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편_ 새로운 얼굴(1)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일반적인 농장의 겨울은 바쁘 다. 가축들이 춥지 않게 축사를 보수하고, 물이 얼지 않게 싸매며, 농작물엔 비늘을 씌운다. 눈이 내 리면 주요 길목과 가축들이 쉬는 곳을 깔끔하게 정리도 해야 한다.
하지만 이곳이 어디인가.
“내가 저거 치울게, 클린!”
“그럼 난 축사를 지어야겠다.”
한 번의 손짓으로 낙엽과 내린 눈이 정리된다.
또 한 번의 손짓으로 축사를 지 어 올리고, 물이 얼지 않도록 보 호하고, 공중 수영장과 펍 루프탑 에 지붕을 씌운다.
“앗! 차가워! 전 여기 붉은 귀 북극여우를 돌볼게요!”
삼미호가 선술로 날아들며 외쳤 다. 내리는 눈과 쌓인 눈에 닿지 않게 밀어낼 수 있지만, 그대로 맞으며 즐긴다.
폭.
눈 속에서 먹잇감을 발견한 붉 은 귀 북극여우가 고개를 내밀어 삼미호를 문다.
하지만 얇은 막에 막혀 기겁해 다시 들어가 버린다.
“왜에! 나랑 놀자아!”
삼미호는 눈구멍으로 따라 들어 간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파란 코코넛 크랩은 허겁지겁 얼 음 속으로 들어가 뚜껑을 닫아 버 렸다.
필리아는 그 모습을 보다 풉 하 고 웃었다.
이곳에 온 지도 몇 주가 흘렀 다. 하루하루가 즐겁다. 특히나 음식을 만들면 그걸 먹어 줄 이가 많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게다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엄청나 게 먹기도 했고 표현도 적나라해 더 좋았다.
그것뿐인가. 색다른 재료. 밖에 선 절대로 구할 수 없는 것들이 넘친다. 또, 구해 달라고 하면 언 제든지 날아가 구해 온다.
멀리서 천인종과 아이델이 날아 왔다.
천인종은 헤르메스 옆에서 일을 배우다가 쫓겨나서 아이델과 함께 식재료를 구하는 사냥 담당을 맡 았다.
“여기 왔습니다.”
아이델은 사람만 한 새조개와 키조개를 구해 왔다. 천인종은 자 리돔처럼 생긴 물고기 몬스터를 잡아 왔는데 뼈만 있는 언데드였 다.
“어…… 수고했어요. 고마워요.”
필리아의 웃음에 아이델과 천인 종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 못 먹을 재료인 건 맞다.
하지만 간혹 이렇게 가져오는 재료는 필리아의 도전 정신을 발 휘하게 만든다.
‘그래, 정화해서 기름에 바싹 튀기면 먹을 만할지도 몰라.’
반대로 아이델은 센스가 굉장히 좋았다.
항상 맛이 좋은 제철 몬스터를 잡아 왔다. 그래서 항상 아이델이 잡은 재료로 메인을 만들고 천인 종의 재료는 서브나 도전 음식이 된다.
“고마워요. 한 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 그때 밥 먹을 테니까 다 불러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아, 알겠다.”
아이델은 항상 예의가 발랐고 침착했다. 반면에 천인종은 건방 진 것 같으면서도 눈치를 살살 보 는 게 귀여웠다.
필리아는 쇼타에게 갔다.
“오늘 재료예요.”
“오호, 이건 아이델일 거고 이 건 천인종인가 보네요.”
“정확하네요. 오늘도 한판 하시 죠?”
“당연하죠. 그런데 오늘 다 해 산물인데 괜찮겠어요? 제 전문인 데.”
“그럼요. 양식에서의 해산물을 얕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둘은 항상 대결한다.
천인종과 아이델이 가져온 재료 를 정확하게 반으로 나눠 요리하 는 거다. 그리고 판단은 농장 식 구들.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하진 않는다. 딱 보면 서로 어떤 그릇에 손이 가는지 보이니까.
표정은 항상 감탄이라 비교할 게 없기도 했다.
“그럼 딱 한 시간입니다.”
“알겠습니다! 기대하세요.”
필리아가 재료를 정확히 반으로 나눠 들어갔다. 드래곤의 힘이었 고 마법이었다. 쇼타는 그 모습에 매번 봐도 신기하다는 듯 감탄했 다.
쇼타는 이곳에서 가장 평범한 인간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빠르게 적응 했는지 모른다.
TV에서나 보던 게 사용자였고, 1단계 마법이나 10단계 마법이나 그다지 차이가 없어 보였다. 전쟁 을 하는 것도 아니고 생활에서 사 용하는 자잘한 마법이기에 더 그 랬다.
탕. 탕. 탕.
그들이 요리를 시작할 때, 대장 간에선 또 망치질이 시작됐다. 중 간 잠깐의 쉬는 시간을 제외하곤 항상 들리는 소리다.
“으아아아아! 다 됐습니다. 이 토석! 제가 마스터하겠습니다!”
