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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편_ 일상으로(1) (121/207)

제136편_ 일상으로(1)

아침이 찾아왔다.

근래에 꽤 바빠서 카페에 찾아 오는 것도 드물었다. 연우는 뽀드 득 눌려 밀리는 눈을 밟으며 뒷산 을 올랐다. 벌레와 간간이 보이던 동물들이 보이지 않는다.

겨울은 겨울인가 보다.

“후름, 뭐해?”

“어? 연우 왔어? 나 그림.”

난리가 아니었다. 카페 곳곳에 자신 있게 걸어 놓은 그림들, 마 치 어린아이의 자유로운 낙서처럼 정체 모를 추상화…….

“극사실주의야. 어때? 괜찮지?”

“…… 어, 괜찮네.”

연우는 설명을 봤다. 혹시 연우 가 그림에 관심이 없기에 잘못 알 고 있던 건가 싶어서였다.

[고뇌 (명화)]

설명 : 지성 생명체가 가지는 고뇌를 표현한 자칭 극사실주의 그림. 하지만 그것조차 일반적인 관념을 벗으려는 고뇌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드는 장치로 보인다. ‘다른 이들의 눈과는 다른 세계를 보는 사람이 극사실주의를 그린다 면?’ 그것은 추상화가 아닐 것이 다.

‘무슨 설명이 그리 거창해?’

그냥 졸라맨들이다.

그림도 마력과 정령력을 이용해 설계까지 해 버리니, 뭘 그려도 명화가 나오는 거다. 겉으로 보이 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그, 그래. 괜찮네. 명화는 많이 만들어 놓으면 좋지.”

원래 잘 쓰이지 않는 아이템이 지만, 악의의 대륙을 겪으면서 필 요성을 느꼈다.

어차피 연우의 소유가 됐지만, 직접 그림에 담을 몬스터는 많았 다. 전염성이 너무 강해 다른 세 계에 들여놓지 못하는 몬스터이기 도 하고 다양하게 변형된 악의의 몬스터는 꽤 소장 가치가 있다.

“나 커피 한 잔 줄래?”

“좋지, 나도 한 잔 먹으려고 했 어.”

연우는 테라스에 앉았다. 다리 를 쭉 펴고 등을 눕듯이 기댔다.

이곳은 항상 편하다.

겨울이라 바람이 꽤 찼지만, 연 우에게 해를 끼치지 못했다. 눈도 위에서 잘 막아 놨기에 축축하지 도 않았다. 특히, 연우가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농장이 한눈에 보인다는 점 때문이다.

“참 좋아.”

그때, 후름이 커피를 가져왔다.

“농장, 너무 작지 않아?”

“그렇긴 해.”

“그 아스가르드에선 훨씬 넓었 잖아.”

“꽤 오래 관리하던 농장이었으 니까. 원래 제임스가 키웠던 곳이 기도 했고.”

“여기도 더 키울 때 되지 않았 어?”

정체된 지 꽤 됐다. 이것저것 일이 많았고 농장에 신경 쓸 여유 가 없었다.

“대충 적응도 됐고 밑에 일할 애들도 생겼으니까……

“그렇지, 댕댕이랑 검둥이랑. 헤 르메스랑 리젤도 일을 잘하고. 천 인종도……. 뭐, 걔는 빼고라도 삼 미호도 있고.”

“맞아. 몬스터 상점도 하나 만 들기로 했는데.”

악의의 대륙에 있던 건 회수했 고 이곳에 새로 만들기로 했다. 몬스터 판매에 대한 문의는 끊임 없이 들어왔고, 튜브 등에서 화제 가 되고 있었다.

“구역도 몇 개 더 만들어서, 새 로운 몬스터를 들여놔야겠어.”

“괜찮지, 도울 거 있으면 말해.”

“아, 알았어. 그림 계속 그리는 거야?”

“그래야지, 실력이 줄지 않으려 면 꾸준히 해야 하는 거야.”

그건 너무나 맞는 말이라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리는 족족 명화가 나오니, 아무것도 모 르는 연우는 그냥 믿는 수밖엔 없 다.

연우는 하얗게 내려앉은 겨울의 농장을 둘러봤다. 어디에 새로운 구역을 추가하고 어떤 몬스터를 추가해야 할지. 또, 겨울이니 몬 스터 선택도 중요했다.

“식사하세요!”

멀리서 필리아의 목소리가 들렸 다.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출발했 다.

뽀드득 뽀드득.

움찔.

연우와 후름이 내려가는 길에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모른 척했다. 삼미호가 장 난을 치기 위해 매복해 있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곳 바로 옆을 지날 때였다.

“캬!”

양손에 발톱과 이를 드러내며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삼 미호만의 생각이었다.

“어이쿠. 놀. 래. 라.”

후름은 별 관심 없었고 연우는 놀란 척을 해 줬다. 저렇게 연기 를 못하는데 삼미호는 그게 또 좋 다고 꺄르르 웃는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헷. 아까 연우 님 올라갈 때 요! 완벽했죠?”

