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편_ 악의(惡意)(2)
끄아아악!
검은 연기에 닿은 사람은 비쩍 말라비틀어졌다. 눈은 하얗게 돌 아갔고 마력은 사라진다.
“비상이다! 당장 비상령 소집한 다!”
연우와 대화하던 리쿠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마법사인 건지 사방에 실드를 펼쳤다. 하지만 검 은 연기는 실드로 막지 못했다.
“이, 이게 뭐지?”
리쿠가 당황한다. 연우도 고개 를 갸웃했다. 물리적으로 막을 수 없다. 마법도 아닌 이상한 힘이다.
그때, 연우는 아까 지나쳤던 질 풍의 렌이라는 이가 생각났다. 분 명 같은 힘이다.
“이자젤, 여기 좀 도와줘.”
“알았어. 여긴 내게 맡겨.”
“후름하고 리젤은 따라오고.”
“오케이.”
“알겠습니다.”
행동은 빨랐다. 이자젤은 실드 가 먹히지 않는 걸 본 후다. 공간 자체를 차단하는 마법을 사용했고 급격히 퍼지는 검은 연기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 족한 건지 스멀스멀 넘어오기 시 작했다.
“이게 도대체 뭐지?”
사방에 사람들이 도망가고 처참 하게 죽는다.
뒤쪽에서 정예화된 병력이 달려 온다. 약한 사용자와 일반 사람을 탈출시키고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 해 모인 거다.
하지만 이자젤이다.
마법에 있어선 연우도 한 수 접 어 줘야 하는 실력자.
“[가상공간], [분리], [이동].”
이자젤의 입에서 수십 개의 9 단계, 10단계 마법이 터져 나오며 주변을 덮쳤다. 저 힘을 완전히 파악하기 전까지 소멸시킬 순 없 겠지만, 막는 건 충분하다.
“이 더러운 것들은 도대체 뭐 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팍 상 하는 기운이었다.
연우는 후름과 리젤을 데려왔 다.
역시나 이 검은 연기의 발원지 는 연우가 이상함을 느꼈던 그 방 이었다. 머뭇거릴 것도 없다. 연 우는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화악!
진한 검은 연기.
더럽고 추악한 악의들이 연우를
덮쳤다.
“어디서 감히!”
연우가 손을 젓자 검은 연기는 물러났다. 아무리 앞뒤 없는 악의 덩어리라도 격의 차이는 컸다.
안쪽 침대 위엔 질풍의 렌이라 는 이름으로 추정되는 한 남자가 비쩍 말라 뼈만 남은 상태로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기직.
목이 비틀어졌다. 아니, 삐딱하 게 세워진 거다.
횐 눈동자는 연우를 바라봤다.
“넌 누구냐.”
대답이 있을까? 혹시나 하는 마 음에 물었다.
그러자 남녀가 섞인 거친 쇳소 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고막을 고 문하는 기분이었다.
-먹는다. 다 먹는다.
동시에 검은 연기가 후름과 리 젤에게 달라붙었다. 후름은 정령 의 힘으로 밀어냈다. 리젤은 조금 힘겨워했다.
‘마기도 아닌 거군.’
둘을 데려온 이유는 어떤 힘인 지 알아보기 위한 거였다.
-내 거다. 다 먹는다. 끄르륵.
목을 쥐어짜 쇳소리를 울리자 검은 연기가 더 진해졌다.
연우는 손을 저어 후름과 리젤 을 보호했다. 마력이나 마기도 아 니다. 정령의 힘엔 밀려났지만, 정령은 신격까지 밀어내는 힘이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연우의 신격.
역시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놀랍네. 수준에 상관없 이 다른 힘을 밀어내는 힘이라 니.”
악의 (惡意).
신격과는 반대되는 어둡고 더러 운 힘이다.
연우는 헤맨을 불렀다.
“네, 주인님.”
“신격이나 정령의 힘을 담을 수 있는 게 있나?”
괜히 아무거나 사용했다가 오염 돼 버릴 거다. 므깃도나 아공간도 위험했다.
“음, 쓸 만한 게 있을 겁니다.”
헤맨이 가져온 물건은 연우도 오랜만에 본 물건이었다.
[세르겐의 명화(얼티밋)]
설명 : 대륙 비운의 화가 세르 겐의 명화. 그가 살아생전에 느꼈 던 모든 감정이 고스란히 표현돼 있다. 자식들의 죽음, 후손의 결 핍, 향수, 적대, 경멸, 고독, 소외 감, 양심의 가책, 육체적 고통 등. 비운이라 불릴 만한 세르겐의 정 신 그 자체였다.
그림이다.
하지만 설명과는 다르게 누런 양피지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텅 빈 여백뿐이었다.
