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편. 무명 세계(無名世
界)(1)
태평양이라는 깊은 바다엔 수많 은 생명체가 살고 있다. 어찌나 넓고 많은지, 인간이 아는 수는 고작 3% 정도도 되지 않는다. 특 히, 몬스터라는 게 생겨나면서 바 닷속 생태계는 혼돈과 성장을 겪 었고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거듭 났다.
그 넓은 바다 중앙.
그리고 가장 깊은 곳.
그곳엔 아무도 알지 못한 세상 이 있었다.
[무명 세계(無名世界)].
말 그대로 이름이 없는 세상이 다.
강한 힘만이 인정받는 곳. 지구 의 모든 몬스터가 모여 더 큰 힘 을 얻기 위해 싸우는 곳.
본능에 의해, 욕심에 의해, 이 성에 의해.
의도가 있든, 의도치 않았든.
바다의 모든 강자가 모이는 곳.
그게 바로 이 ‘무명 세계’였다.
“크륵, 누군가 온다. 특성 하나 를 마스터한 게 느껴져.”
“특성 하나? 그걸 왜 신경 쓰 지? 겨우 작은 해안가에서 어깨 피고 다니던 놈이겠지.”
“문제는 그게 인간이라는 거다.”
lm의 키를 가지고 미간에 제3 의 눈을 가진 무명 세계의 현자. 유려한 곡선의 몸을 가진 돌핀 족 ‘슈미르’가 손끝을 떨며 말했다.
앞에 서 있던 화이트 샤크 족의 전사. ‘판테’.
철저하게 힘으로 계급이 나뉘는 이곳에서 3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2급수까지 올라간 천재였다.
“…… 그럴 리 없다. 인간은 여 길 오지 못해.”
“게다가 이종족도 있는 것 같 아. 더 큰 문제는 힘이 파악되지 가 않는 거고.”
“그게 무슨 말이냐! 네가 경지 를 보지 못한다는 건……
“그래, 맞다. 두 개의 특성을 마 스터한 나보다 강하다거나, 아예 평범한 보통 인간이라는 거겠지.”
“크아! 내가 막겠다. 감히 인간 이 무명 세계에 발을 들이다니.’’
슈미르가 판테를 잡아 봤지만, 들을 리 없었다. 백상아리 유전자 를 그대로 이어받아 흥분하면 눈 이 하얗게 돌기 때문이다.
“ 설마.”
인간 따위가 두 개의 특성을 마 스터한 자신보다 강할 거라고 생 각되진 않았다. 이 세계의 99.9% 의 존재는 그들에게 전혀 위기감 을 느낄 수 없을 거다.
슈미르는 축복받은 특성인 ‘제3 의 눈’이 있고 다른 존재는, 보통 해양 몬스터에서 각성한 ‘수인 족’ 에 비해 한없이 인간다운 성향이 있기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 다.
보통의 수인 족은 호전적이고 자신의 강함을 과신한다. 죽음에 두려움이 없고 약한 게 죄라고 생 각하는 종족이다.
“더 중요한 건 1급수에서 인간 이 사는 지상계를 습격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거지.”
만약 인간이 살아 나가서 그 사 실을 알린다면?
그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한 다.
구우웅! 구우웅!
웨일의 숨구멍이 열린다.
이 세계의 땅이 열리는 거다. 중력이 반대로 작용하는 이곳에서 땅이 열린다는 건, 하늘이 열린다 는 거다.
구우우웅!
마지막 숨이 삼켜지고.
수천, 수만 개체의 어류 몬스터 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 안엔 수인 족으로 각성한 존재도 있고 이성이 없는 몬스터도 있다.
“또 한바탕 하겠군.”
몇 개월에 한 번 있는 이 호흡 을 타고 온 존재들은 서로 싸우 고, 서로 죽이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것이다.
약하다면 죽는 게 당연한 거고.
강하다면 승리하고 모든 걸 취 한다.
그렇게 강해지는 거다.
‘바빠지겠군.’
슈미르는 갸웃했다.
뭔가 찝찝했다. 어딘가 가서 무 언가 보고해야 할 것 같았다. 불 안하고 두려웠던 감정이 어느 한 구석으로 숨어 버린 느낌. 하지만 수면 깊이 가라앉은 것처럼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이, 슈미르. 신입들 왔는데 한바탕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판테. 이번엔 1급수로 진출해 보자고.”
방금 나갔던 판테가 다시 들어 와 인사하고 있었다.
수인 족이라지만, 물고기는 물 고기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 만 헤맨이 있고 이자젤이 있다.
팟!
강렬한 조명이 주변을 밝혔다.
“헤맨, 어디지?”
“거대한 무언가였는데, 땅이었 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 정도로 거대한 게 있었나?”
아까 1km가 넘는 생물체도 거 대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건 상 상 이상이다. 헤맨이 인지하지도 못했던 거다.
