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편_ 지옥에서 돌아온 자
(1)
정확히 아프리카 중앙에 사용자 들이 모였던 그 시각, 연우는 농 장에서 여유로운 낮 시간을 보내 고 있었다.
오전에도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점심엔 위스키를 한 잔 마셨다. 그래서 그런지 잠이 솔솔 몰려왔 다.
“으함. 졸려라.”
“ 연우!”
이자젤이 카페로 올라오며 소리 쳤다.
“왜.”
요즘 밖이 시끄러워서 그런지 손님도 없다. 게다가 이자젤이나 수이니도 매일 보니 지겨울 지경 이다.
“댕댕이가 사라졌어!”
“언제?”
“어제부터 안 보이던데?”
“에이, 금방 돌아오겠지. 이 좁 은 농장에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 겠어.”
도망갈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 하는 연우였다.
“그렇겠지? 하긴, 저렇게 보여 도 투 클래스 최상급인데 어디 가 서 삶아지진 않겠지.”
“마왕이 삶아지긴, 괜히 사고만 안 치면 좋겠다.”
어차피 목줄이 채워져 있고 헤 맨에게 교육받은 댕댕이다. 도망 은커녕 사고 칠 일은 절대 없을 거다.
“하긴, 연우. 우리 또 밖에 놀러 가면 안 돼?”
“귀찮아.”
“놀자아! 놀고 싶어!”
“귀찮다니까.”
“왜! 안 심심해? 전처럼 사람도 보고 술도 먹고 내기도 하고!”
“이 사람이 큰일 날 소리 하고 있네.”
사람 반 죽여 놓을 소리다. 전 에 혜림이 이자젤과 내기를 하다 병원에 입원했다. 7단계 사용자도 그러할 진데, 평범한 사람은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
조금 심심하긴 하네, 쇼핑 이나 갈까. 아니, 지금 쇼핑은 할 수 있을까?”
농장 안에만 있다 보니 밖 상황 을 잘 모르겠다. 인터넷 기사로 본다고는 해도 직접 겪는 것과는 다를 거다.
“좋아좋아! 쇼핑하자, 술도 사 야겠어. 대충 맛을 알았으니까 맛 있는 것 위주로!”
연우는 피식 웃으며 이자젤을 바라봤다. 가끔 멍청한 소릴 해도 가장 밝고 유쾌하다. 옆에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나는 친구랄까.
구으으응.
“ 응?”
연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 다. 이자젤의 시선도 홱 돌아간다. 찌릿한 감각이 훑고 지나간 걸 동 시에 느낀 거다.
“주인님.”
헤맨이 옆에서 나왔다.
“동생이나 부모님에겐 별일 없 지?”
“네, 괜찮습니다. 협회장이 조금 위험하긴 한데……
“그래? 그럼 7} 봐야 하지 않겠 어?”
약하긴 해도 꽤 쓸 만한 방파제 다.
헤맨이 잠시 먼 곳을 바라봤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거 같 습니다.”
헤맨이 그렇게 말했다면 믿어도 된다. 연우와 이자젤은 안심하고 자리에 앉았다.
“연우우! 쇼핑 가자!”
“그래, 할 일도 없는데 쇼핑이 나 가지.”
이곳은 언제나 평화로웠다.
연우는 이자젤과 후름 그리고 리젤까지 데리고 쇼핑을 나갔다. 곳곳에 접근 금지 방벽이 쳐졌지 만, 사람들은 평소와 같이 거리를 거닐었다.
쇼핑도 하고 일도 했다.
대한민국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 다.
북한에서 미사일이 날아와도 신 경 쓰지 않는 게 우리나라 사람들 이니까.
“좋다. 협회 경매장으로 가서 술을 사고 외식도 하자.”
“와아! 외식이다!”
이자젤이 가장 좋아했다. 리젤 은 여전히 엘프들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오후엔 시내 구경도 하고.”
“와아! 좋아좋아!”
이자젤은 이런 과장된 반응으로 참 기분 좋게 하는 능력이 있다. 가식이 전혀 보이지 않은 단순함 에 절로 웃음이 난다.
가장 먼저 협회 경매장으로 향 했다.
이번엔 벤틀리를 타고 나왔다. 생각해 보니 지프나 랜드 로버보 다는 롤스로이스나 벤틀리를 더 타는 것 같다.
‘롤스로이스를 더 살까.’
연우는 이런 묵직함이 좋았다. 타고 나온 벤틀리도 롤스로이스와 비슷한 느낌의 ‘뮬산’이었다.
지나가다 매장이 보이면 하나 사야겠다고 마음먹을 때쯤 경매장 에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연우를 어떻게 알아본 걸까.
안쪽에서 직원 몇 명이 나왔다. 아멕스를 보여 주지 않았음에도 수행하기 시작했다. 벤틀리는 발 렛 직원이 탔고 연우는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이동했다.
