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편_ 일본 맛집 여행기(1)
“끄응.”
필리아는 눈을 떴다. 폭신한 침 대 위였다. 하얗고 보드라웠다. 공기에선 마른 나무 냄새가 났다.
분명 어제 어디론가 향했던 기 억이 있다.
맞다. 이진철 협회장에게 추천 을 받고 면접을 보러 갔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렇게 도착했던 곳 이…….
“흐억!”
필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 다.
머리가 핑 돌았는데 금방 회복 됐다.
“조심해요.”
필리아는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 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면접 관인 연우라는 남자가 있었다. 분 명 마지막 기억에 그의 얼굴 이…….
“도, 도대체 여긴 어디죠? 그리 고 당신은 누구인 거죠? 드래곤 로드라도 그런 힘을 가질 순 없어 요.”
“인간이에요. 일어나서 한 잔 마셔요.”
세계수 잎으로 내린 차다. 후름 이 직접 만든 거지만, 생색은 연 우가 낸다.
“…… 진심이군요.”
필리아는 차를 홀짝 마시면서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보이는 거 다. 그때 보여 줬던 힘. 그리고 그의 눈에 담긴 진실.
차에 혀를 댄 순간.
화악.
향긋한 차의 향이 퍼졌다.
“이, 이건…… 100년 이하의 묘 목에서 채취한 세계수 잎이군요. 거기에 최소 1,000년 된 만드라 고 잔뿌리 가루와…… 이건 뭐죠? 달달하면서 시큼한 느낌의……
연우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 었다.
“천상 요리사군요. 아니, 미식가 라고 해야 할까?”
“요리사의 기본은 맛을 느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죠. 아, 그것보 다 이것 좀 알려 줄 순 없을까요? 맛은 선명하게 느껴지는데 도대체 뭔지 모르겠네요.”
“무화과예요. 식초를 넣은 무화 과 잼을 거름종이에 살짝 바른 거 죠.”
차의 효과 때문인지 필리아의 정신이 맑아진 것 같았다. 아니면 요리에 대한 애정 덕분일 수도.
“…… 무화과요? 제가 먹어 본 적 없는 맛인데. 지구에만 있는 것 같군요. 대단하네요. 이 재료 를 모으는 것만 해도 몇 년은 소 비해야 할 텐데. 또 이걸 차로 만 들 생각을 하다니……
“이곳엔 그런 게 혼하니까요.”
연우는 이진철에게 필리아에 대 한 말을 들었다. 돈보다는 요리를 향한 애정을 더 보라고. 그러면 그녀를 영입할 수 있을 거라 했 다.
그 말이 이해가 됐다.
그녀는 드래곤이었으니까. 그리 고 드래곤의 마음을 갖기 위해서 는 웬만한 요리 재료로는 안 된다 는 것도 안다. 게다가 양식과 한 식에 조예가 깊다.
연우는 아공간에서 무화과. 아 니, 선악과를 꺼냈다.
겉보기엔 평범한 무화과랑 다를 게 없다. 훨씬 신선해 보이는 것 말고는 말이다. 하지만 드래곤 정 도 되는 무력 수준과 감각을 지니 고 있다면 속을 파악하는 건 어려 운 게 아닐 거다.
“이, 이건???????”
필리아의 파란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이 농장에선 혼하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구할 수 없는 게 이거니 까. 게다가 그 효과는 또 어떠한 가. 신력이라는 게 느껴지고 안에 담긴 순수한 마력은 웬만한 마력 석 못지않다.
“…… 여긴…… 천국인 건가요?”
필리아의 눈은 진심이었다.
“뭐, 요리사에겐 그럴 수도 있 죠.”
연우는 펜션을 나왔다.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 다. 정리되면 식당으로 나오라는 말도 덧붙인 후였다.
식당으로 가자 이자젤과 수이니 가 대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난 인수인계는 포기해야 할까.”
“그래, 잘 생각했어.”
연우가 옆에 앉으며 끼어들었 다.
“수이니는 수련 때문이지만, 넌 기업 쇼핑이라며. 헤맨 분신 하나 붙여 줄 테니까 워프로 다녀. 저 녁엔 와서 펍 운영하고.”
“…… 그럴까.”
바텐더 지원은 없었다.
므깃도에서 온 이들은 많았지 만, 그들 중에 술에 대해 아는 이 들도 없었고 그저 연우 곁에 있고 싶다는 각 구역 지배자들에 의한 명이었다.
“아예 혜영한테 보수를 주고 시
켜도 되고.”
“혜영? 하긴, 요즘 바깥일에 관 심이 많던데.”
“그래, 뭐, 고아원하고 복지 사 업 준비한다며. 다른 기업들 몇 개 사서 제대로 해 보라고 하지.”
