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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편_ 필리아의 이야기 (153/207)

제168편_ 필리아의 이야기

연우는 안개라는 건 하나도 없는 새하얀 세상을 보며 집에서 나왔다. 헐렁한 잠옷을 입고 나가자 한기가 살가죽을 에는 느낌이었다.

폐부 속에 차가운 공기가 가득 찼다.

이런 상쾌함은 아침에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뽀드득. 뽀드득.

연우는 옷을 대충 챙겨 입고 눈 을 지그시 밟으며 카페로 올라갔다.

땅. 땅. 땅.

‘꼬아아아! 요섭 님! 성공했습니 다!’

‘정말이야! 역시 대단해! 다음 단 계에 도전한다! 생명을 0으로 만들 기이이이!’

역시 대장간에서 망치 소리가 끊 이질 않았다.

‘저러다 진짜 죽는 거 아닌가 몰 라.’

연우는 섬뜩함에 고개를 얼른 돌 려 카페로 이동했다. 요정들의 집 으로 한번 가 볼까 하다 말았다. 엘프들은 요정과 친하지만, 연우는 아직 아니었다.

카페에 도착한 연우는 후름을 불 렀다.

“어, 왔어?”

“오늘은 따듯한 핫초코.”

“웬일이야.”

후름을 그렇게 말하면서도 바로 들어가 제조를 시작했다.

이 뷰(View)는 정말 잘 만들었 다. 한눈에 들어오는 울타리, 대장 간, 펜션, 집, 수영장, 강줄기 등등. 멀리 주차장과 저 뒤엔 하늘에 그 려진 산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사실 게임이었고 다른 사람 눈치 를 볼 필요가 없었다면 농장을 훨 씬 크게 늘리고 이런 조망권을 저 하늘 위에서 얻었을 거다.

“뭐, 이런 것도 소박하네.”

그래도 농장에 뭐 하나 늘리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었다.

“블랙 카우, 블랙 쿡. 하나는 휴 식.”

땅도 쉬어 줘야 한다. 그런 땅에 놓을 만한 건 없을까? 일단, 연우 가 생각했을 때, 자이언트 웜 같은 게 있긴 한데 그건 너무 크다.

“나중에 레인 오면 물어봐야겠 다.”

그러는 사이 후름이 핫초코를 들 고 왔다.

달달한 향이 코끝을 찌른다. 혀 에 닿지도 않았는데 침이 훅 나오 고 혀끝이 찌릿찌릿하다.

살짝 마시자 진한 초코가 입안을 적시고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너 무 달지만, 그게 좋은 게 바로 핫 초코다. 연우는 다시 한 번 꿀꺽하 곤 컵을 두 손으로 움켜쥔다.

따듯하다.

그때 언제 온 건지 삼미호가 연 우의 허벅지 위로 뛰어 올라왔다.

“연우 님! 연우 님!”

혼자 그렇게 말하면서 빙글빙글 돌더니 좋은 자리를 잡은 건지 머 리를 연우 옷으로 넣으며 웅크려 누웠다.

“아, 삼미호야. 새 친구 왔는데 볼래?”

“새 친구요?”

“그래, 댕댕이랑 검둥이랑 같이 다니면 될 거야.”

연우는 므깃도에 뒀던 케로베로 스를 꺼냈다.

화륵.

주변에 열이 뻗치며 눈이 녹았 다. 그런데도 카페 구조물과 연우 의 옷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크아아아……?”

케로베로스는 온몸이 상처투성이 였다. 물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이 곳에서 탈출하려고 막 돌아다니다 가 얻어맞은 걸 거다.

“가만히 있으라니까.”

낑. 끼잉.

케로베로스는 연우를 보자마자 꼬리를 말았다. 삼미호는 그런 케 로베로스가 신기한 건지 날아서 코 에 코를 들이밀어 냄새를 맡았다.

크르르르.

케로베로스가 위협을 해 봤지만, 댕댕이와 검둥이에 익숙해진 삼미 호다.

꺄르르.

삼미호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케로베로스를 놀렸다.

“미호야. 댕댕이랑 검둥이는?”

“뒤에 양목장에 있을 거예요! 오 늘 양 울타리 옮기는 날이거든요!”

“그래? 그럼 거기로 케로베로스 데려가서 댕댕이랑 검둥이랑 인사 시켜. 아마 좋아라 할 거다.”

연우는 두 마왕을 본 케로베로스 의 얼굴을 상상하자 웃음이 났다.

필리아는 요즘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했다.

골드 드래곤인 필리아가 요리를 시작한 이유는 좋은 재료, 새로운 재료로 누군가 기뻐하고 감동할 만 한 음식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꿈이 매일같이 이뤄지는 중이었다.

