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편_ 헤르메스의 이야기(2)
화악.
검은 마기가 아이린을 감쌌다. 한없이 순수한 마기다. 악의보다 깊고 강하지만, 신성력보다 깨끗한 마기.
연우나 헤맨이 이런 걸 먹을 리 도 없었다. 하지만 금방 사라져 버 릴 마왕의 심장을 딱히 쓸 곳도 없 었기에 심장을 한데 모아 엘릭서로 만들어 버렸다.
“다행이네요. 이게 있어서. 아, 물론, 전과 같은 뱀파이어는 아닐 겁니다. 그래도 마왕의 힘을 흡수 한 거니……
아마 헤르메스의 말대로 일반 엘 릭서였다면 아스가르드에서 가져온 최상급 엘릭서로도 치료가 안 됐을 거다. 뱀파이어는 영생을 사는 대 신 육체와 영혼을 남기지 않는 저 주를 받았으니까.
“이, 이게.”
헤르메스의 황금빛 눈동자가 흔 들렸다.
분명 사라졌던 아이린의 팔다리 가 생겨나고 멈춰 버린 혈류가 흐 르기 시작했다. 생기를 잃을 머리 칼, 피부, 입술까지. 하나씩 되돌아 오고 있었다.
스으으으.
아이린의 몸이 떠올랐다. 강한 마기의 소용돌이에 자연스러운 물 리적 반응이었다.
번쩍.
아이린의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헤르메스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무슨 감정인지 모르 겠다. 하지만 좋았다.
“헤르메스 님.”
“아이린.”
아이린은 변했다. 뱀파이어지만, 뱀파이어가 아닌 느낌. 진혈의 바 로 아래인 오리진이었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닌 느낌이다.
그럴 만도 했다.
수십 명의 마왕이 가진 심장이 다.
그걸 받아들인 아이린은 결코 평 범한 뱀파이어가 될 수 없었다. 게 다가 뱀파이어 생명의 원천인 피까 지 말라 버렸다가 새로 생성돼 버 렸으니까.
하지만 헤르메스는 그게 더 좋았 다.
“헤르메스 님.”
아이린은 가녀리고 하얀 몸을 이 끌고 헤르메스에게 다가갔다. 항상 하던 행동이지만, 항상 거부당했던 행동. 아이린은 헤르메스에게 다가 가 허리를 안았다.
헤르메스는 가만히 있었고 아이 린은 감격에 찬 눈으로 헤르메스의 가슴에 머릴 기댔다.
“고맙다. 살아 줘서.”
“감사합니다. 사랑…… 합니다.”
서로 뭐가 그렇게 고마운지 서로 놓아 주질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헤맨은 한쪽에 준비한 장비를 두고 사라졌다.
연우는 한가롭게 차를 마시고 있 었다. 이번엔 후름을 믿지 못해 직 접 만들었다.
“흐음. 역시 겨울엔 따듯한 차가 좋아.”
옆에 앉은 이자젤은 위스키를 마 셨다.
“흐음. 역시 겨울엔 로얄 살루트 지.”
저렇게 예쁘장하게 생긴 엘프가 알코올 중독자라는 걸 누가 알까? 게다가 18도짜리 소주도 아닌 최소 40도는 되는 위스키만 먹는다.
언 더 락처럼 얼음으로 먹는 것 도 이제는 질린 건지, 아니면 겨울 이라 그런 건지 위스키만 마시고 있다. 그런 걸 ‘샷’이라고 하는데 언 더 락 잔에 생으로 마시니 저걸 뭐라 그럴까.
“심심하다.”
“위스키 먹고 있잖아. 위스키에 집중하라고.”
“놀러 가자!”
“또 어딜.”
“또라니, 우리 어디 갔었나?”
“드래고니아 대륙에 갔었잖아.”
“에이, 그거야 일하러 간 거고.”
“그럼?”
“음…… 어디가 좋을까.”
겨울의 농장은 여유롭고 평화로 웠지만, 심심하긴 했다. 하는 일이 라곤 맛있는 걸 먹고 술을 먹는 것 뿐이다. 리젤과 헤르메스가 없지만, 눈이 쌓이거나 일이 생기면 마법으 로 간단히 해결된다.
“갈 만한 곳이 있나.”
마침 그때였다.
헤맨이 와서 헤르메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줬다.
“오, 잘됐네. 그럼 언더 월드 쪽 은 신경 안 써도 되나?”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흐음.”
고민이기도 하다. 헤맨이 보기엔 농장에서 지내고 싶어 하는 것 같 은데 아이린이라는 뱀파이어 여자 와 사랑에 빠진다면 얼마든지 달라 질 수 있는 거니까.
“참, 헤르메스한테 장난친 거였 는데 진짜 이렇게 될 줄이야.”
“그러게. 뱀파이어는 그런 거 없 겠지?”
“어떤 거?”
“한 번 사랑하면 평생 가야 한다 는 뭐, 그런 거.”
“모르겠네. 케루빔 같은 놈들은 처만 100명이었는데.”
“와, 생각해 보니까 연우 네가 걔를 그래서 싫어했구나?”