“그것도 나쁘진 않겠는데……
이자젤은 혜영과 통화하기 위해 자리를 이동했다. 그러자 수이니 가 입을 열었다.
“필리아는 어때?”
“뭐, 나쁘지는 않은 듯. 적응도 잘하고 있고 확실히 관심 있는 표 정이었지.”
“거기에 주방까지 보면 환장할 걸?”
“그러겠지. 어디서도 볼 수 없 는 재료들이 널렸으니까. 또, 원 하면 구해다 줄 거고.”
문제는 일식 요리사였다.
지원자는 없었고 어떻게 뽑을 방법도 없었다. 그렇다고 일식을 포기하기엔 연우가 일식을 너무 좋아했다. 특히, 안주로는 일식만 한 게 없다.
연우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본 여행을 가자!
“일본? 왜?”
“왜긴, 일식 장인 스카웃하러!”
물론, 연우는 맛집 여행이 주요 목적이긴 했다.
그렇게 일본 여행이 결정됐다.
여행 인원은 연우, 이자젤, 후 름, 리젤까지 총 4명이었다. 수이 니는 정신을 차린 필리아에게 인 수인계를 하기 위해서 농장에 남 았고 다른 이들도 바쁘다며 빠졌 다.
연우도 인원이 많은 것보다는 이 정도가 적당했다.
“와, 여기가 인천공항이야?”
“응. 크지?”
“우리가 전에 탔던 곳은 공항이 아닌 건가?”
미국에 갔을 때를 말하는 거다. 그때는 일이 먼저였으니 전용기를 이용해 갔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 행이다. 이런 것도 하나의 여행이 었고 모두 즐기고 싶었다.
롤스로이스 블랙 던 배지는 어 디를 가든 시선을 끌었다.
또, 그곳에 타 있는 인원도 시 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협회에서 나온 이시연이라고 합니다. 오늘 모시 게 돼 영광입니다.”
침착해 보였지만, 입꼬리가 떨 리는 게 보인다.
그럴 만도 했다. 연우를 제외하 고라도 나머지 외모는 절대로 그 냥 넘어갈 정도가 아니니까.
“네, 이진철 협회장이 보냈나
요?”
“물론, 따로 연락을 주시긴 했 습니다. 하지만 블랙 카드를 소유 한 분은 어떤 곳을 가도 국빈 대 접을 받습니다. 항공사에 예약하 면 일등석으로 자동 업그레이드되 고 모든 편의를 위한 직원이 붙습 니다.”
“그렇군요. 그럼 오늘 잘 부탁 합니다.”
연우와 일행이 차에서 내렸다.
주변의 모든 시선이 쏠렸다. 마 치, 유명한 연예인이 온 듯 말이 다. 하지만 쉽게 다가올 순 없었 다. 그들이 가진 위압감은 일반적 인 범주를 벗어났으니까.
이시연이라는 직원이 손을 슬쩍 들더니 발렛 직원이 달려와 키를 받았고 두 명의 지원이 가는 길에 섰다.
“어디부터 가시겠습니까?”
“티켓팅은요?”
“저회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면세점을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그곳으로 모실까요?”
그 말에 이자젤이 귀를 쫑긋 세 웠다. 후름이나 리젤도 이자젤만 큼은 아니었지만, 관심이 있는 모 양이었다.
게다가 인천공항의 면세점은 세 계에서도 알아줄 만큼 규모가 있 는 곳이다.
“좋죠. 갑시다.”
이시연이라는 직원이 연우 옆으 로 섰고 뒤로는 세 일행이 따라왔 다. 문제는 그 뒤로 5명의 지원이 퍼져 따라오기 시작했다는 거다.
당연히 시선을 확 끌었다.
‘뭐지? 유명한 사람인가?’
‘외모 장난 아니다. 배우들인 가? 가장 앞에 남자가 가장 별로 긴 한데, 그래도 잘생겼네.’
‘와, 저게 사람이야? 진짜 여신 인데?’
‘근데 아우라 쩐다. 어떻게 저 런 분위기가 나오지? 근처에 다가 가지도 못하겠어.’
감각이 좋은 일행은 이곳을 바 라보는 사람들의 중얼거림까지 들 렸다. 하지만 이런 관심이야 익숙 해질 대로 익숙해진 후였다.
도착한 면세점에서 이자젤은 또 큰손을 보여 줬다. 연우도 마찬가 지긴 했다. 직원을 줄줄이 달고 손으로 가리키면 담는다.
리젤이나 후름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재미에 맛 들리면 헤어 나 올 수 없다.
한참 쇼핑을 끝내고 일등석 대 기 라운지에서 간단하게 밥을 먹 은 일행은 탑승 시간에 맞춰 비행 기에 올라탔다.