“역시 센스가 좋아.”
아스가르드에서 그림은 봉인과 소환에 쓰인다. 스크롤은 마법을 저장 후 발현하는 것, 계약서는 규칙을 담고 발휘하는 것과 비슷 한 원리라고 보면 된다.
이건 대륙급 화가. 즉, 얼티밋 등급의 아이템이다.
연우는 별말 없이 그림을 들고 이미 악의에 가득 차 시체처럼 보 이는 질풍의 렌을 향했다.
“봉인!”
동시에 밝은 빛이 검은 연기와 질풍의 렌을 삼켜 버렸다. 순식간 이었고 이미 그 자리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꽤 괜찮은데?”
그 모든 게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세르겐의 화려한 색감과 붓을 짓누르는 거친 화풍 이 그대로 드러난 그림이었다.
“그러게, 역시 그림도 꽤 예뻐.”
후름이 급 관심을 보였다. 그러 고 보니 후름의 취미 중에선 그림 을 그리는 것도 있었다.
연우는 완벽하게 사라진 검은 연기를 확인하고 이자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엔 많은 사상자 가 보였지만, 이자젤이나 간부들 은 멀쩡했다.
“다 괜찮은 거 맞지?”
“웅, 넌 좀 지친 것 같다?”
“아니거든! 그냥 조금 짜증 났 을 뿐이야.”
이자젤의 얼굴은 하얗게 죽어 있었다. 갑작스럽게 큰 마력이 뭉 텅이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자젤이 아공간에서 포 션 하나를 꺼내 먹더니 멀쩡하게 돌아왔다. 하긴, 이자젤도 전투광 이었다. 포션이나 각종 소모품은 넘칠 정도로 있다.
“아무래도 몬스터 판매하는 건 조금 미뤄야겠지?”
이자젤이 아쉬운 건 그거인 것 같았다.
“어차피 그 돈 쓰는 건 꽤 걸릴 걸? 쇼핑하면서 천천히 하면 돼. 그것보단……
연우의 고개가 하늘로 향했다.
아까까지는 긴가민가했다. 하지 만 방금 확실하게 느꼈다.
세르겐의 그림에 넣은 건 어쩌 다 흘러나온 찌꺼기였다. 그보다 훨씬 크고 더러운 악의가 꿈틀대 는 게 느껴졌다.
“리쿠, 일본 지부 협회 통제실 은 어디죠?”
“그, 그게……
“일단, 안내해요. 상황이 상당히 안 좋게 돌아가니까.”
연우가 위기감을 느낀다거나 긴 장한다는 건 아니다. 이 악의들이 생각보다 크고 많다고 해도 연우 에게 해가 될 건 없다.
하지만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죽게 둘 순 없었 다. 물론, 그렇다고 모조리 잡아 들이는 것처럼 무식하게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사람은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니까.
적당하게 조절하고 적당한 대가 를 받을 거다.
‘적당히, 예방접종처럼.’
연우는 리쿠 간부와 이시연에게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들은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연우의 말이 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경매장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 어진 곳에 도착했다. 한국의 협회 본사처럼 높은 건물은 아니었지 만, 옆으론 어마어마하게 넓고 큰 건물이었다.
“이곳 8층입니다. 하지만 출입 은 철저하게 통제돼 있습니다. 저 도 7층까지만 출입할 수 있습니 다. 들어가려면 협회장님의 보안 카드가……
연우는 이진철 협회장이 줬던 블랙 카드를 꺼냈다.
리쿠는 놀란 눈으로 카드와 연 우를 번갈아 봤다.
“이 자격을 가지고 계셨군요.”
그러면서 슬쩍 웃는 이시연을 흘깃 쳐다봤다. 이 카드 때문에 이시연이라는 한국 지부 사용자협 회의 직원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다.
“그럼 걱정 없습니다. 바로 올 라가겠습니다.”
리쿠는 길고 넓은 건물에서 불 쑥 솟아 있는 중앙을 바라봤다. 저곳만 8층으로 돼 있는 거다.
검은 정장을 입은 직원들이 우 르르 나와 정문과 로비를 점령했 다. 동시에 리쿠와 연우 그리고 일행이 이동하는 길을 철저하게 마크했다.
엘리베이터에 도착한 리쿠는 연 우를 바라봤다.
“이곳에 카드 한 번만 대 주십 시오.”
연우는 말없이 따랐다.
그리고 연우가 이곳까지 온 이 유.
세계사용자협회와 일본 정보부 의 위성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띵.
도착한 충엔 수십 명의 직원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정면엔 수십 개의 모니터와 레 이더가 돌아가고, 일본 전역과 지 구 곳곳의 영상이 떠 있었다.