“조심해라! 진짜 악의가 담긴 순도 99%의 이토석이야!”
탕. 탕. 탕.
“알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이미 죽음에 관해선 최강입니다!”
“하하하, 역시 내 제자. 더 쳐 라. 매우 쳐라!”
망치가 한 번 내려칠 때마다 이 토석에선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그 기운마저도 바벨의 광기(狂氣) 앞에선 한낱 악의(惡意)에 불과했다.
[혼을 불태우는 대장장이]라는 스킬이 벌써 5단계에 들었다. 이 스킬이 올라갈수록 바벨의 생명력 과 혼의 탄력성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이런 악의? 번들거리는 눈빛으 로 째려보기만 해도 기겁해 물러 난다.
“으아아아! 좋습니다. 이제 한 번 접었습니다. 앞으로 378번을 더 접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대충 378시간이 남았구 나. 더 달궈라! 불이 아닌 혼을 태워 달구는 거다.”
“알겠습니다! 으아아아.”
바벨의 머리 위에 마력도 아닌 미증유의 혼이 활활 타오르기 시 작했다. 영혼처럼 보인다. 아니, 진짜 영혼이었다.
요섭은 그 모습에 뿌듯함을 감 추지 못했다.
테밋의 혼을 만들면서 포 클래 스 마스터에 들었다. 아직 투 클 래스 마스터도 되지 못한 바벨이 지만, 성장 가능성은 무한하다.
“난 이걸 연구해야겠다.”
요섭은 요즘 연우가 준 [초급 던전 제작 세트(탑형)]을 연구하 고 있었다. 대장장이 기술은 이제 한계라는 걸 깨달았다.
[얼티밋]은 기본으로 나오고 [GOD]에 [Kill the GOD]까지 만 들었다. 이젠 더 오를 곳도 없는 거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게 이거다.
아스가르드에도 ‘던전 마스터’라 는 직업이 있다. 그들 중 태반은 대장장이 기술을 가진 장인들이었 다.
그땐 이해하지 못했다.
이딴 건축물에 무슨 매력이 있 는지 말이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장비 가 하나의 예술품이라면 탑형 던 전은 그런 예술품을 전시한 미술 관이다. 건축물, 예술품, 그 안의 생명체들까지.
모두가 조화돼 아름다움을 구축 하는 종합 예술!
게다가 던전 마스터는 대장장이 의 상위 호환 직업이었고 포 클래 스로 한계에 도달한 요섭이 파이 브 클래스 마스터를 노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아름다워.”
요섭은 작업대 위에 올라온 홀 로그램을 보며 감탄했다. 33층으 로 이뤄진 탑이다. 초급이라 간단 한 설계 도면을 가졌고 난이도도 최대 원 클래스 마스터로 낮은 편 이었다.
“잘 만들어야…… 회귀 정도가 나오겠군.”
초보 세트로 그 정도면 다행인 거다.
요섭은 설계를 시작했다. 기본 설계 도면에서 재료를 바꾸고 동 력이 되는 마력석을 디자인한다.
탑형 던전이다.
1층은 가장 약한 맛보기 몬스 터를 넣고 위로 올라갈수록 더 강 한 몬스터. 그리고 함정을 추가한 다.
이 정도만 해도 일반급 던전은 나온다.
하지만 요섭이 그 정도에 만족 할 리 없었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해. 탑형 던전이라고 꼭 원기둥일 필요는 없잖아? 사각형으로 만들자. 아니, 하나의 이야기의 책이 되는 거야. 그리고 안쪽은 인간의 한계를 최 대한으로 뽑아낼 수 있는 함정으 로 도배한다. 그래, 몬스터를 다 빼. 그리고 한 층의 마지막에만 보스급 몬스터를 넣는 거다.”
요섭은 눈을 빛냈다.
대략적인 설계는 끝냈다.
전체적인 틀을 제작해야 한다. 세트에 있는 자동 조립을 사용해 도 된다. 하지만 장인인 요섭이 그걸 그대로 쓸 일은 없었다.
“엔트 족의 껍질은 너무 낭비 고. 이토석이나 만년한철도 낭비 야. 그래, 남아도는 아다만티움을 사용하자.”
요섭은 오랜만에 최상급 화로에 불을 붙였다.
새빨갛게 달군 아다만티움을 모 루에 올리고 내려쳤다.
탕! 탕! 탕!
한 번 내려칠 때마다 아다만티 움은 변했다. 접히고 또 접히고. 사각형이 됐을 때 다시 달궜다. 새빨갛게 변하자 바로 꺼내 식힌
동시에 설계한 대로 1층을 만 들기 시작했다.
통짜 아다만티움이다. 아주 얇 은 실로 뽑아내기도 하고 주먹만 한 공을 만들어 배치하기도 했다. 1층, 2층, 3층. 하나씩 완성해 나 갔다.
그리고 Im 남짓한 33층의 탑 이 만들어졌을 때.
-초급 탑형 던전을 완성했습니 다.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제작했
습니다.
-‘희귀’ 등급으로 산정됩니다.
-완성하시 겠습니까?
