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큰일이 아닐 수 없다 >
왕선은 몰락한 왕족 출신이다.
그러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부지런히 학문에 정진했다.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하늘이 내린 재능이란 그런 것이었을까?
약관의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학식을 갖췄다.
고려 최고의 명군이었던 현종에게 이 정도의 재능이 있었을까?
감히 비교할 수 없겠으나 그만큼 왕선은 뛰어났다.
저 자신도 그걸 알기에 최선을 다했고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왕씨로서, 왕족으로서 이 나라 고려를 위해서 제대로 살아볼 그때를.
그리고 드디어 그때가 왔다.
바야흐로 작금의 천하는 난세.
왕선은 세상을 향해서 웅비하고자 했다.
그러나 하늘이 그의 뛰어남을 시기했을까?
...지가 내린 재능인데? 실수였을까?
미처 세상에 이름을 날리기도 전에 죽었다.
...죽었다? 죽었나?
“죽었지.”
왕선은 입맛을 다셨다.
“몸은 그대로고 기억도 그대로지만 자아가 다르잖아. 그러니까 왕선은 죽었지. 뭐. 왕선의 성격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사지 멀쩡하게 입을 놀리고 있는 왕선?
“나는 왕선일까? 아니잖아? 그래도 왕선인가?”
왕선이지만, 왕선이 아니다.
그의 눈이 사방에서 휘날리는 격문으로 향했다.
[북에서는 홍건적, 남에서는 왜구가 침탈하여 백성의 삶이 어렵다. 그러나 조정이 일치단결하여 홍건적만은 잘 막아내고 있다. 이제 머지않아 관군이 전열을 재정비하여 남쪽의 왜구도 일거에 쓸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 기다리는 세월 속에서 백성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도다. 이에 과인이 준엄한 왕명을 내리노니 각지의 뜻있는 인사들은 의기로서 들떠 일어서라. 그리하여, 관군이 당도하기 전까지 백성을 보호하여 이 나라 고려의 강역을 사수하라.]
난세로 고통받는 백성을 위하는 고려의 31대 군왕이 내린 격문이다.
왕선은 물끄러미 격문을 쳐다봤다.
“공민왕이라.”
참. 고약하다. 조만간 죽을 양반이 이런 격문은 뭐하러 날렸을까?
아. 본인은 죽는 거 모르는구나.
왕선은 심사가 어지럽다.
...공민왕이 죽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그다음에는?
왕씨의 대량학살.
그랬다. 왕선은 이 나라의 끝을 알고 있다. 그뿐인가? 왕씨의 비참한 끝도 알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왕선도 왕족이라는 거다.
복잡하게 생각할 건 없다. 이대로 있으면 시원하게 죽는 거다.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생존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그때
“난세로다.”
왕선의 귀에 들리는 한탄.
자연스레 시선이 옮겨졌다.
황소만 한 남자가 보였다. 왕선의 눈이 그의 위아래를 살폈다.
...힘 좀 쓰겠는걸?
“이보시오.”
“나 불렀소?”
“그러면 여기 당신 말고 누가 있소?”
“그건 그렇구려.”
왕선은 그의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난세로다.
...이런.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구나.
그랬다. 왕선은 상대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었다.
원하는 대로. 언제든지.
미륵의 권능을 가지고 있는 거다. 물론 도솔천에 있을 미륵의 그것에 비교하면 발톱 만큼에 불과하겠지만.
왕선은 일단 대화를 이어가기로 했다.
“주상께서 격문을 내리셨는데.”
“한탄하지 않을 수 없소. 관군이 왜구를 감당하지 못하다니.”
분개하는 남자.
왕선은 묘하게 웃었다.
“시간 괜찮소?”
“왜 그러시오?”
“귀하의 의견이 궁금해서.”
“내 의견?”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인다.
왕선은 본격적으로 말문을 열었다.
“내 친척이 있는데 부자요.”
“자랑하오?”
“그런데 종놈이 재물을 탐하오.”
“내치면 되오.”
“싸움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오. 심지어 근처 도적과도 친하오.”
“그러면 종놈이 아니라 도적이겠구려.”
“친척에게 말해봤자 안 믿더라고.”
“증좌도 없소?”
“없소.”
“답답하구려.”
“종놈은 재물만 갈취하는 게 아니오. 고래등만 한 기와집에 똬리도 틀 거요.”
“골치 아프겠구려.”
“더 답답한 건 이 종놈이 기와집을 차지하면 주인 일가를 모두 죽일 거요.”
“천하의 쌍놈이군.”
“친척까지 찾아서 모두 죽인다던데?”
“완전 쌍놈이군.”
“그래서 묻소. 어쩌면 좋겠소?”
“지금은 도저히 상대가 안 되오?”
“상대가 되면 물어보겠소?”
“그러면 힘을 키워야지.”
“힘이라.”
“어차피 친척의 재물이오. 그건 그 집 사정이오. 하지만 내 목숨은 다르지 않소? 최소한 내 목숨을 지킬 정도의 힘은 가져야지. 난 그렇게 생각하오.”
“그렇지요? 보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길가는 사람 아무나 잡고 물어보시오. 다 그렇게 말할 거요.”
“하나만 더 물어보겠소. 도망치는 건 어떻소?”
“평생 숨어 살아야 할 건데?”
“그래도 종놈이 너무 강하오.”
“숨어 살다가 잡히면 살려준다오?”
왕선은 곰곰이 생각해봤다.
만일 잡혔다고 가정해본다.
몰락한 왕족이라고 사정하면 이성계가 살려줄까?
...그럴 리가.
설령 살려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불확실하다. 목숨 걸고 도박할 수 없다.
“어차피 죽을 거요. 그러면 싸울 준비를 해야지. 그리고 미리 그런 정보를 알게 된 건 천운이오. 안 그렇소?”
“우문현답이군.”
그래. 우문현답이다.
이 사람의 말대로 싸울 준비를 하는 게 맞다.
평생 숨어지낼 수도 없으니까.
“그러면 가보겠소.”
“어디 갈 거요?”
“난세. 나는 의병을 일으킬 거요.”
왕선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한 손보다는 두 손이 났다.
덩치가 산만 하니까 싸움도 잘하겠지?
빙그레 웃었다.
“같이 합시다.”
“같이?”
“물론 내가 대장이오.”
“허.”
“싫소?”
“싫소. 내가 왜 당신 밑에 있어야 하오?”
“나 왕족이오.”
“······.”
“신종 대왕의 차자 덕양후의 6대손. 뭐. 몰락한 왕족이라서 볼품없지만 족보 타고 올라가면 버젓이 태조께서 계신다오.”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허. 아무리 시절이 수상하더라도 왕족을 사칭할까.”
“음.”
-왜 이리 당당해? 정말일까?
왕선은 더 진하게 웃었다.
“족보 보여주리다.”
어깨를 쫙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
그러다가 슬쩍 뒤돌아본다.
“따라오시구려. 진위파악하는 데 얼마 걸리지 않으니까.”
“사기 치면 가만 안 둘 거요.”
“얼마든지. 아. 내 이름은 왕선. 당신은?”
“마천목이오.”
“갑시다. 족보 확인하러.”
< 1화 큰일이 아닐 수 없다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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