“아이델, 역시 잘 구해 왔어.”

필리아는 한 손에 큼지막한 장어 를 잡아 온 아이델을 칭찬했다. 옆 에서 촉수가 줄줄이 달린 이상한 파충류를 잡아 온 천인종이 잔뜩 기대하는 눈치로 서 있었다.

“…… 역시, 천인종이구나.”

“으하하. 역시 천인종이다!”

“근데 이건 뭐니?”

“심해로 내려가니까 이게 잔뜩 모여서 고래를 파먹고 있길래 하나 냅다 잡아 왔다!”

“그, 그래. 잘했다. 역시……

다른 뜻을 가진 역시였지만, 천 인종은 그것도 좋은 모양이었다. 순수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아마 둘 다겠지만 말이다.

“조금 쉬고 있어 요리 좀 해 올 게.”

필리아는 주방에 들어가면서 파 충류를 아공간에 냅다 던져 버렸고 팔팔한 장어에게 마법을 써 기절시 켰다.

장어는 내장, 뼈, 머리를 제거하 고 굽는 게 가장 맛있다. 크기도 충분하니 10등분을 해 잘라 보관하 면서도 넘치는 양이 나왔다.

“오염된 변종 용마족이군.”

“넌 누구냐.”

로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손님인가 했다. 하지만 이곳이 곧 농장이란 걸 깨달았고 한동안 손님 이 없다는 것도 생각이 났다.

“누구지.”

필리아가 고개를 내밀어 확인했 다.

“필리아.”

“…… 어? 아, 아버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지 구에 있는 거고. 어떻게 필리아가 이곳에 있는 걸 알았을까. 또 왜 여기까지 온 걸까.

“필리아. 아버지 맞는 거지?”

필리아는 그런 말을 하는 아이델 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아이 델은 항상 미소를 띤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등줄기 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무서운 얼 굴이었다.

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싫어도 아버지는 아버지니까.

“난 나가 있겠다.”

아이델이 몸을 돌려 나갔다. 괜 히 이곳에서 사고를 칠 것 같아 분 노를 참는 모습이었다. 천인종은 그 모습을 보곤 따라 나갔다.

“나와라. 가자.”

“…… 갑자기 찾아와서 그게 할 말이에요?”

“전쟁이 터졌어. 모든 드래곤의 힘이 필요하다.”

필리아는 더 말하지 않고 주방으 로 들어가 버렸다. 더는 이야기하 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따라오지 않으면 이 농장을 파 괴하겠다.”

필리아는 밖에서 들리는 아버지 의 목소리에 피식 웃음이 났다. 하 지만 아버지는 전혀 모르는 모양이 었다.

“저 용마족? 강하긴 하다만, 지 구엔 다섯의 드래곤이 더 있다. 협 박해서 미안하다만……

“해 봐요.”

필리아는 이 상황이 너무 재미있 었다.

이 농장을? 연우 님을 제외하고 도 무지막지한 세 엘프와 헤맨, 요 섭과 바벨. 헤르메스, 천인종, 아이 델, 두 마왕까지 있다.

그걸 드래곤 여섯이?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드래곤은 지상 최강의 생명체였 다. 최소한 그라니아에선 그랬다. 마왕이 침공하면 맞설 생명체는 드 래곤이 전부였기도 했었다.

인간 중에서 가끔 말도 안 되는 강자가 나오긴 했지만, 드래곤 둘 이나 셋이 모이면 상대가 되질 않 았다.

하지만 이 농장은 그 정도 수준 이 아니다.

“정말이냐?”

“협박이든 아니든 상관없으니까 해 봐요.”

필리아는 진심이었다.

드래곤이라는 종족 자체가 자식 에게 다정한 종족은 아니다. 그래 도 이건 아니다. 협박하고 전쟁터 로 데려간다? 필리아의 아버지는 다른 드래곤보다 심했다.

“요리한다고 했지.”

“ 네.”

“한번 먹어 보자.”

필리아는 멈칫했다. 매일같이 돌 아오라고. 요리는 그만하고 마법과 검술을 익히지 않으면 협박했다.

결단코 요리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기다려요.”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엇나간 건 지.

필리아는 3백 년 동안 억지로 마 법과 검을 배웠다. 그렇기에 해츨 링임에도 투 클래스 마스터를 이룰 수 있었고 요리로 전향하면서 쓰리 클래스 마스터를 목전에 둘 수 있 었던 거다.

하지만 필리아는 그게 싫었다.

드래곤 레어를 뛰쳐나갔고 대륙 에서 요리를 배웠다. 그게 행복하 고 좋았으니까.

이런 협박?