“조금 들어가 볼까요?”
“그래, 들어온 김에 구경하고 가자.”
연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 다. 위기감 따위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때였다.
후우우웅!
엄청난 바닷물과 강력한 바람이 마법 잠수함을 삼키기 시작했다.
“버틸까요?”
“굳이. 그냥 따라 들어가자.”
혀로 보이는 거대한 돌기를 지 났고 호흡기관인 기관지를 통했 다. 옆으로 다양한 해양 몬스터가 보였지만, 신기한 건 없었다.
얼마를 들어갔을까.
막다른 곳이 나왔다.
그리고.
구우우응!
막다른 곳이 열리며 밝은 빛이 그들을 맞이했다.
“떨어집니다.”
물속이다. 하지만 중력이 작용 하는 모양인지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 와아.”
혜영은 물론이고 모두가 감탄사 를 내뱉었다.
완전히 하나의 세상이다.
중세 시대의 건축물을 보는 느 낌이 랄까.
그리고 저 사이사이.
“수인 족?”
연우는 중얼거렸다.
수인 족이라면 아스가르드 안에 서 지겹도록 봤다. ‘심해의 습격’ 이라는 초대륙급 이벤트에서 대륙 을 습격한 게 저 수인 족들이었으 니까.
“으노악! 수인 족이야! 여기 지구 라며! 아스가르드 아니라며!”
이자젤이 악을 질렀다.
심해의 습격 때 가장 힘들어 했 던 이자젤이다.
“오호, 그래도 아스가르드 수인 족하고는 많이 다른데?”
생긴 것도 달랐고 이 공간도 그 렇고 많은 게 달랐다. 역시 아스 가르드는 게임에 불과했고 한 번 도 보지 못한 몬스터까지 재현할 수는 없었던 거다.
수인 족은 먹지도 못하는데.
해양 몬스터와 수인 족은 당연 히 다르다.
몬스터는 그냥 동물이라면 수인 족은 유사 인종이니까.
“일단, 여기서 낚시하는 건 미 루고 투어나 하자.”
역시 새로운 세상에 왔을 땐, 투어다.
“그럼 밑으로. 아니, 위로 올라 가겠습니다.”
중력이 거꾸로 돼 있다. 물속에 서 이런 식으로 중력까지 받을 줄 은 몰랐다. 역시 마법의 세계다.
헤맨이 손을 뻗었다.
투명화와 기척을 제거하는 마 법.
아마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알 아채지 못할 거다.
“쇼핑이나 할까?”
연우가 불쑥 물었다.
투어엔 쇼핑이 빠질 수 없다.
“쇼핑? 여기서 그런 것도 가능 해?”
“저기 시장도 있고 건물도 있는 데? 상점일걸.”
“그런가. 돈은?”
일단, 가 보자.”
헤맨은 한쪽 구석에 잠수함을 내리고 아공간에서 거품의 잎사귀 를 꺼냈다. 입속에 넣으면 얼굴에 공기주머니를 만들어 주는 마법 아이템이었다.
그들 옆으로 수인 족이 지나갔 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 었다.
“대충 수인 족으로 변신할까?”
“그게 좋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변신이 투어와 쇼핑하기는 편하다.
연우는 아스가르드에서 이런 경 험이 많았다. 특히 조인 족이 사 는 하늘 섬은 쇼핑할 게 많아서 좋았던 기억이 있고 웨어울프가 사는 야수의 정글, 설인이 사는 만년설 산도 갔었다.
항상 같은 종족으로 변한 후에 움직였다.
그래야 경계심이 많은 이종족 사이에서 편하게 여행할 수 있다.
“꺄, 난 잉어네. 바다에도 잉어 가 있나?”
“난 거북이. 수이니는 상어다! 뭔가 잘 어울려!”
“흐잉. 난 왜 조개야.”
혜영은 긴 다리를 뻗은 조개였 다. 본인은 그게 좋진 않은지 울 상이다.
이 모든 건 아이템으로 변신하 는 거다. 작은 해양 몬스터 인형 이 있는데 그걸 삼키면 두 시간 정도 변신할 수 있게 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웃던 연우가 손에 들린 인형을 봤다.
“…… 오징어라. 왜 기분이 나쁘 지?”
어쩐지 잘 어울리는 배합이었 다.
헤맨은 수인 족과 직접 어울리 는 건 싫은지 투명화 상태로 따라 다니기로 했다. 두 강아지도 투명 화 상태로 헤맨이 데리고 있기로 했다.
가장 먼저 들어간 곳은 시장이 었다.
여러 가지를 팔았는데, 대부분 해양 수산물이었다. 몬스터가 아 닌 물고기. 그리고 해초나 조개 따위의 식료품.
“어이, 오늘 피조개가 싸게 들 어왔어! 먼 갯벌에서 구해 온 거 야. 이만한 물건 없다.”
