”
“격문이 아니라 어명이지.”
발에 치일 정도로 뿌려진 격문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명을 꺼내 들었다.
어명. 그것은 전주의 향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위력적인 단어였다.
“그, 그렇습니다.”
“나는 그 어명을 수행하는 사람이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전주에서 의병을 일으키라는 어명.”
“하, 하면···.”
“1천석 내놓게. 군자금으로 쓸 거니까. 마음 같아서는 더 내놓으라고 하고 싶으나 내 넓은 아량으로 이 정도까지만 하는 걸세.”
양홍은 눈치를 살폈다.
왕선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탁!
술상에 잔을 내려치면서 일갈했다.
“나라의 국고로 귀속되어야 할 쌀을 횡령했다. 그 죄를 묻지 않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거늘. 얼마든지 네 재산을 모조리 몰수할 수도 있어! 한데, 지금 그따위로 행동해? 허. 네가 개경 구경을 하고 싶은가 보구나. 좋아. 소원이라면 들어주지.”
찬바람 풀풀 날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늉을 하자 양홍이 기겁한다.
“왕, 왕 선생. 어찌 아까워하겠습니까?”
“흥. 내가 네 처지를 가엽게 여겨서 군량 1천 석을 의병에 지원했다고 고하려고 했거늘.”
“정, 정말입니까?”
군량 1천 석을 내놓았다는 말이 개경이 알려지면 아들의 입신양명에 도움이 된다. 양홍의 눈은 돌아갔다. 이미 이성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왕, 왕 선생.”
“됐다. 갈 것이야.”
“왕, 왕 선생. 당장 1천 석을 내놓겠습니다.”
“늦었어!”
“100석을 더 내겠습니다.”
“······.”
500석이면 500석이고, 1천 석이면 1천 석이지. 100석은 또 뭐란 말인가?
왕선이 미간을 찌푸리자 양홍은 겸연쩍은 표정을 한다.
“사정을 좀 봐주십시오.”
“이미 내 수하가 의병을 모집하고 있어. 당장 출병할 것이야.”
“아랫것들에게 말해서 당장 마련하겠습니다.”
“그 말 꼭 지켜야 할 것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왕선은 왕족으로서 위엄을 보였다.
“어기면 가문을 절단 낼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느긋한 걸음으로 양홍의 집을 벗어난 왕선.
사람들의 눈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동하자 헛웃음이 났다.
“왕선이라는 놈이 제법 당차고 기개가 있었나 보네.”
그랬다. 진짜 왕선의 성격이 아주 많이 남아 있는 거다.
“안 죽었으면 이 시대에 큰 이름을 날렸을 수도 있겠어.”
기분이 묘하다.
자연스레 나지막한 말이 새어 나왔다.
“왕선. 당신 대신 내가 왕선이라는 두 글자를 역사에 남기겠네.”
하늘을 쳐다봤다.
“자네 이름 두 자가 조선이라는 글자를 덮을 것이네.”
그리할 것이다.
“나를 믿게.”
반드시.
< 2화 두 글자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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