“꼭 그런 건 아니고.”
이자젤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 었다.
“그라니아 대륙은 어때.”
“거길? 왜?”
“협회장이란 사람하고 같이 있던 사람들 다 거기로 간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
“헤르메스도 거기가 고향이기도 하고.”
“그렇지.”
헤맨이 전해 준 말이 생각났다.
‘헤르메스가 마계에 있는 마왕들 에게 이를 갈고 있더라고요. 생각 보다 당한 게 많은 것 같던데……
헤맨도 자세히는 듣지 못했는데, 그런 일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래, 헤르메스를 데려가자. 우 리 식구가 그런 상황이면 우리가 도와야지.”
어쩌다 보니 목적지가 정해졌다.
그라니아 대륙으로 넘어가서 이 진철과 그의 사람들을 만나고, 마 계까지 가서 헤르메스의 어깨에 힘 을 팍 넣어 주기로 했다.
“그보다 오늘 저녁은?”
“맞네. 그게 가장 중요하네.”
연우는 모든 걸 잊고 저녁 생각 을 했다.
“치킨은 아까 먹었고……
“회 어때.”
“내가 썰까?”
“절대 안 돼! 난 회가 그렇게 칼 솜씨에 영향을 받는지 몰랐는데 너 는 안 되겠더라.”
“전에는 잘만 먹어 놓고.”
“그땐 제대로 썬 걸 몰랐을 때니 까!”
하여튼 저녁은 회를 메인으로 먹 기로 했다. 쇼타의 초밥을 추가하 고 필리아의 스프와 후식도 추가한 다. 수이니는 밑반찬을 맡기로 했 다.
확실히 요리할 이들이 많아져서 좋은 것 같았다. 평범했을 땐 먹으 면 살이 찔 걱정도 많았고 먹는 양 도 적었으니 더 괴로웠을 거다. 하 지만 지금은 이보다 좋을 수 없었 다.
“회에는 소주제”
“난 위스키가 좋지만, 그건 인 정.”
회랑 위스키는 상당히 좋지 않은 상성을 가진다.
연우는 오랜만에 흰 살 생선이 먹고 싶었다. 흰 살이라 하면 광어, 도?미, 농어 정도가 적당하다. 물론, 보통 생선이라면 부족할 순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모두 몬스터라 면?
파닥파닥!
아이델과 천인종이 잡아 온 재료 를 살폈다. 주방에 지하 어장과 연 결되는 문을 만들면서 재료를 살피 기 훨씬 쉬워졌다.
7단계에 질 좋은 제철 돌돔이 보 였고 한쪽엔 lg으로 수만 명을 죽 일 수 있다는 9단계 맹독성 해파리 가 보였다. 묻지 않아도 생선은 아 이델일 거고 해파리는 천인종일 거 다.
이 정도면 일부러 이러는 게 아 닌가 싶다.
“해파리라……
해파리냉채가 가장 흔하다. 하지 만 연우가 좋아하는 건 아니다. 오 늘은 미안하지만, 해파리는 치워 두고 7단계 돌돔만 꺼냈다.
크기가 엄청났다.
참치라 불리는 가다랑어 정도였 는데 길이만 2m가 돼 보였다.
파닥파닥!
아직도 살아서 움직인다. 이래서 일반 사람들은 이걸 구하지도 못하 고 요리를 할 수도 없는 거다.
연우는 이번에 새로 구한 마신의 뿔로 만든 식칼 등으로 머리를 쳤 다.
퍽!
그제야 조용해진 돌돔을 비늘을 벗기기 시작했다. 크기가 큰 만큼 비늘도 크고 힘도 들었지만, 연우 에겐 마법이 있었다.
이번엔 머리다.
스윽.
역시 아무런 저항도 없이 파고든 다. 마신이라는 타이틀 덕분인지 뿔의 질도 아주 좋았다.
툭, 떨어진 머리를 어떻게 할까 하다가 구이를 준비했다. 생선은 머리고, 머리 하면 구이가 아닌가.
너무 크기에 살만 발라내어 구이 를 하기로 했다.
“이거 너무 많은데?”
하지만 연우가 누구인가. 마신도 때려잡는 사람이다.
이런 생선 따위는 연우의 손에 10분도 되지 않아 해체가 완료됐고 회는 회대로. 머리 구이는 따로 완 성됐다.
“아이고, 허리야.”
연우가 회를 가지고 나가자 필리 아, 쇼타, 수이니는 준비를 끝마치 고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와! 회다! 회!”
삼미호였다. 요즘 잘 안 보이더 니 약간 탄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불사조 사육장에서 놀다 온 모양이 었다.
“삼미호. 벌써 5단계에 든 거 야?”
“네! 네! 불의 선술도 사용할 수 있게 됐어요!”
삼미호는 세 개의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방방 뛰었다. 어찌나 기분 이 좋은지 자기도 모르게 선술을 이용해 허공에 떠 버렸다.
“어어?”
당황하는 삼미호를 아이델이 들 어 준다.
“회 먹자.”
따다닥.
소주 뚜껑을 따는 소리가 들려 봤더니, 이자젤이었다.