옆으로 이자젤이 있었고 뒤로 후름과 리젤이 따라왔다. 그 뒤로 는 직원 5명을 달고 움직였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고급 주 류 매장. 이자젤은 큰손의 위력을 보여 줬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몇 개를 제외하고 모두 쓸어버린 것 이다.
다음은 경매장.
물량은 많지 않았지만, 가격이 센 곳이다.
하지만, 거칠 게 없었다.
이자젤은 금전 감각이 없는 건 지, 연우를 믿는 건지 대놓고 질 렀고 하나도 빠짐없이 낙찰받을 수 있었다.
“역시 재밌어. 쇼핑은 최고야!”
“항상 짜릿하지.”
연우도 그 느낌을 안다.
돈이 많다는 느낌이 이거다. 얼 마 전부터 북극에서 마력석이 들 어오기 시작했고 사용료는 미리 입금됐다.
게이트 사태 때문에 늦어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자, 밥 먹으러 가자.”
이번엔 협회 경매장 바로 옆에 세워진 5성급 호텔로 향했다. 1인 당 120만 원이 넘는 코스 요리였 지만, 연우에겐 정말 별것 아니었 다.
호텔에 들어갈 때도 난리였다.
벤틀리 뮬산, 마력석 엔진과 몬 스터 부산물로 개조된 후에 8억 이 넘어 버렸고 그 뮬산에서 나오 는 사람 한 명 한 명도 절대 평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직원 몇 명이 동시에 나왔다.
연우는 귀찮은 일이 발생하지 않게 바로 아멕스 블랙을 꺼내 보 였다. 하지만 직원은 다 아는 눈 치였다. 연우는 몰랐지만, VVIP의 이동 경로와 얼굴을 파악하는 건 그들에게 기본이었다.
연우는 밥만 먹을 거라고 조용 히 말했고 호텔 최상층의 가장 좋 은 자리에서 식사할 수 있었다.
와, 이거 맛있는데?”
“수이니 요리보단 못하지만, 인 간 중에서야 거의 최고겠지?”
당연히 확실한 건 아니다.
그래도 최고 중의 최고만 이곳 에서 요리할 수 있지 않을까.
전채요리, 스프, 샐러드, 스테이 크 순서로 나왔고 마지막엔 디저 트로 치즈 케이크와 커피가 나왔 다.
“맛있긴 한데, 역시 이런 것보 다는 찌개나 삼겹살이 최곤 거 같 아.”
나도 인정.”
“저, 저도요!”
후름이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고 이자젤과 리젤이 동의했다. 그 의 견은 연우도 동의했다.
“안녕하십니까. S 호텔 식당 지 배인입니다.”
“아, 네.”
연우는 식사가 끝날 때 도착한 여성 지배인을 바라봤다. 음식이 맛있었기에 기분이 좋은 상태였 다.
“이곳에 방문해 주신 연우 님에 게 드리는 작은 성의입니다. 최고 급 블랙 카우인데 앞뒤로 살짝만 구워 드시면 정말 괜찮을 겁니 다.”
지배인의 옆에서 여직원 한 명 이 나와 큼지막한 종이 가방을 내 밀었다.
“어? 송지연?”
“너는 신연우? 아, 아니. 그 게……
그 직원은 연우와 아는 사이였 다. 그래서 편하게 부른 것인데 지배인의 눈초리는 곱지 못했다.
“혹시 아시는 분입니까?”
지배인은 연우에게 물었다.
“네, 친구예요. 오랜만이다 지연 아.”
“네, 네! 오랜만. 아니, 반갑습 니다.”
“뭘, 그렇게 어렵게 해. 편하게 해.”
송지연, 연우가 민영이라는 여 자 친구와 헤어진 후에 잠깐 만났 던 전 여자 친구였다.
연우의 연애는 한 번이 아니다.
롤렉스 매장에서 만났던 민영은 만난 지 5년이 됐으니까 25살에 헤어진 거다. 여자 친구는 이전에 도 있었지만, 이후에 만났던 ‘송지 연’이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대학 동기였고 25살 동 갑이었다. 연우는 아직 대학생이 지만, 지연은 취직은 한 후였다. 연우도 본인이 답 없이 살았다는 건 안다.
대학에서의 최소한의 공부는 하 는 편이지만, 이후엔 게임뿐이었 으니까.
“넌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니?”
그렇다고 지연도 좋은 곳에 취 직한 건 아니다. 하지만 얼굴이 예쁘다는 이유로 돈이 많은 ‘사용 자’와의 소개가 들어왔다는 게 문 제의 발단이었다.
‘올 게 왔구나.’
사실, 이주 전에 그녀의 폰에서 소개팅을 나간다는 걸 봤었다.
