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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편_ 언더 월드(4) (139/207)

제154편_ 언더 월드(4)

계급으로만 따지면 헤르메스가 지방 광역시의 건물들 주인. 나이 아르는 시골에서 수퍼 하나를 가진 정도에 불과하니까.

게다가 더 중요한 건 혈통이다.

혈통에 있어서는 나이아르는 헤 르메스의 발끝을 바라보는 것도 허 락이 있어야 가능할 정도다.

진혈이라는 건 그저 피가 순수하 다는 게 아니다.

모든 뱀파이어는 피를 나눠 준 주인이 존재한다. 99.9%의 뱀파이 어는 그렇게 태어나니까. 하지만 처음부터 주인이 존재하지 않는, 주인의 위치에서 태어나는 뱀파이 어가 있다. 그런 이들은 진혈(眞血) 이라고 하는 거다.

그건 단순히 주종 관계를 떠나 더 강력한 힘, 권능, 권역, 종속을 지졌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이쪽입니다.”

나이아르가 공손히 상체를 숙이 며 양손을 뻗었다.

음침한 성이 보인다. 곳곳에 상 급 마법진이 보였는데 역시나 아이 린의 작품이었다.

“이곳엔 아이런뿐인가?”

“네, 그렇습니다.”

아이린뿐이라는 건, 혼자 산다는 걸 묻는 게 아니다. 아이린과 동급 이거나 이상의 뱀파이어가 있는 걸 묻는 거다. 없다고 대답한 것은 아 이린의 하위 종속들만 있다는 거다.

헤르메스나 아이린 정도 되는 뱀 파이어에게 그 이하는 같은 뱀파이 어 취급도 하지 않는 게 그들의 상 식이다.

끼이 익.

문이 열렸을 때, 멀리서 중세 유 럽 특유의 쏙 들어간 허리, 풍성한 엉덩이를 뽐내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하얀 피부의 소녀가 달려 나 왔다.

“헤르메스 님! 역시! 헤르메스 님의 냄새였어요!”

발랄하게 뛰어오는 아이린의 얼 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실핏줄마저 비칠 하얀 피부, 심연같이 검은 눈 동자, 새빨간 입술. 예술 작품이라 고 해야 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마스터에 달한 마법 실력.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여성이었 다.

하지만 헤르메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아이린이 품에 안기기 직전, 헤 르메스는 손을 뻗어 그녀를 제지했 다.

“오지 마.”

“안아 주세요!”

헤르메스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아이린은 강하다. 뱀파이어라는 종족의 한계를 부순 지 얼마 되지 않는 뱀파이어 중 하나다. 그래서 헤르메스에게 끈덕지게 달라붙을 수 있었던 것이다.

투 클래스 마스터.

아이린이 이룬 수준이다.

그럼 예전에 헤르메스보다 강하 지 않았냐고? 객관적으로 보면 맞 다. 하지만 헤르메스는 진혈이고 아이린은 진혈이 아니다.

뱀파이어 사이에선 진혈이라는 건 절대적이다. 투 클래스 마스터 인 아이린이 원 클래스 마스터 헤 르메스에의 털끝 하나 건들 수 없 는 것 ?

그게 바로 진혈의 힘이었다.

“너무해요!”

“뭐가 너무해. 내가 달라붙지 말 라고 했지.”

“와! 헤르메스 님! 벌써 투 클래 스 마스터를 이룬 거예요? 진혈에 투 클래스 마스터라니! 역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아이린의 하얀 볼은 빨갛게 달아 올랐다. 잔뜩 흥분한 건지 양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어어! 조심해!”

“안 돼요. 이대론 안 되겠어요!

사랑해요. 헤르메스 님!”

아이린이 마스터에 이른 마법을 사용하며 헤르메스에게 달려들었다. 헤르메스는 어쩔 수 없이 권역을 설정했다.

“멈춰라.”

마력이 전혀 실리지 않은 평범한 말. 하지만 그 안엔 진혈의 권능이 담겨 있었다.

아이린의 성 전체가 헤르메스의 권역으로 인정됐고 아이린은 그대 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의식적인 게 아니다. 본능이었고 피의 맹약 에 따라 절대로 어길 수 없는 규칙 이 돼 버린 것이다.

“아아! 나의 사랑!”

하지만 아이린은 몸이 더 뜨거워 질 뿐이었다.

뒤에 당혹, 민망함, 두려움으로 변해가던 세 뱀파이어는 헤르메스 의 권역이 설정되자마자 무릎을 꿇 었다.

“흐으윽. 이게 진혈의 권역!”

“감격스럽습니다! 주인이시여!”