다들 잔을 채웠고 건배했다.
“짠!”
“짠!”
삼미호를 제외하고 다 한 번에 들이켰고 곧바로 회를 집었다. 너 무 커서 지느러미, 배, 등, 가마 부 위로 나누는 게 힘들었지만, 모두 자기가 원하는 부위를 찾아 먹는 걸 보자 뿌듯했다.
이래서 요리를 하는 거다.
“나도 먹어 볼까.”
연우가 가장 좋아하는 건 등.
흰 살은 무난하게 시작해야 한
간장, 와사비와 함께 입으로 들 어간 횐 살은 연우의 이에 무너져 내렸다. 쫄깃하며 야들야들한 게 숙성하지 않은 거지만, 전혀 부족 함 없게 맛이 좋았다.
연우는 입속에서 퍼지는 와사비 의 향이 사라지기 전에 소주를 들 이켰다.
“크으. 이거지.”
[그라니아 대륙 서쪽 산맥, 지구 연합 선발대의 전진기지]
“시작부터 대단하구만.”
이진철은 넓게 펼쳐진 숲을 바라 봤다.
하늘엔 검은 연기가 가득했다. 저 멀리서 퍼져 나가는 강대한 기 운이 간헐적인 파동을 일으키며 비 릿한 혈향과 날카로운 비명을 찔러 댔다.
이진철과 선발대는 마족에게 쫓 기다가 비상 탈출 킷을 사용하는 바람에 이상한 세계로 떨어졌다. 그곳에서 연우를 만나 살아남고 지 구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상태로 위원회에 보고하 고 김상철 박사를 만났다.
당연히 그들은 기겁했고 어떻게 나왔느냐며 캐물었다. 하지만 이진 철은 우연이었고 알 수 없다는 말 로 얼버무렸다. 그리고 김상철 박 사의 차원 게이트를 이용해 다시 그라니아 대륙으로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온 순간 깨달았다.
“전쟁이군요.”
최민아가 까슬까슬하게 돋은 닭 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보통 전쟁이 아니다.
서쪽에선 천족 특유의 신성력이, 남쪽에선 마족의 마기, 동쪽에선 인간이. 그 북쪽엔 몬스터가 있었 다.
“미치겠군. 하필이면 이런 전장 한가운데?”
“이렇게 되면 빼도 박도 못할 것 같은데요?”
게다가 방금 게이트를 열었다. 그것도 원래 예정된 기간이 아니라 크게 무리해 버렸다. 이쪽에서 지 구로 연락하는 방법도 없으니 예정 된 3개월은 무조건 여기서 버텨야 하는 거다.
이진철과 최민아. 칩룡과 특수팀.
녹튼의 해서웨이와 그녀의 팀.
미국 지부, 일본 지부, 레드문. 그리고 지원 병력으로 온 군인과 기술자들.
이걸로 저런 대규모 전쟁이 끼어 들 수 없다.
쿠우우우웅.
쿠우우웅.
한 번씩 묵직한 진동이 산맥 전 체에 퍼진다.
“일단 방어는 소용이 없어, 저것 들의 전장이 이 근처가 되는 순간 우리는 끝이야.”
“최대한 꾸려서 나가야겠군요.”
“워프 가능한 마법사 싹 모으면 저들을 빼낼 수 있을까?”
“기술자랑 군인들…… 어느 정도 는요. 기지 자재를 싹 버리고 간다 면 레드문까지는 어떻게 가능하겠
네요.”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일단 그들은 보낸다. 이 중에 한 팀은 어차피 저들을 보호해야 한다. 나머지는 이곳에서 걸어서 벗어나 야 한다.
“…… 바로 시작하자.”
몇 초, 몇 분이 중요하다.
준비와 행동은 빨랐고 그들이 떠 났을 때는 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진철은 칩룡과 특수팀. 해서웨 이와 뒤의 그녀의 팀원. 미국 지부 의 스미스, 일본 지부의 시누자키 아이를 바라봤다. 모두 최정예이고 수없이 많은 죽음에서 살아남은 일 당백의 전사들이다.
그들의 주축은 이진철과 한국팀 이었다.
“작전은 간단하다.”
서쪽은 천족, 남쪽은 마족, 동쪽 은 인간, 북쪽은 몬스터다. 여기서 한 군데를 골라야 한다. 당연히 가 장 만만한 곳인 인간들이 있는 곳 이다.
운이 좋다면 협력을 기대해 볼 수 있다.
“문제는 이곳에서 거리가 최소 40km 이상이라는 거야.”
40km 정도는 성인 걸음으로 10 시간이면 간다. 하지만 이곳은 아 마존보다 더한 극지이고 몬스터의 수준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곳곳에서 마족과 인간, 인간과 천족, 그들과 몬스터의 전 투가 벌어지고 있다. 마치 세상의 끝이라도 온 듯 이 산맥은 피와 비 명으로 가득했다.
총 150여 명의 최고위급 사용자.
전 세계에서 최고의 인재들을 모 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죽음에 가까운 전장만 찾아다닌 일당백의 전사들.
이진철은 그들을 이끌고 혈향이 가득한 산속으로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