“리, 리쿠 님! 이곳에 외부인 이……
“블랙 카드. 한국에서 오신 분 이다.”
긴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 만으로 직원 전체가 알아듣고 몸 을 벌떡 일으켰다.
“연우, 저것 봐.”
이자젤이 모니터 하나를 가리켰 다.
빼곡한 숲. 그 안에서 검은 연 기가 차고 있었다. 이들도 저 현 상에 대해 분석 중인 건지, 같은 장소를 각기 다른 방향에서 보는 영상이 다섯 개나 됐다.
“저 기였군.”
연우가 자연스럽게 중앙에 앉았 다. 리쿠가 손으로 이것저것 지시 를 하자 직원 몇 명이 보고서를 가져왔다.
다이센오키 국립공원.
그 안에 들어간 길드와 주변 몬 스터 분포도.
그리고 검은 연기를 분석한 에 너지 패턴 그래프였다.
“7단계, 8단계 필드. 9단계로 상승한 던전. 그리고 히로시 길드 의 행방불명. 그때 질풍의 렌? 그 사람도 이곳에 왔다가 그렇게 된 거죠?”
“어, 어떻게……. 맞습니다.”
보고서엔 그런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헤맨.”
“네, 주인님.”
헤맨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번에도 또 장난인지 기세를 모두 숨기지 않았다. 통제실 전체 를 휩쓸고 지나간 압도적인 기세 에 직원들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다행히 적의가 없는 기세라 오 금이 덜덜 떨리는 것 정도로 그쳤 다. 추가로 연우와 일행을 대하는 모습도 달라질 거고.
“저기 분신 하나 보내서 파악 좀 해 봐. 상당히 독한 놈들 같으 니까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헤맨은 그 자리에서 분신을 만 들어 워프했다. 본신은 아공간으 로 되돌아갔다. 아공간 안에서 알 아서 준비할 거다.
“힝, 쇼핑은 좀 미뤄야겠네.”
이자젤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적이 꽤 강하다고 판단하는 거다.
“이참에 돈이나 좀 벌면 되지.”
“ 응?”
“돈 벌자고. 이거 끝내고 잔뜩 쇼핑하려면.”
연우는 그렇게 웃었다.
그때, 헤맨이 돌아왔다. 정확히 말하면 분신이었다.
“왔습니다.”
“어떻게 됐어?”
“상당히 질이 안 좋습니다. 게 다가 그냥 힘으로만 밀어붙일 수 있는 게 아니라 까다롭네요. 물론, 주인님이 라면……
헤맨은 잠시 쉬면서 주변 눈치 를 봤다. 연우라면 저 정도는 눈 깜빡하는 사이에 모두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연우는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헤맨은 연우의 생각을 잘 아는 거다.
“성향은 어때. 저기서 얼마나 퍼질까?”
“이미 저쪽 숲은 40% 이상 점 령된 상태입니다. 시간은 점점 빨 라질 거고. 한 시간 정도면 숲을 벗어나 도시에 닿을 겁니다.”
“저 검은 연기엔 뭐가 들었지?”
악의, 마법, 현상 등을 묻는 거 다.
일부러 이런 내용은 크게 말한 다. 리쿠는 물론이고 다른 직원들 까지 선명하게 알고 있으라는 거 다.
“지독한 악의. 어두운 감정들이 모여 만든 힘입니다. 강렬한 욕구, 쾌락, 고통, 질병. 온갖 더러운 것 들이 다 모여 이뤄진 겁니다.”
“안쪽은 들어가 봤어?”
연우는 그렇게 물으면서 검은 연기가 나오는 진원지로 보이는 절벽을 보여 주는 영상을 턱짓했
“네, 어차피 분신이라 들어갔는 데 안엔 저런 악의들이 넘쳐났습 니다. 마치, 지저 세계처럼요.”
“하나의 세상?”
“네, 거의 대륙이었습니다. 그리 고…… 위험한 놈들도 많았습니 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연우가 마음먹고 저 공간 자체 를 삼키려면 그럴 수 있다. 하지 만 그러진 않을 거다. 저 표정은 연우가 일대일로 상대했을 때, 연 우에게 상처를 줄 만한 적도 있다
는 거다.
아무리 강한 검사라도 마법 저 항이 없으면 작은 마법에 당할 수 있는 거고, 아무리 강한 마법사라 도 물리 저항이 없으면 칼에 찔려 죽는 거다.
물론 공격을 피하지 못했을 때 의 이야기긴 했다.
연우는 전화를 들었다. 연우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리쿠를 포함 한 모든 직원의 입은 크게 벌어져 닫히지 않았다.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전화하는 대상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