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편_ 지옥 불 던전(2)
“뭐, 뭐야?”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연우 와 이자젤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엔 붉은 머리를 한 여인이 한 명 있었는데, 처음 리젤을 봤 을 때처럼 ‘노출과 방어력의 반비 례 법칙’이 그대로 적용된다면 방 어력으론 최강일 것 같은 옷차림 을 하고 있었다.
이자젤이 순수해 보일 정도로, 강력한 몸매와 퇴폐미 가득한 얼 굴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아, 손님인가? 여기 앉으세요. 막걸리 한 잔 드시죠.”
식당에서 일하다 보면 가끔 혼 자 오는 손님이 있다. 그럴 때 직 원이 당황하면 손님이 민망해한 다.
연우는 자연스럽게 손님을 맞았 다.
“네? 아, 그, 그게 아닌……
당황한 손님은 연우의 손에 이 끌려 옆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연우가 막걸리에 사이다를 한 잔 따라 주자 그녀가 거절했다.
“아, 아니에요. 이걸 만지면 이 게 타 버릴 텐데.”
“괜찮아요. 생각보다 튼튼해서.”
얼떨결에 사발을 받은 그녀가 깜짝 놀랐다.
“정말이네요?”
“네, 저렴해 보여도 화염 저항 이 강한 레드 드래곤의 뼈를 깎아 만들었거든요. 제 신력이 들어간 건 비밀이고요.”
“으엑. 뭐야. 갑자기 사람이 왜 이렇게 변하셨데.”
이자젤이 연우의 친절한 말투에 소름이 돋는지 양팔을 쓸었다.
“뭐래. 손님이니까 그렇지. 자, 한 잔 하시죠.”
“네? 아, 네. 감사합니다.”
키도 175cm 정도는 돼 보이고 성향도 센 언니처럼 보이는데 말 하는 건 순둥이였다.
“ 짠.”
연우의 건배에 이자젤과 손님 셋이 사발을 부딪치곤 그대로 마 셔 버렸다.
“크으. 시원하다.”
“역시 좋아. 이건 안 뜨거워져 서 좋다니까.”
“으읍! 이, 이게 무슨……
손님은 막걸리를 마시더니 급격 히 놀란 표정이었다.
“왜요. 맛이 별로예요?”
“아, 아니요! 너무! 너무 맛있어 서요! 세상에 이런 게 존재했다 니! 목에서 타지도 않아요! 제 몸 이 너무 뜨거워서 식도를 넘어가 는 건 지옥의 화정밖에 없었는데. 이게 바로 신세계인가요?”
“맛집과 술은 언제나 신세계죠. 이 막걸리는 천공 탑의 호수에서 뜬 물이라 절대로 열기에 증발하 지 않아요. 이렇게 뜨거운 곳에선 최고죠.”
“아, 그렇군요! 그 천공 탑이라 는 곳. 꼭 가 보고 싶네요.”
“자, 그럼 한 잔 더 할까요?”
연우는 방긋 웃으며 막걸리를 따라 줬고 이자젤도 미나리전을 하나 찢어 손님에게 먹여 줬다.
“으으읍! 이런 맛이라니. 이건 또 뭐죠? 왜 이렇게 짭조름하고 고소한 거죠? 대단해요!”
역시 이렇게 맛을 아는 손님은 언제나 환영이다.
…… 근데 여기 지옥 불 던전 아니었던가?
정말 잊고 있었다.
“…… 근데, 누구시죠?”
“야, 그걸 이제 묻냐!”
“까먹을 수도 있지! 식당에서 누가 손님한테 ‘누구세요?’ 그러 냐?”
“에라. 그럼 그걸 또 왜 물어!”
“어? 그런가.”
연우와 이자젤은 서로 말도 안 되는 걸로 싸웠고 손님은 눈치만 살살 보고 있었다.
“죄,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니에요. 얘가 예민해서 그래 요. 여자 친구가 없는지 오래돼서 그런가.”