“그래그래. 꽤 오래 있었네.”

족히 30분은 위에 있었을 텐데, 그때부터 기다린 거다. 삼미호의 인내심에 찬사를 보낸다. 안 그래 도 추운데 눈 속에 있었으니 얼마 나 추울까.

코끝이 파랗게 변하고 꼬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인다. 연우 는 살포시 삼미호를 품에 안았다.

“으으, 타흐태!”

머리를 겨드랑이로 쑥 집어넣으 며 말했다. 꼬리를 배 안쪽으로 돌돌 말았는데 그것으로도 부족한 지 선술로 불 몇 개를 띄운다.

“많이 추웠구나. 가서 밥 먹자.”

연우와 후름. 삼미호까지 식당 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사가 시 작되고 있었다.

각자 국밥 검은 돌솥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는데 김이 폴폴 올라 오는 것으로 보아 따듯한 국물인 것 같았다.

“와, 냄새 좋은데? 순대국밥이 야?”

“네! 한번 도전해 봤어요!”

“저는 일본 나베를 만드는 방법 으로 개량해 봤습니다.”

필리아와 쇼타였다.

필리아는 완벽하게 따라 하려고 노력했고 쇼타는 살짝 개량했다고 했다. 연우는 둘 다 먹기로 했다. 위장은 충분하고 맛도 궁금했다.

연우는 테이블 아래에 삼미호를 내려 줬다.

“뜨거우니까 천천히 불어서 먹 어.”

“알겠어요! 혀 조심할게요!”

“들깨 가루랑 양념 먹고 싶으면 얘기하고.”

“ 알겠어요!”

삼미호는 아직도 눈이 맺힌 세 개의 꼬리를 살랑거리며 방방 뛰 었다. 둘이 한 음식은 항상 맛있 었으니, 먹어 보지 못했던 음식도 기대하는 거다.

연우도 그런 삼미호를 보면서 수저로 국물을 살짝 떴다.

후.

후릅.

뜨겁다. 하지만 맛있었다.

“ 크으.”

이 감탄사. 예의상 하는 게 아 니다. 완벽한 국물이 목젖을 때리 며 등장하는 필연적인 운명.

살살 저어서 내용물을 살폈다.

큼지막한 순대, 내장, 머릿고기, 염통 등등. 여러 부위의 돼지고기 가 보였다. 연우는 아직 신선한 부추를 잔뜩 넣었다. 들깨 가루랑 양념장까지.

연우는 다 넣어서 먹는 스타일 이다.

다시 국물을 떠먹었다.

오독.

양념장에 있던 큼지막한 대파가 씹히면서 매운맛이 올라왔다. 이 럴 땐, 밥을 입에 넣고 국물도 더 넣는다.

“후읍. 춥.”

뜨거운 수증기가 입에서 뿜어진 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연우는 순대 하나를 쌈장에 찍 고 물에 담가 매운맛을 살짝만 뺀 양파를 올렸다. 이 둘은 동시에 먹어 줘야 한다.

아삭.

양파가 먼저 씹히며 매운맛이 올라오고, 뒤로 들어오는 순대의 순수한 맛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까드득.

리젤이 옆에서 소주 뚜껑을 따 기울였다. 연우는 놓치지 않고 잔 을 대 차갑게 식은 술을 받는다.

“역시 센스쟁이.”

“저도 한잔 주세요.”

아무래도 이 농장에서 연우는 잇는 주당은 리젤이 될 것 같았 다. 이자젤도 있지만, 그녀는 위 스키 파였으니까.

“우우움! 맛있어요!”

삼미호의 꼬리가 다다닥, 연우 의 발에 부딪힌다. 신이 나 꼬리 가 절로 움직이는 거다. 연우는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아 다리를 피 하지 않았다.

빙글.

삼미호는 순대를 하나 먹고 기 분이 더 좋아졌는지 한 바퀴 돌아 다시 먹기 시작한다. 입으로만 먹 기 힘들 텐데 말이다.

“삼미호야. 사람으로 변하는 건 아직 무리인가?”

“앗! 할 수 있는데! 할 수 있어 요!”

“…… 그런데?”

“아직 움직이는 게 힘들어서요! 연습하는 중이에요!”

그 말에 이자젤이 입을 열었다.

“아직 걷는 것도 힘들어 해. 걷 게 되고 뭐 먹는 것도 적응되면 변하라고 했어.”

이자젤의 말이 맞았다.

한참 아이델과 선술을 교환하며 서로 성장하고 있지만, 아기는 아 기였다.

“아, 연우야. 이번에 아스가르드 대규모 패치한다는데?”

“그래? 근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 말을 꺼낸 이는 이자젤이었 다.

“혜영한테 들었어. 요즘 바쁘게 돌아다니던데, 그런 것도 어디서 들었나 봐.”