진혈의 권역이라는 건 모든 뱀파 이어 위에 있다. 권역에 영향을 받 지 않는 건 헤르메스보다 강한 다 른 종족이거나 같은 진혈뿐이다.

“진정하자 아이린.”

“네, 아, 알겠습니다!”

헤르메스의 권역에선 모든 말이 규칙이자 법이 된다. 아이린의 뜨 거운 성정까지 진정시켜 버리는 힘 이었다.

“초대해 주련?”

“네, 기꺼이요.”

붉어진 아이린의 얼굴은 가라앉 았고 교양과 품격이 느껴지는 움직 임으로 헤르메스를 안내했다.

헤르메스는 그런 아이린을 보면 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름 답고 열정적인 여성이다. 그 어떤 뱀파이어도. 그 어떤 마족도 아이 린을 보면 빠져든다.

하지만 헤르메스는 아니었다.

아니, 참고 있다고 해야 할 거다. 아이린은 헤르메스를 가장 좋아했 지만, 남자를 너무 좋아했고 이성 보다 본능이 앞서 나가는 여자다.

생각보다 보수적인 헤르메스는 그런 아이린에게 빠지면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본인이 가장 잘 알 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언제부터 여기로

왔던 거야?”

“저희가 온 건 20년이 조금 안 됐어요. 막, 마계에서 인간계로의 침공을 시작하고 천계와의 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어요.”

“20년 전이라……

아이린은 오랜만에 정상적인 모 습이었다. 헤르메스는 이럴 때의 아이린이 가장 좋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헤르메스가 권역을 설정했 을 때가 전부였다.

“언더 월드라지?”

“네, 20년 전에 제가 도착하자마 자 종속들을 모으고 서울 지하에 도시를 건설했어요. 지금 미국, 러 시아, 영국, 일본에도 저희 도시가 있습니다.”

아이린은 헤르메스 앞에선 얌전 한 강아지지만, 혈통으로도 1% 안 에 드는. 그러니까 위의 주종 관계 가 단 한 명뿐인 진혈의 다음 혈통 으로인 ‘오리진’이라는 뱀파이어다.

별명이 검은 사마귀라고 불리며 마계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악녀다.

“중국은?”

문득 궁금해서 물었다.

이 지구에 대해 몰랐던 예전의 헤르메스가 아니다. 항상 농장 일 만 하는 줄 알지만, 연우가 의무적 으로 TV와 인터넷을 사용하게 했 고 지구의 상식에 대해 많이 공부 했다.

“거긴 체르노 가문에서 접수했어 요.”

아이린의 얼굴이 굳었다. 항상 밝은 아이린에게 쉽게 볼 수 없는 얼굴이다. 하지만 헤르메스는 이해 했다.

“체르노 놈들. 체르노 바르니. 그 가 진혈이었지?”

“네……. 이번에 11단계 마력석 이라는 걸 구해서 쓰리 클래스 마 스터로 올랐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11단계? 아아, 상급 마력석을 말하는 거구나.”

“네, 맞습니다.”

그 정도 마력을 흡수했다면 벽을 깨는 데 작은 도움은 될 수 있다. 하지만 마력석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은 헤르메스가 가장 잘 안다.

“실력은 출중했으니까. 아, 근데 요즘 늑대 인간이랑 무슨 문제가 있다며? 이 세 놈이 우리 주인님 농장에 와서는……

“주, 주인님이요? 아, 죄송합니 다. 말을 끊어서……

헤르메스는 입을 다물었다.

말실수라면 실수다. 연우라는 사 람이 주인이 맞지만 뱀파이어들 앞 에서. 그것도 ‘진혈’이 ‘오리진’ 앞 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 당연히 충 격적일 거다.

“그 말은 다음에 하고. 하여튼 내가 관리하는 농장에 와서 난장판 을......”

“죄, 죄송합니다. 도주한 늑대 인 간들이 그곳으로 들어가는 바람 에…… 당연히 진혈의 헤르메스 님 이 있는 걸 몰랐습니다. 죄송합니 다.”

헤르메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니야. 왜 늑대 인간하고 그런 일이 있었 냐는 거지. 우린 평화가 필요해. 밖. 아니, 적어도 한국에서 우리 뱀 파이어와 늑대 인간이 싸우면 안 된다고. 알았어?”

“네? 그게 무슨……

아이린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마계에서 살았다. 강자 지 존, 악이 당연시되는 곳. 약하면 죽 고 강하면 죽여도 된다. 이긴 자가 모든 걸 갖는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온 거다.

어떤 음모를 꾸미고 악랄한 짓을 하든 뱀파이어와 늑대 인간 사이에 선 그런 일을 안 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후. 이걸 어디서 부터 설명해야 하나.”