“뭐!? 그렇게 오래 안 됐거든!”
“벌써 몇 년이나 됐잖아. 한 3 년 됐나? 내가 다 들었거든!”
“에라! 막걸리나 먹자!”
연우는 시원한 막걸리를 벌컥벌 컥 마셨다.
“크으. 시원하다. 역시 더운 곳 에서 시원한 막걸리지.”
“원래 맥주 아니었나.”
“아니, 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디 스냐?”
“ 흥.”
“푸훕
연우와 이자젤의 싸움에 손님이 웃었다.
“아, 죄송해요. 웃을 생각은 없 었는데. 너무 귀여우셔서......
“쟤가 귀여워요? 저 못생긴 인 간이?”
“뭐? 내가 어때서? 좀 귀여울 수도 있지!”
뭐? 푸하하하하! 자기가 귀엽 대! 여기 미친놈 있어요! 누가 좀 잡아 가요!”
이자젤의 외침에 손님은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졌고 연우도 어이 가 없어 웃어 버렸다.
“ 짠.”
다시 막걸리가 담긴 사발이 오 가기 시작했다. 연우나 이자젤은 마치 오래된 친구를 대하는 것처 럼 편하게 대했다. 손님도 그게 어색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연우는 슬쩍 손님을 바라봤다.
처음엔 정말 몰랐다. 전혀 신경 도 쓰지 않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옆에서 직접 보니까 가진 무력이 느껴졌고, 강력한 신력까지 생생 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이 정도 신력이면 오크가 있는 곳의 신력보다도 강해 보였다.
“야, 뭘 그렇게 보냐!”
“어? 나?”
“어! 몸매가 그렇게 예쁘냐! 손 님을 그렇게 쳐다보는 건 성희롱 이야!”
“아니거든! 너, 설마 질투하냐?”
“뭐, 뭐. 뭐? 아, 아니거든! 난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적 없는 엘 프란 말이야!”
“걱정 마. 너도 안 꿇리니까.”
“…… 홍.”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이자젤 은 애꿎은 미나리전만 헤집었고 연우는 막걸리를 벌컥 마셨다.
“서로 보기 좋으시네요.”
“네? 저랑 얘랑요?”
“에이. 말이라도 그건 심하셨 다.”
이자젤과 연우의 반응이 크자 손님이 푸훕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야. 제가 뭐라 그랬나요? 친구로서! 보?기 좋다는 거죠.”
“당연하죠! 친구. 그렇지, 친 구?”
다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연우는 이자젤이 뭔가 어색했 다. 이자젤의 반응 때문일 수도 있고 옆에 있는 이 손님. 그러니 까 세븐 클래스 마스터급 존재 때 문일 수도 있다.
“에잇! 술이나 먹자! 오늘은 왕 창 먹고 쉬어야겠어!”
“이렇게 더운 곳에서?”
“내가 이 팔찌로 식혀 줄게! 됐 지?”
“좋아요!”
옆에 손님까지 취기가 올라오는 건지 금방 신나서 떠들었고, 막걸 리는 수십 병이 넘게 쌓이기 시작 했다.
“훌쩍. 크으읍. 구래서…… 재가 그래짜나요! 확! 다 어퍼 버린다 구우우! 그런데…… 크으읍. 아, 재성해여. 자꾸 코가.”
손님이 취해도 잔뜩 취했다. 혀 가 꼬여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 르겠다. 그런데 이자젤이 웬일로 취했는지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 손님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있었
다.
“음. 그랬어요? 히히. 괜찮아요. 여기도 나름 살 만하지 않아요?”
“그러쪄. 제가 그래두 여기서느 은 대빵이니까! 흐흐흐. 제가아! 따악! 알아바쪄. 나보다아 무지하 게 강하고오! 착한 것 같더라구 우. 크읍. 힝. 치한다.”