하긴, 인간 중에서 연우가 가진 힘의 원천을 아는 이는 혜영뿐이 었다. 동생이나 협회장도 정확한 사실은 몰랐다.

“한 번 들려 봐야지 않겠어?”

제임스를 말하는 거다.

들릴 수야 있다. 하지만 원래 있던 캐릭터는 삭제됐고 플레이어 라는 사용자 능력도 다시 발현되 지 않았다. 가려면 새로운 캐릭터 를 만들어야 했고 그게 어떤 부작 용을 일으킬지 연우도 알 수 없었 다.

‘무슨 일이 있겠냐마는.’

조금은 두려웠다.

연우는 소주를 들이켜고 국밥을

한 수저 크게 먹었다.

아스가르드.

신들의 나라, 신들의 땅, 신들 의 세계라고 불리는 북유럽신화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그리고 연우 가 망겜이라 부르는 폐물 게임의 이름이다.

그 대륙 중앙엔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그것도 땅값이 어 마어마하다는 높게 솟은 고층 건 물이 수두룩한 제국의 수도 중앙 에 말이다.

“제임스! 또 뭘 그렇게 보고 있 어요?”

“세상이 또 변한다.”

“또요? 근래엔 변화가 상당히 많네요.”

“그러게……

붉은 머리를 짧게 쳐올리고 헐 렁한 냉장고 바지에 천을 대충 여 민 상의를 걸치고 있었다.

“농장들 확인 좀 하자. 각 세계 (世界), 차원, 구역, 던전. 모두 확인하고 변화된 사항 다 체크해. 플레이어한테 업데이트 사항 받아 두고.”

“알겠어요.”

보랏빛 머리를 한 세이지, 메인 직업은 사냥꾼. 얼굴에 주름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였지만, 나이는 이미 50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임스……

“왜?”

“연락은 없죠?”

“센느? 없지.”

“ 너무하네요.”

“뭐가 너무해. 이미 작별 인사 까지 다 해 놓고.”

벌써 3년이 지났다. 오랜 시간 은 아니지만, 소중했던 사람을 떠 나보낸 이들에게는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렇죠! 몇 개월 전에 접속해 놓고 인사도 없이 사라졌 잖아요. 데블리스 평원 싹 쓸어 담은 걸 우리가 모를 줄 알았나? 아니면 잠깐 들를 생각도 안 난 건가?”

“그만해. 사정이 있었겠지.”

“칫, 사정이……! 그래요. 알겠어 요. 원래 이런 업데이트 상황엔 센느가 항상 정리했었는데.”

세이지는 끝까지 투덜거렸다. 제임스도 더 말하지 않았다. 말해 봤자 입만 아프다. 변하는 건 아 무것도 없을 테니까.

“하여튼. 저들도 한번 만나야 죠?”

세이지가 턱으로 농장 입구를 가리켰다. 그곳엔 제국의 황제 사 신단, 각 공국과 왕국의 손님들과 이종족의 대표자들까지 모여 제임 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니까 대기실은 왜 만들어서.” 제임스가 정말 귀찮다는 듯 인 상을 찌푸렸다.

“어쩌겠어요. 저것도 안 만들면 황제나 왕들이 막사를 짓고 앉아 있는데, 전에 마왕 한 명이 와서 마기 풀풀 날리는 둥지 하나 만들 뻔했잖아요.”

“네가 쫓아 버렸지.”

“그, 그건! 참 어떻게 해요 그 럼? 쫓긴 해야지. 그걸 그냥 둘 수도 없고.”

“근데 이번에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제임스가 말했던 거처럼, 업데 이트 때문이겠죠.”

제임스는 다시 하늘을 바라봤 다.

거대한 바람이 분다. 지금까지 와는 전혀 다른 변화의 바람. 항 상 산들바람에서 조금 거센 바람 이었다면 지금은 대륙을 엎어 버 릴 정도의 강력한 바람이었다.

“다 내보내, 이젠 해결해 줄 사 람이 없다고. 몇 년 전부터 계속 얘기해도 들어 먹질 않네.”

“센느…… 가 없어도 제임스가 할 수 있잖아요? 그래도 저렇게 기다리는데.”

“못해. 가서 블랙 쿡 닭장이나 살펴봐, 방금 뭐 들어간 것 같은 데?”

“네? 아 놔, 저것들! 페릿이잖 아? 결계는 또 어떻게 뚫고 들어 온 거야! 야! 케베!”

왈왈!

멀리 머리 세 개가 달린 케로베 로스 한 마리가 꼬리를 말고 닭장 으로 빠르게 뛰어간다. 너무 평화 로웠기에 잠깐 낮잠을 잔다고 방 심한 게 잘못이었다.

“에라, 만날 자기만 하고! 확 삶아 버린다!”

깨갱.

세이지의 살기 가득한 외침에 빨갛게 불타던 꼬리가 파랗게 질 려 버렸다.

제임스는 그 모습에 웃음을 짓 곤 농장을 돌아보기 위해 엉덩이 를 털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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