헤르메스는 한쪽 의자에 앉았다.

“얘기를 좀 하자. 아니, 그냥 내 가 여기를 접수하는 게 빠르겠지?”

“물론입니다. 헤르메스 님이 오 신다면 누구든 반대할 뱀파이어는 없을 겁니다.”

“늑대 인간하고의 관계는? 왜 그 런 거지?”

“그게…… 관계는 원래 안 좋았 지만, 체르노 가문이 끼어들면서 심각해진 건 사실입니다. 저희 네 이라 가문이 지배하는 한국, 러시 아, 영국의 언더 월드에 영향을 끼 치기 시작했는데, 그게 늑대 인간 세력과 손을 잡고 움직이는 거라 저희는 늑대 인간 쪽을 압박하는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대략적인 그■림이 그려진다. 이런 일이야 마계에서도 많았다. 게다가 체르노 가문은 뱀파이어답지 않게 뒤에서 음모를 꾸미는 게 특기였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100여 명의 뱀파이어였다.

“헤르메스 님이 온 걸 느꼈나 봅 니다.”

아이린은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헤르메스도 당연하게 자리 에 일어나 걸었다. 아이린과 세 뱀 파이어는 헤르메스를 보필하듯 뒤 를 따랐다.

“인사는 해 줘야지.”

헤르메스가 문을 열자 100명이 족히 넘어가는 뱀파이어가 모여 있 었다.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복장을 착용하고 있는 걸 보니 한자리하는 귀족들인 것 같았다.

처억!

100명의 뱀파이어가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진혈의 헤르메스 님을 뵙습니 다!”

그들이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 다.

아이린과 세 뱀파이어까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헤르메스는 그 중앙에 당당히 서 있었다. 아주 익숙하고 당연해야 하는 장면. 하지만 어색했다. 뱀파 이어 사회에서 홀로 나가 변방에서 생활한 게 수백 년 전이다.

그동안 헤르메스를 잊지 않은 뱀 파이어들이 고마웠다.

헤르메스는 천천히 아이린의 머 리를 쓰다듬었다.

“고맙구나.”

“아닙니다. 돌아오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 미안하구나. 난 다시 돌아 가야 한다.”

모두가 모여 있을 때 말하는 게 낫다.

뱀파이어들이 동요하는 게 보였 다. 하지만 번복할 순 없다. 이곳에 온 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고, 헤르메스가 지낼 곳은 따로 있 었다.

그건 연우의 농장.

“물론, 그 전에 체르노 가문을 접수해야겠지.”

동요가 멈췄다. 하지만 그들도 안다.

이곳에서 헤르메스가 군림하는 건 진혈이기 때문이다. 체르노 바 르니는 쓰리 클래스 마스터이면서 진혈이다. 누가 봐도 헤르메스가 이기긴 힘든 상황이었다.

연우는 블랙 자이언트 울프를 몇 마리 구해 므깃도에 넣어 놓고 작 업을 시작했다. 헤르메스가 언더 월드라는 곳으로 갔는데 기가 죽으 면 안 되니까.

“재료 팍팍 써. 아끼지 말고.”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 최상급 마력석도 하나 박 고 엔트 족의 껍질도 쓰고. 이토석 을 이용해서 악의도 사용할 수 있 게 하자.”

“알겠습니다!”

연우는 요섭에게 헤르메스가 사 용할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 다. 요섭도 기분 좋게 받았고 연우 도 한 손 얹었다.

“내 식구가 밖에 나갔는데 기죽

으면 안 되지.”

“하긴, 그렇긴 합니다. 헤르메스 가 아직 약해서 맞?고 오기 딱이니 까요.”

“그래, 투 클래스 마스터가 뭐야. 농장에 가장 오래 있었던 식군데 우리가 너무 관심이 없었어.”

연우는 더 정성을 들이기로 했 다.

이왕이면 언더 월드에서 최고가 돼 농장에 진상이 찾아오지 않게 하는 게 좋으니까.

탕. 탕. 탕.

대장간의 망치질 소리는 늦게까 지 울려 퍼졌다. 농장의 겨울엔 몇 안 되는 소음이다. 밖에선 하얀 눈 이 내리고 있었는데, 몽글이 관여 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순수한 느 낌의 눈이었다.

반짝.

아무것도 없던 농장에 차례로 불 이 켜지기 시작했다. 식당, 펍, 집, 펜션, 울타리, 카페, 게헨나르 울타 리까지. 겨울이라며. 곧 크리스마스 라며 세 엘프가 준비한 이벤트였다.

작업을 끝내고 나온 연우는 그 모습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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