뭐, 취해서 얘기하다 나온 말이 지만, 이 손님은 이 지옥 불 던전 의 최종 보스인 지옥 신 ‘아테르’ 였고 연우나 이자젤은 별로 놀라 지 않았다.
연우는 예상한 일이었고 이자젤 은 원래 담이 컸다.
게다가 아르테가 연우의 존재감 을 느끼고 이곳으로 온 건데, 연 우는 아르테에게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고 아르테도 이기지 못할 상 대라는 걸 알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 거라고 했다.
원래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 는 자신을 죽여서라도 이곳을 벗 어나게 해 달라고 요청하러 온 것 이었다고 한다.
‘힘든 삶이구나.’
“자자, 취했는데 슬슬 잘까?”
“시러여!”
“자야죠. 착한 아이는 일찍 자 는 겁니다.”
“시러어! 시러어. 이제 혼자는 실탄 말이야아......
툭.
세븐 클래스 마스터나 되는 지 옥 신 아테르가 이렇게 술이 약하 다니. 보통 인간은 버틸 수 없을 정도의 막걸리를 먹긴 했지만, 그 래도 세븐 클래스 마스터이지 않 은가.
“에휴. 진상이네 진상.”
“흥! 예쁘지? 예쁘니까 그렇게 아주! 계속! 쳐다보더라!”
“당연히 예쁘지. 너나 얘나.”
“쳇!”
“빨리 데려가서 자. 대충 오두 막 하나 만들어 줄 테니까.”
이곳에서 타지 않을 정도의 오 두막을 만들려면 만년한철을 통짜 로 써야 할 거다. 연우는 아까웠 지만, 하나 만들어 두면 언제든
쓸 수 있기에 아끼지 않고 듬뿍
넣어 만들었다.
“이 정도면 그렇게 덥진 않을
거야.”
“나랑 이 아테르랑 같이 자라
고? 그러다 나 타 죽어!”
“…… 아, 하긴. 그럼 너랑 나랑 안에서 자고. 아테르를?????? 뭐, 뭐 야. 눈이 왜 그래?”
“ 변태.”
“…… 그럼 나랑 아테르랑 밖에 서……
“안 돼!”
“취했냐. 오두막 하나 더 만들 거니까. 그렇게 알고 빨리 들어가 서 자.”
역시나 취한 건지 이자젤은 슬 금슬금 오두막에 들어갔다. 연우 는 아르테를 위한 침구를 만들려 고 했는데 만년한철 정도로는 안 될 것 같아서 아공간을 열었다.
“끄아아아아! 주인님 제발!”
“아, 미안! 거기 빙하의 만년지 주의 거미줄 있지?”
“여기요!”
헤맨이 빠르게 거미줄을 던지고 아공간을 닫아 버렸다. 안에서 타 고 있는 헤맨의 동굴이 보이자 미 안해졌다.
“아, 나도 취했나.”
연우는 정신을 차리고 거미줄로 제작을 시작했다. 딱히 침구 제작 스킬이 있는 건 아니지만, 건설 스킬을 응용하면 작은 침대 정도 는 만들 수 있다.
순식간에 만든 빙하의 만년지주 의 거미줄로 만든 침구에 아테르 를 옮겨 놓고 연우도 오두막 하나 를 만들어 대충 잤다.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재미있 는 던전에서의 하루였다.
해가 없는 던전 안이라 아침인 지 밤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의 시계는 정확하다고 했던가. 몸이 개운해질 정도가 되자 알아 서 일어나졌다.
“끄으으. 신력을 흡수해서 그런 가. 더 상쾌하네.”
주변을 보니 난장판이었다. 연 우는 가볍게 마법을 사용해 하나 씩 정리했다. 그러다 보니 이자젤 이 일어났고 가장 늦게 아르테가 일어났다.
“잘 잤어요?”
“히 익! 이, 이게……
놀라는 아르테를 보며 이자젤이 웃었다.
“필름 끊겼네. 어째 술도 처음 인데 많이 마신다 했다.”
“제, 제가 그랬나요?”