뭔가 이상한 말투인 건 헤맨이 번역 마법을 시전하고 있기 때문 이다. 수인 족도 그들만의 언어가 있는지 ‘꾸꾸’거리며 대화했다.
“물고기도 말을 하네.”
혜영이 가장 신기해 했다.
연우 일행은 당연히 해산물엔 관심이 없었고 다음 구역으로 넘 어갔다. 그곳엔 생각보다 괜찮은 물건이 많았다.
“통신 조개 팝니다. 북극해 소 금 30g!”
“대서양의 패자, 이니시스의 이 빨로 만든 검 팝니다! 북극해 소 금 300kg 이나 분홍 천일염 10kg!”
연우 일행은 이곳저곳을 다니면 서 이곳의 화폐가 소금인 걸 알 수 있었다. 바다에 살면서 왜 소 금을 찾나 했더니 사람이 금을 모 으는 것처럼 귀한 소금은 사치품 이자 교환가치가 있는 귀중품이었 다.
특히, 분홍 천일염은 꽤 귀해 보였는데 너무 깊은 곳이라 천일 염을 직접 만들 수 없다는 게 큰 이유였다.
“와! 나 이거 살래!”
“난 이거!”
연우는 어느새 쇼핑하고 있는 이자젤과 후름. 그리고 은근슬쩍 옆에 서 있는 혜영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헤맨은 웃으며 아공간에서 소금 을 잔뜩 꺼내 줬다. 수인 족들이 사용하는 소금엔 얇은 결계가 있 었는데, 물에 녹지 않게 해 주는 것이었고 헤맨은 슬쩍 보더니 똑 같이 만들어 냈다.
아공간 2단계 구역엔 엄청난 양의 소금이 있을 거다. 소금을 무제한으로 뿜어 대는 항아리가 있었으니까.
한참 쇼핑을 하고 만족했는지 발걸음을 돌렸다.
“와! 저기 가 보자!”
역시 시작은 이자젤이었다.
연우도 궁금해서 따라갔더니 콜 로세움과 같은 공간에 수인 족과 해양 몬스터가 전투하는 모습이 보였다. 한두 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 였다.
주변에선 그걸 구경하고 있었는 데 그냥 구경꾼이 아니었다.
“아니, 거기서 더 강하게 물었 어야지!”
“답답해서 못 보겠다.”
그러더니 경기장으로 쏙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들어가서 이기면 좋은데 입장과 동시에 머리가 뜯겨 죽어 버렸다. 그 머리를 먹은 해양 몬 스터는 수인 족으로 변했고 한층 더 강한 마력을 뿜으며 덩치가 커 졌다.
상대방을 잡아먹고 힘을 흡수하 는 모습이었다.
“으윽, 여긴 대체 뭐야?”
연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 다.
그때였다. 멀리서 꽤 강한 힘을 가진 거대한 백상아리 수인 족이 나타났다.
머리에 조개와 불가사리로 치장 된 왕관을 쓰고 있는 걸 보니 이 곳의 왕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크하하하. 싸워라. 이겨라. 그 리고 쟁취하라!”
“우아아아아!”
마치 광신도를 보는 느낌이었 다. 그 수인 족 한마디에 전투를 구경하던 구경꾼 대부분이 경기장 으로 난입한 것이었다.
“여기 왜 이렇게 단순해?”
“내가 아냐. 아스가르드에서도 그러긴 했어. 수인 족은 항상 멍 청했지. 특히, 기억력 하나는 아 주 ≫
이자젤과 후름의 대화였다.
전투가 슬슬 끝나자 처음엔 볼 수 없었을 정도로 강력한 수인 족 몇 마리만 경기장 중심에 남아 있 었다.
‘싸우고 먹고 강해진다라.’
딱 수인 족다웠다.
“새로운 식구가 탄생했군.”
왕이 그들을 멀리서 들어 올렸 다. 긴 전투 끝에 탄생한 수인 족 은 강했지만, 왕에게 절로 고개를 숙였다. 좁힐 수 없는 격차를 본 능적으로 느낀 거다.
뿌우우!
고동 소리였다. 마력이 담긴 아 주 커다란 소리.
“때가 왔다.”
뿌우우우우!
몇 번의 마력의 파동. 그리고 저 먼 곳에서 시커멓게 올라오는 수인 족들. 왕은 그들을 보더니 몸을 띄운다. 마력을 이용한 헤엄 이라고 해야 할까.
구우우웅!
“가라, 지상계로 가서 싸우고! 포식하고! 강해져라!”
연우와 일행은 그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연우, 이거 뭔가 그거랑 비슷 하지 않아?”
“…… 심해의 습격.”
세세하게 보면 많이 다르다. 하 지만 큰 상황은 같았다.
연우는 문득 저들이 불쌍했다.
꽤 오랫동안 준비한 것 같은데 하필 오늘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