“오오, 신기해!”
비행기를 처음 탄 후름과 리젤 이 신기해 했다.
“훗, 뭘 이런 게 신기하다고.”
“신기하잖아! 마력을 이렇게 이 용하다니! 완전 비효율적이야! 봐, 마력석에서 마력을 뽑아내서 70%가 마법진으로 가고 30%가 전기가 되네.”
“하긴, 그렇긴 해. 근데 마법진 수준을 보니 이해도 되네. 이 기 계 전체를 마법진으로 돌리려면 웬만한 수준으론 안 되지.”
그래도 한 번 타 본 적 있다는 이자젤은 콧대를 세우며 잘난 척 을 했다. 연우는 그 모습에 어이 가 없었다. 하지만 별말 하지 않 았다.
연우는 창밖을 보다가 잠이 들 었다.
일본 간사이 공항에 도착한 연 우와 일행이 당황할 일은 전혀 없 었다.
“원래 이런 건가요?”
“블랙 카드. 거기에 이진철 협 회장님의 특별 지시가 있었으니까 요. 당연히 아무에게나 이러진 않 습니다.”
연우가 공항 로비에서 만난 이 시연 직원과의 대화였다. 여기까
지 따라올 줄은 몰랐다. 비행기를 탑승할 때, 그녀는 연우에게 인사 를 하고 사라졌으니까.
다시 뵙겠다는 인사말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말이다.
“뭐, 우리야 편하죠.”
“어딜 먼저 가시겠습니까?”
마침 공항 앞에 리무진 한 대가 도착해 있었다.
가장 먼저 출발한 곳은 역시나 도톤보리였다. 난바로 이어지는 에비스바시에서 동쪽의 닛폰바시 까지. 화려한 서민의 번화가다.
높은 건물이 지나가고 횡단보도 엔 일본 사람과 관광객들이 오갔 다. 자전거도 꽤 보였고 검은 택 시들도 자주 지나다녔다.
그렇게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유명한 맛집이라기보단 이시연이 직접 추천한 곳이었다.
“직접 조사를 거쳐 선별한 곳입 니다. 마음에 드실 겁니다.”
초밥과 회를 주로 팔고 생선구 이도 하는 집이었다. 일행이 들어 가자 직원들이 “이랏샤이마세”라 고 외쳤다.
자리에 앉아 주문했다.
‘오늘의 초밥 세트’, ‘참치 회 정식’, ‘달콤한 달걀초밥’, ‘메밀소 바 오마카세’ 등을 시켰다.
하나씩 나오기 시작한 음식은 정갈했다. 연우는 가장 먼저 흰살 생선 초밥을 입에 넣었다.
쫀득한 살, 오물오물 씹히는 밥 알, 은은하게 올라오는 와사비의 향과 단 초. 모든 게 완벽했다.
“와, 여기 진짠데?”
“그러니까. 메밀도 장난 아니야. 와사비 향도 좋고.”
“달걀초밥도 진짜 케이크 같아 요. 분명 단맛이 강한데 물리지도 않고. 특히, 이 밥이 정말 좋은데 요?”
연우는 하나씩 맛을 음미했다.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참치 회도 써는 기술 자체가 달 랐다. 많은 사람은 회라는 게 써 는 기술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 한다.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써는 기술, 냉동과 해동, 숙성, 먹는 시간.
회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이 모든 게 한 입의 맛을 좌지우지한 다. 이 정갈하고 강렬한 맛은 완 벽했다.
“사케 한잔 할래?”
연우는 사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약하고 잘 취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기름이 많은 참치 나 쫀득한 숙성 회처럼 은은한 맛 을 즐길 때는 사케가 좋다.
연우는 모두 잊고 음식을 즐겼 다.
일본 다이센오키 국립공원.
아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깊숙한 곳. 몇 개의 산을 넘어 겉 에선 보이지 않는 작은 절벽들 사 이. 그 안엔 거대한 공동(空洞)이 있었다.
인간은 바다를 제외한 지구의 모든 곳에 손이 닿았다고 생각하 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아직 미 지의 지역은 많았고 50년 전 몬 스터 웨이브가 터지면서 그런 곳 은 완벽하게 막혔다.
그리고 이곳.
지름만 10m가 넘어가는 고목들 이 무성하고 깊은 호수와 천장에 붙은 발광충(發光蟲). 각종 벌레 몬스터가 서식하는 곳이었다.
또 다른 하늘과 땅을 가진 이 생태계에 빛 한 줄기가 떨어졌다.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그 빛은 작 은 박동을 만들어 냈다.
두근. 두근.
빛과 생명으로 가득했던 그곳은 ‘악의’라는 검은 오류 덩어리로 차 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