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편_ 헤르메스의 이야기(1)
헤르메스와 바르니의 전투의 스 케일은 상당했다.
중국 상해의 어느 공사장.
헤르메스의 피의 삽 수십 개가 허공에 떠올랐고 바르니의 피의 검 이 3m가 넘게 솟았다.
피이잉!
쿠우웅.
하나의 선으로 보일 정도로 빠른 피의 삽이 날아가는 순간 바르니의 손은 사라졌다. 그의 손에 들린 검 이 삽의 끝을 가격하며 허무하게 흐트러뜨린다.
헤르메스는 젖 짜기 스킬을 이용 해 바르니의 검을 붙잡고 수십 가 지의 피의 마법을 사용했다. 동시 에 몸을 움직여 두 수 앞을 대비한 다.
“크윽. 투 클래스 마스터치곤 강 하네. 역시 헤르메스라는 건가? 솔 렌 드 레이시아나 헤르메스.”
잊고 살았던 헤르메스의 풀 네임 이다. 헤르메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공격했다. 하지만 바르니는 그런 공격 따위로는 말을 막을 수 없다 는 듯, 계속 떠들었다.
“수천 년 전 마신의 오른팔이었 고 뱀파이어 계급사회의 정점이었 던 솔렌 가문의 장손이 이렇게 무 너지는군.”
“블러드 쇼벨.”
화악!
붉은 피가 사방으로 뻗는다. 두 번째 마스터 클래스인 젖 짜기 스 킬로 반경 1km의 모든 마력을 끌 어왔다. 길이만 50m가 넘는 삽이 생성되며 빠르게 돌아간다.
회전을 이용해 관통력을 높이는 기술! 게다가 이 어마어마한 크기 엔 쓰리 클래스 마스터를 넘보는 힘이 담겨 있었다.
“역시, 솔렌 가문인 건가.”
바르니도 이번 공격은 가볍지 않 다는 걸 느꼈다.
바르니는 지금까지 세 번째 클래 스를 공개한 적이 없었다. 마스터 한 두 개의 클래스와 몇 개의 중상 급 클래스만 있어도 충분했기 때문 이다.
하지만 헤르메스는 만만치 않은 강적.
이번만큼은 다 숨길 수 없었다.
화악!
바르니의 눈이 검게 변하며 양손 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졌다.
구우우웅.
바닥을 진동시키고 주변의 공간 을 삼킨다. 선명한 아지랑이처럼 시공마저 일그러뜨리는 것이다.
“뭐, 뭐야.”
헤르메스는 놀랐다. 하지만 그의 강한 힘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다. 이 정도는 농장 환경에 비하면 아 무것도 아니었다.
‘ 악의잖아?’
헤르메스가 그걸 모를 리 없다.
바르니. 그가 마스터한 세 번째 클래스는 ‘악의’였다.
파삭. 파스스.
그 악의에 닿은 식물과 돌들이 재가 돼 사라진다. 한쪽에 솟아 있 던 공사장의 콘크리트와 철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거대한 구조물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모습은 장관이 었다.
헤르메스는 한 발자국 뒤로 물렀 다.
“크크크크. 어떠냐. 이 힘이!”
바르니는 탐욕에 물들어 있었다. 악의를 마스터했다고 하지만, 그 힘을 정화하지 않고 그대로 쓴다는 건 결코 해선 안 될 짓이다.
“미련한 놈.”
“아름답지 않나? 끝이 보이지 않 는 어둠! 이 강렬한 탐욕들!”
다른 이들은 알 수 없을 거다. 하지만 헤르메스는 눈에 그대로 보 였다.
바르니는 미쳐 가고 있었다. 악 의에 물들고 탐욕에 젖으며 그 거 대한 힘에 삼켜지는 것이다.
“바르니.”
“왜, 이렇게 되니까 겁이 나는 건가?”