“네, 시러여! 시러여어! 막 그랬 는데.”
“아악! 그럴 수가!”
“그래도 여기 대빵이라며, 언제 든지 놀러 오는 게 아니라 여기서 살아도 된다고 막 그랬었는데!”
“아, 아니에요! 제가 설마!”
“히히. 그건 뻥이고요.”
“…… 그, 그렇죠?”
처음엔 이자젤이 아르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 지만 이자젤은 사교성이 생각보다 좋았다. 좀 막 나가는 면도 있지 만, 좋게 말하면 털털하고, 성격 이 좋다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닌 가.
“자, 아침 먹읍시다.”
연우는 가볍게 흰 쌀밥에 대패 삼겹살을 굽고 잘 익은 김치를 꺼 냈다. 어렸을 때 이렇게 많이 먹 었었는데, 든든하고 부담도 없어 서 아침으론 제격이다.
“오오! 역시 맛있습니다! 이런 게 음식이었군요. 그, 근데 어떻 게 제가 이걸 먹을 수 있는 거 죠?”
“제 신력을 사용해 요리한 거라 서요. 위장까지 들어가면 풀려서 타 버리겠지만.”
“아아. 이런 신세계가 있다 니……
아르테는 지금까지 화정이라는 불의 정수를 제외하고는 무엇을 먹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화 속 성 몬스터가 있지만, 그건 맛도 없었고 말이다.
“이런 게 삶의 의미죠.”
“그렇지! 먹고 싸우는 것! 그게 의미지!”
연우는 아르테에게 물었다.
“이젠 뭘 할 생각이에요?”
“네?”
“저희랑 같이 가요. 혼자는 싫 다면서 요.”
아르테는 뒤를 돌아봤다. 무언 가 바로 갈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요.”
“말해 봐요. 도와줄게요.”
연우는 처음 아르테가 이곳의 주인이자 지옥 신인 걸 알았을 때 부터 계속 생각했다.
‘어떤 존재일까.’
하루 술을 먹고 진탕 취하는 모 습까지 심안으로 들여다봤다. 순 수한 강함. 맑은 불. 지옥이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였다.
왜 지옥 신인지 이해가 되지 않 을 정도로.
그래서 농장으로 데려가고 싶었 다.
자아가 없이 아르테의 육체만 있을 때보다 온전한 아르테가 비 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건 당 연한 일이다. 본래의 자아가 아니 라면 가진 힘을 50%도 내지 못 한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한없이 착한 심성은 주변까지 맑 게 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아르테와 싸워 보고 싶 은 호승심은 있다. 하지만 죽이고 싶진 않았다.
그게 연우의 마음이었다.
“전 이곳에 묶인 존재예요. 말 은 대빵. 아니, 그러니까 보스라 고 했지만, 결국 던전의 종속일 수밖에 없어요. 제가 이곳을 나가 는 방법은 죽는 것뿐입니다.”
“음, 연우. 꼭 그거 같지 않아?”
“뭐?”
“히든 퀘스트에 이은 연계 퀘스 트 같은 거.”
“흐흐. 맞는 말이네.”
“이런 거 하면 우리 전문이지!”
“그렇지!”
갑작스럽게 사이가 좋아 보이는 연우와 이자젤의 분위기에 어리둥 절해 하던 아르테는 웃음이 터졌 다.
“푸훕. 역시 보기 좋네요. 저도 그렇게 지내보고 싶어요.”
“뭐가 문젭니까.”
아르테는 굳게 결심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적이라는 건 단순히 몬스터와 같은 생명체뿐만이 아니다. 이런 던전, 함정, 에너지의 집합체, 마 법진 등등. 수없이 많고 다양한 적을 아스가르드에서 충분히 겪었 다.
“세븐 클래스 마스터를 제대로 붙잡고 있는 던전 자체라…… 이 거 난이도가 더 올라갔는데?”
연우와 이자젤의 얼굴엔 웃음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