“아니. 아직이다.”
요섭은 세트에서 떠오른 문구를 무시했다.
아직 멀었다.
겉면에 조각칼과 망치를 댔다.
하나의 이야기를 쓴다.
작은 영웅이 태어난다. 다른 형 제에 비해 너무 약한 몸을 타고났 다. 하지만 역경과 고난을 이겨 내 형제를 짓밟고 올라간다.
결국, 탑 꼭대기에 다다른 작은 영웅은 소원을 빈다.
거기서 끝이었다. 그 소원은 탑 꼭대기에 닿은 이의 몫이라는 거 다.
“ 좋아.”
아름다웠다.
Im의 탑. 처음부터 끝까지 직 접 만들었다.
겉면에 새겨진 하나의 스토리는 탑 전체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빈 곳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
들어 졌다.
물론, 이걸로 끝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끝내겠느냐는 문구 를 무시하고 연우에게로 달려갔 다. 마법적 조언을 받기 위해서였 다.
“잘 만들었네.”
연우가 요섭의 작품을 품평했 다.
“밸런스도 잘 뽑았고 떨어지는 아이템이나 장비도 적당해. 휴식 공간도…… 통증을 증폭? 이런 것 도 할 줄 아는군.”
“역경과 고난을 강조하기 위함 이죠.”
“마법진이 너무 빈약해. 이건 직접 보고 새긴 거지?”
“네, 제가 그쪽 지식이 너무 없 어서. 이자젤 님에게 간단한 도면 만 받았습니다.”
연우는 탑 겉면에 그림으로 보 이는 마법진을 수정했다. 너무 두 꺼운 선은 얇게. 너무 얇은 건 두 껍게. 끊어진 부분을 탄탄하게 잇 고 중첩돼 방전이 일어나는 곳도 나눴다.
“이 정도면 될 거야. 동력원을 뭐로 쓰게?”
“이토석을 쓸까 생각 중입니다.”
“악의?”
“네, 이자젤 님이 그러는데 악 의도 잘만 쓰면 괜찮다고……
“음. 좋지. 전염성을 제거하고 ‘파괴’ 성향을 빼면 꽤 괜찮은 ‘광 기(狂氣)’와 ‘원한’ 강조돼 강함을 완성하지.”
연우는 순간 괜찮은 생각이 들 었다.
“이거 완성해서 어디에 둘 생각 이야?”
“네? 아, 그건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악의의 대륙에 넣고 직접 사용 해 보자. 던전은 원래 만든 후에 직접 피드백을 받는 게 좋아. 그 렇지 않으면 버그를 찾기 힘들거 드 ”
“좋습니다. 저도 제 작품이 직 접 사용되는 게 좋으니까요.”
“좋아. 그럼 마무리까지 잘해 봐.”
“알겠습니다.”
요섭은 탑을 들고 허겁지겁 대 장간으로 달려갔다. 받은 피드백 을 적용하기 위해서다.
“꽤 잘 만들었네.”
연우는 요섭의 작품을 머릿속에 서 떠올렸다.
초급 던전 제작 세트는 보상 아 이템이나 장비, 보스 몬스터까지 포함한 제작 킷이다.
대충 설계하고 재료만 넣어도 완성된다.
그래서 요섭처럼 처음부터 끝까 지 제작하는 경우는 드물다. 거기 에 10단계 마법사의 마법진이나 연우의 조언까지. 게다가 통짜 아 다만티움에 이토석까지 사용한 게 아닌가.
“한 전설급은 나오겠는데.”
그래도 한계는 원 클래스 마스 터.
등급에 따라 달라지는 건, 보상 과 몬스터의 디테일. 그리고 유저 가 얻는 성장치. 즉, 경험이다.
‘전설급 초급 던전이라.’
아스가르드였으면 꽤 많은 돈이 됐을 거다. 현질로 좋은 초급 던 전을 사서 초반 급성장을 원하는 플레이어는 언제든지 많았으니까. 테이밍한 몬스터나 고용 NPC를 성장시키는 용도로도 적합했다.
우우웅. 우우웅.
그때 오랫동안 울리지 않았던 단체 채팅방에 글이 올라왔다.
-상수 : 우리 계 360만 원 모 였어! 자그마치 3년이야!
-동혁 : 벌써? 우리 한 번 가 야 하는데. 매일 바쁘던 연우가 귀농했으니 시간 되는 거 아니야?
? 정석 : 경준이 형님. 1 년치 미 납이네요. 일시납 하십쇼.
? 경준 : 뭐? 1 년치면 24만 원! 못해. 못 내!
-상수 : 좋아. 그럼 경준이 빼 고 가자. 아, 환불은 없는 거 알 지?
? 경준 : 악! 안 돼! 갈 거야! 반드시 간다! 이 양아치들. 빠진 다니까 너무 환영하는 거 아니야?
그랬다.
대학생이었을 때부터 하던 여행 계 ‘독수리 오형제’였다.
다들 취직하면서 자동이체만 했 던 모임.
연우는 미소를 짓곤 자판을 두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