“우리 솔렌 가문이 왜…… 그렇 게 됐는지. 내가 왜 가문을 등졌는 지. 너는 잘 알 거라 생각한다.”
힘에 취해 헤롱헤롱 하던 바르니 가 움찔 떤다.
모를 수가 없다.
헤르메스의 혈통. 솔렌 가문의 전성기엔 다른 마족들이 뱀파이어 라는 종족 자체를 무서워할 정도였 다.
그 말이 어떤 거냐고?
지금 마계에서 뱀파이어가 겪는 수모는 잔인할 정도다. 종족의 한 계, 피 도둑, 모기, 꽃제비들. 뱀파 이어의 ‘아름다움’과 ‘피의 욕구’를 그렇게 폄하한다.
누구는 마족이 아니고 마물이라 며, 누구는 노예의 종족이라며 무 시하고 깎아내린다.
그뿐인가. 바르니 정도 되니까 중앙 성에서 그나마 한 자리 차지 한 거다. 다른 뱀파이어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올라간다 해도 위에 존재하는 인맥이 없으니 승진은 꿈 도 못 꾼다.
왜? 당연하게도 뱀파이어라는 종 족이 힘이 없으니까.
마계는 그런 곳이다.
힘이 있으면 한낱 마물이라도 대 접을 받는 곳.
힘이 없으면 강성했던 종족도 한 순간에 퇴물이 된다.
그런데.
수천 년 전이지만, 모든 마족이 두려워하는 뱀파이어의 세상을 만 들었던 게 바로 헤르메스의 혈통인 솔렌 가문이다. 그 강한 마족들 위 에 섰던 최초이자 최후의 뱀파이어 가문이라는 것이다.
마신의 오른팔이자, 마신의 자리 를 넘봤던 뱀파이어.
“…… 무슨 소릴 하려는 거냐!”
“바르니.”
순간 헤르메스의 붉은 눈 사이에 황금빛 선이 세로로 그어졌다.
“닥쳐! 무슨 소릴 해도……
“넌 침식당하고 있다.”
“아니야. 마스터했다고! io단계 까지 오른 이 경지에 침식?”
“내가 가진 왕의 눈.”
왕의 눈.
한때, 마계 정상에 섰던 솔렌 가 문의 적통(適統)만이 가질 수 있었 던 권능. 영혼을 꿰뚫는 힘. 단순히 그것만 본다면 아무것도 아닐 거다.
하지만 피는 영혼을 담고 영혼은 힘을 담는다. 그게 마력이든, 혈통 의 힘이든, 악의든.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사라지는 네가 보인다.”
“아니야! 아니야!”
“정신 차려라. 악의는 널 삼키고 있어!”
바르니 주변에 가득한 악의. 겉 으로 봤을 땐 그게 전부다. 바르니 가 완벽하게 컨트롤하는 것처럼 보 인다.
하지만 악의는 바르니 깊숙한 곳 까지 침투해 있고 붉은빛으로 이뤄 진 바르니의 영혼은 태풍 앞의 촛 불처럼 위태롭다. 깜빡거리며 마구 흔들린다. 바르니가 흥분하고 탐욕 스러워질 때, 강한 힘을 갈구하고 모든 걸 삼키려고 악의를 사용할 때.
바르니의 영혼은 점차 꺼지고 있 었다.
“바르니……
하지만 바르니는 이미 이성을 밀 어 버렸다.
긴 촉수. 피의 가시 하나가 헤르 메스를 향한다. 헤르메스는 얕게나 마. 아주 가끔이지만, 왕의 눈을 사 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강 하다는 건 아니다.
바르니가 보통 쓰리 클래스 마스 터라면 헤르메스가 어찌해 볼 수 있었을 거다.
“크아아아! 죽어! 죽어라!”
“크윽”
화악! 수십 개의 핏줄기.
푸확! 사방으로 터지는 가시.
쿠아아앙! 폭발하는 피의 힘.