대륙에서 몇 번이나 있었다. 그 렇게 불타 없어진 식당이 10개는 넘어갔고 한 번은 왕국까지 불탔었 으니까. 그래서 지구로 왔을 때, 너 무나 행복하면서도 불안하기도 했 다.

언제 아버지가 찾아와 서울을 날 려 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 으니까.

그런데 이 농장에 와선 그런 걱 정을 전혀, 아예 상상을 못하고 지 냈다.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일이니 까.

‘괜히 진짜 시도했다가 아버지가 다치면……

그러다 보니 평생 하지 않았던 아버지 걱정까지 됐다.

필리아는 고개를 흔들고 손질하 던 장어로, 쇼타에게 배운 일본식 장어 덮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더 잘하는 건 많았지만, 왠지 이 곳에서 배운 요리로 인정받고 싶었 다. 아버지는 싫었지만, 아버지니 까. 도망치기보단 직접 마주하기로 한 거다.

가장 중요한 건, 소스와 굽는 것.

하지만 소스는 쇼타가 20년 넘게 우려서 만들어 온 소스가 있다. 쇼 타에게 관리법을 배우고 꾸준히 장 어를 잡아 끓인 덕분에 필리아의 손맛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다음은 굽기.

굽기의 기본은 숯이다. 숯은 이 번에 연우가 가져다 놓은 지옥 불 에 탄 오동나무 숯이 있었기에 그 걸 사용하기로 했다.

골드 드래곤이지만, 요리를 오래 했고 마법도 경지에 오른 만큼 불 을 읽는 기술도 뛰어났다. 양념이 발라진 장어를 직화로 굽는 것?

정말 수십 년 된 장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필리아는 사 람이 아니다.

화륵! 화르륵.

중간에 소스를 발라 가며 타는 곳 없이 구웠다.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 이게 가 장 좋은 방법이었다.

장어가 다 익자, 고소한 냄새에 양념 특유의 달짝지근하고 매콤한 향이 풍기기 시작했다.

“좋아.”

드래곤 본으로 된 그릇.

“…… 이건 안 되겠다.”

그나마 괜찮은 엔트 족의 껍질로 만든 그릇에 흰밥을 담고 위에 장 어를 올렸다.

그리고 종지에 깻잎 채, 썬 파, 와사비, 김 가루, 육수를 따로 담았 다.

그러더니 한 상이 제대로 차려졌 다.

필리아는 그대로 아버지에게 가 져갔다.

“장어구나.”

“…… 처음엔 흰밥과 장어만. 다 음엔 밥을 따로 덜어서 깻잎 채, 파, 와사비를 넣고 비벼 먹으면 되 고. 마지막으론 김 가루와 육수를 따로 담아 먹어 보세요. 그리고 가 장 맛있는 걸로 먹으면 됩니다.”

필리아는 칼같이 먹는 방법만 설 명하고 뒤로 물렀다.

아버지도 그런 필리아를 보다가 그릇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고개를 내려 향을 맡았다. 나쁘지 않은 건지 좋은 건지 젓가락을 들 었다.

‘어? 언제 젓가락질을 배웠지?’

그러고 보니 필리아는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깨 달았다. 항상 마법! 검술! 전투! 전 쟁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던 아버지 였다.

“음, 좋군.”

아버지는 필리아의 말대로 능숙 한 젓가락질로 장어와 흰밥을 먹었 고, 두 번째로는 깻잎, 파, 와사비 를 곁들어 먹었다. 이번에도 맛이 좋은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육수에 김 가루까지 먹고 난 아버지가 잠시 멈췄다.

“…… 파랑 와사비만 넣는

게…… 난 좋단다.”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하면서 파랑 와사비를 섞어 올리고 한껏 먹었다.

“혹시 사케도 있니?”

“…… 네.”

“너도 앉아라.”

필리아는 한쪽 찻장에 있던 사케 하나를 꺼내 와 아버지 앞에 앉았 다.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이 야기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못했던 말인 듯.

둘의 입은 쉬지 않았다.

“훈훈하네.”

연우는 밖에서 그 광경을 모두 보고 있었다.

카페에 있다가 누군가 접근하는 건 느끼고 달려온 거다. 당연히 ‘겨 우’ 드래곤이었기에 위기감 따위는 없었다.

저 멀리선 두 강아지에게 쫓기는 건지 미친 듯 달리는 케로베로스가 보였고 그 위에 앉아서 꺄르르 웃 는 삼미호도 보였다.

연우는 문득 두 동생과 부모님이 보고 싶어졌다.

‘아니다. 부모님은 반기지 않을 거고. 동생은…… 내가 시끄러워 서……

필리아와 아버지의 이야기가 곧 끝났다. 필리아는 한쪽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 듯했고 아버지는 멀리 사라졌다. 어디론가 간 듯했 다.

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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