연우는 지연이 이 말을 하나 안 하나 두고 보고 있었다.
그런데 역시나.
지연은 그와 잘되는 모양인지, 연우의 꼬투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래서 너는.”
“…… 나?”
지연은 당황했다. 연우는 지연 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없었다. 항상 말은 부드럽고 돌려 가며 말 하는 편이었고 상처를 받을 만한 비판이나 비난은 하지 않는 주의 였다.
그런데 이제 그걸 참을 필요가 없어졌다.
“나, 나는 취직이라도 했지. 너 는 매일 게임만 해서 취직은 할 수 있겠어?”
“꼴에 연봉 2,000만 원 받는 회 사에 취직했다고 지금 나한테 그 러는 거야? 그것도 퇴직금하고 상 여금 포함이라 월 실수령액 120 이나 되냐?”
“야, 야! 지금 너. 너 말이!”
“말 더듬지 말고 얘기해. 부산 스러우니까.”
“미쳤어? 너 왜 이래? 나랑 헤 어지고 싶어?”
처음부터 헤어지고 싶어서 꼬투 리 잡은 걸 모를 리 없다. 지연은 당황하더니 잘됐다는 표정으로 말 을 이었는데, 연우가 선수 쳤다.
“헤어지자.”
“뭐?”
어이가 없는 거다. 먼저 헤어지 자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 지만, 진짜로 그럴 줄 몰랐을 테 니까.
“내가 너 소개팅 나간 거 모를 줄 알았어? 그날 우리 100일이었 어. 분명 내가 이주 전부터 약속 잡았고. 네가 그렇게 가고 싶다던 9만 원짜리 로브스터 뷔페에 20 만 원짜리 와인까지 예약했다. 그 거 알아? 공교롭게도 그 뷔페 건 물이 호텔이었고 그 1층에 네가 있더라. 어떻게 예약한 거 취소도 못하게 몇 시간 전에 약속을 취소 하냐?”
그래도 80%를 돌려받긴 했다. 극적인 상황을 위해 약간의 과장 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연은 몰랐 다.
아무 말할 수 없을 거다.
“그렇게 돈 잘 번다는 ‘사용자’?
잘 만나라.”
연우는 바로 일어났다.
지연은 말없이 그 모습을 볼 뿐 이었다. 서로 잡을 이유도 없었고 잡고 싶지도 않았다.
연우는 차갑고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당장 그날 친구를 불러 술을 먹 었다.
“끄어어억. 크흡. 크흐읍! 분명 오늘 그 새끼 만나서 노닥거리고 있겠지? 끄어어업.”
연우는 주먹을 입에 물고 있었 다. 눈물과 콧물은 덤이다.
“야, 쿨 하게 찼다며? 그럼 된 거지.”
“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야. 내 잘못이라고. 끄어어업.”
“이 새끼. 진짜 안 닥칠래? 다 쳐다보잖아.”
“보라지! 난 이렇게 아픈데! 세 상이 날 이렇게 아프게 하는데! 끄어어업. 크홉. 보세요! 여기 실 연당한 남잡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픈 남자라고요! 끄어어.”
결국, 그날 친구의 주먹으로 정 신을 잃고 난 후에야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날도. 연우는 그렇게 꾸준히 지질 했다.
연우는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순간이 떠오른 것이다.
“이건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그럼 지연아, 잘 지내고.”
“그, 그래. 조심히 가고.”
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 더 있을 이유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연우가 떠나간 후에 지배인이 지연을 불렀다.
“혹시 어떻게 아는 사이죠?”
“전에 알던 친구예요. 대학교 때요.”
지배인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은 했지만,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VVIP의 친구인 것만으로 그녀는 평범한 직원을 벗어났으니까.
“굉장한 친구를 뒀네요. 유명한 VVIP 중 한 명입니다. 협회 경매 장, S 백화점. 오늘은 S 호텔 최 고의 레스토랑인 여기까지. 절대 로 얼굴 잊지 말고 꼭 안부 인사 전하도록 해 주세요.”
“…… 네, 알겠습니다.”
“친구인 건 알지만, 정중하고 공손하게. 알겠죠?”
“ 네.”
“그분께서 우리 호텔을 조금이 라도 안 좋게 본다면, 저는 물론 이고 호텔 대표님까지 교체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사람입니다.”
지연은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때, 그렇게 지질했고 할 줄 아는 거라곤 게임뿐이었던 연우가 이렇게 성공할 줄 몰랐으니까.
그것도 보통 성공인가.
협회에서 발급하는 아멕스 블랙 카드의 소유자다. 게다가 차는 8 억이 넘는 벤틀리 뮬산이고 옆에 있던 두 미녀와 한 명의 미남까 지.
묘한 무언가가 가슴을 뒤흔들었 다.
전에 알던 그 사람이 맞는 건 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