구어어어어. 사방을 뒤덮는 악의!
헤르메스는 온갖 마법과 스킬을 사용하며 겨우 버티고 있었다. 악 의의 증폭은 거대했고 바르니의 실 력 또한 강대했다.
“헤르메스 님!”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근처에 대기하던 아이린이다.
“도망가!”
다른 설명을 할 여유도 없었다. 정면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피하고 막는 것도 바빴다. 아이린은 이곳 에서 살아남을 힘이 안 된다.
투 클래스 마스터. 하지만 악의 엔 저항력이 없을 거다. 게다가 진 혈도 아니다. 바르니가 눈길 한 번 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어 버린다.
“헤르메스 님! 도망쳐야 합니다!”
헤르메스의 눈에 아이린이 비쳤 다. 멀리 검은 악의를 뚫고 온다. 세차게 휘몰아치는 악의에 풍성했 던 드레스가 부서지고 하얀 피부도 도려져 날아간다.
“어서 가! 빨리 빠져나가!”
헤르메스가 아무리 그렇게 소리 쳐도 아이린은 꿋꿋하게 헤르메스 에게 다가왔다. 피부가 갈라지고 두둑, 뼈가 부러져도 재생하며 다 가온다.
헤르메스는 바로 권역을 설정해 진혈의 권능으로 아이린을 보내려 했다. 하지만 이성을 잃은 바르니 는 본능적으로 헤르메스의 권능을 방해한다.
“미친! 아이린! 지금 당장……!”
헤르메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바르니의 악의는 더 커졌고 촛불 같은 영혼은 꺼지기 직전이다.
쇼벨을 만들어 날리고 각종 피의 마법으로 방어한다. 젖 짜기 스킬 로 바르니의 공격을 최대한 쳐 내 지만, 역부족이다.
헤르메스의 몸엔 상처가 하나씩 늘고 있었다. 뱀파이어 특유의 재 생력으로 급속히 치료는 되지만, 생기는 상처가 더 많았다.
‘크윽, 이대론 안 돼.’
“크으으으. 죽어라!”
바르니의 공격이 거세졌다. 검은 악의가 폭발하며 헤르메스를 덮친 다. 그때, 바로 근처까지 온 아이린 이 몸을 던져 헤르메스 앞에 섰다.
“아이린!”
“어서…… 도망가세……
아이린의 말이 끝까지 들리지 않 았다. 이미 악의가 아이린의 전신 을 집어삼키고 헤르메스까지 잠식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안 돼.”
그때, 헤르메스의 눈에 황금색 선이 그어졌다.
그리고.
번쩍!
아주 얇았던 황금색 선이 옆으로 벌어지며 붉은 눈을 밀어냈다. 동 그랗고 반짝이는 황금빛의 눈동자.
왕의 눈이 개안(開顔)했다.
화악.
헤르메스의 주변은 황금색으로 가득 찼고 검은 악의를 몰아냈다. 무엇이든 삼켜 버릴 것처럼 보였던 검은 악의는 금색 연기에 닿자마자 화들짝 물러났다.
악의가 걷히자 처참한 아이린의 모습이 보였다.
다리 하나는 사라져 있었고 양팔 은 손목까지 사라져 있었다. 얼굴 의 반쪽은 두개골이 보였고 옷은 날아가 새하얀 나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아이린.”
“죄, 죄송합니다. 헤르메스 님.”
그대로 쓰러지는 아이린을 헤르 메스가 받으며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뱀파이어라도 재생 불가 능한 상처다. 진혈인 헤르메스라도 생명의 불꽃이 꺼져 버린. 뱀파이 어의 힘의 원천인 피가 바싹 말라 버린 아이린을 살릴 순 없었다.
이 힘. 왕의 눈이 가진 황금빛 권능마저도 그건 불가능했다.
“미안하다.”
아이린의 몸은 점차 굳어 갔다.
“아닙니다.”
“말을 아껴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아 이린은 눈을 감았다. 아직 의식은 있을 거다. 죽으면 이렇게 육체마 저 유지할 수 없으니까.
“…… 또 이렇게 되는구나.”
마계 최고의 전성기를 풍미했던 헤르메스의 솔렌 가문이 망했던 이 유. 적통인 헤르메스가 그나마 남 아 있는 가문을 나왔던 이유.
아이린에게 모든 걸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는 걸 안다.
“그냥 평범하게. 조용히 살고 싶 었다.”
아이린은 대답이 없었다.
“나의 가문에서 유일한 적통이었 고. 중앙 성에서…… 마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헤르메스가 처음부터 마계 권력 의 정점인 중앙 성에서 나와 변방 에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가 가진 왕의 눈은 수백 년 만에 나온 솔렌 가문의 유일한 권능.
당연히 모든 마왕과 마신까지 그 를 가지고 싶어 했다.
꼬아아아!
바르니가 악을 쓰며 달려든다. 헤르메스의 힘에 밀려 다가오지 못 하고 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미처 날뛰었다.
헤르메스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 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서 황금빛 방울 하나 가 맺혔다가 바르니를 향해 날아갔 다. 마치 날갯짓하는 나비처럼 황 금빛의 공간을 벗어나 악의를 뚫고 바르니에 미간에 꽂혔다.
왕의 눈.
단순히 힘의 흐름을 보는 게 아 니다.
그 흐름 사이의 작은 틈을 헤집 어 힘을 꺼 버린다.
그게 왕이 가져야 하는 권능이 다.
털썩.
바르니는 그대로 쓰러졌고 악을 쓰던 악의는 바르니의 몸속으로 빨 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리 가문을 집어삼켜 잘근잘근 씹었던 그들이. 그 힘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온몸을 바쳐 전선 가장 앞에서 활약했던 가문을……! 그리 고 나에게도. 나에게도 똑같은
헤르메스는 분노를 삭였다. 말이 두서없이 쏟아질 정도로 머리가 뜨 겁다.
아이린의 마지막 길에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 진절머리가 났다. 너를 받 아 주지 못한 것도 그 이유였고.”
정치라는 것. 그들이 원하는 권 력이라는 건 참으로 더러웠다. 힘 이 없는 헤르메스가 할 수 있는 건 도망뿐이었다. 눈에 띄지 않고 조 용히 사는 것.
바스스.
아이린의 양팔이 사라졌다.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고 악의에 영혼을 빼앗긴 바르니가 일어났다.
헤르메스는 황금빛 눈을 떴다.
번쩍.
화악!
파스스슥.
바르니는. 쓰리 클래스 마스터에 이르렀고 탐욕이라는 악의로 가득 찬 악(惡) 덩어리는 그렇게 허무하 게 사라졌다.
“이런, 제가 늦었군요.”
헤맨이 헤르메스 옆으로 나타났
“헤맨 님이시군요.”
“뱀파이어?”
“네…… 이젠 사라지겠지만요.”
“왜 이러고 있어요? 잠시만요.”
헤맨은 아공간에서 최상급 엘릭 서를 꺼냈다.
찰랑.
한없이 순수하고 진한 마기로 이 뤄진 엘릭서였는데, 연우와 헤맨이 마계의 침공을 막으면서 수집했던 마왕의 심장 수십 개를 모아 만든 엘릭서였다.
헤르메스는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피가 말라 버린 뱀파
이어는 그 어떤 엘릭서가 와도
“에잇, 답답하게. 잠깐 비켜 봐 도.”
헤맨은 헤르메스를 밀쳤다. 황금 빛 왕의 힘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 었지만, 헤맨에겐 별 저항이 되지 않은 모양이다. 헤르메스야 그런 경험은 익숙했기에 아무렇지도 않 았다.
“이건 달라요.”
헤맨이 아이린에게 검은 엘릭서 를 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