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권 4화
제29편_ 연지 연호(1)
혜영이 연우를 처음 봤을 때가 중학생이었다.
지금이야 키도 크고 얼굴이나 몸매가 예쁘다는 소리를 듣지만, 그때는 키 큰 돼지였다. 얼굴은 여드름으로 가득했고 자신감이 없 어 두꺼운 안경과 긴 머리칼로 가 리고 다녔다.
연우는 기억하지 못할 거다. 혜 영이 단 한 번도 그 말을 꺼낸 적 이 없었기 때문이다.
‘첫사랑이었지.’
사실 그때의 연우는 지금보다 잘 생겼었다.
지금은 조금 상했다고나 할까. 얼굴도 늙어 보이고 피부도 좋은 편은 아니다. 운동을 조금 했었지 만, 회사 생활 때문인지 뱃살도 약간 나왔다.
‘뭐, 그래도 좋지만.’
하여튼, 그때 연우는 착했고 다 정하고 싸움도 잘해서 일진들도 연우를 건들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다 한 번 사건이 터졌다.
혜영을 괴롭히는 여자 일진들이 있었다. 그 뒤를 봐주는 남자 일 진이 있으니 아무도 함부로 할 수 가 없었다. 반항하고 저항하면 괴 롭힘은 더 심해졌다.
연우는 자신의 반에서 그런 친 구가 있는 꼴을 보지 못하는 친구 였다.
여자들도 처음엔 연우 눈치를 봤지만, 여자는 못 건들 거라 생 각한 모양인지 대놓고 혜영을 괴 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연우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
혜영도 연우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여자를 직접 때리는 건 어려운 모양인지, 그 여자애 앞에서 뒤를 봐주는 남자를 정말 죽기 직전까 지 때렸다. 다른 이들이 볼 때는 상당히 잔인한 장면이었겠지만, 혜영은 연우가 백마 탄 왕자로 보 였다.
‘지금 생각하면 거의 중2병이었 지만.’
그때, 혜영의 첫사랑이 시작됐 다.
언제나 첫사랑이 그렇듯 혜영은 연우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만 지켜봤다. 그때, 혜영의 ‘왜곡 된 기억’으로는 연우가 너무 멋있 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반이 갈라졌고 혜영은 공부와 함께 운 동을 시작했다. 먹고 싶은 걸 참 고 잠을 줄이고. 다시는 그렇게 무언가를 열심히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죽어라 했 다.
그러면 연우가 한 번쯤 바라봐 줄 것 같았다. 나중에 완전히 변 신해서. 예뻐져서 당당하게 앞에 서고 싶었다.
그렇게, 아주 독하게 했다.
연우는 혜영을 잊었을 거다. 아 니, 기억이나 했을지 모르겠다.
대학생이 되면서 우연홍].
사실 이것도 고백하자면 우연은 아니었다.
혜영은 연우가 어느 대학, 어느 과로 가는지 알아내서 같이 썼다. 연우보다 성적이 좋았지만, 맞춰 서 간 것이다. 혜영은 흔히 말하 는 금수저라, 대학 전공은 크게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멋있어진 모습으로 연우 에게 다가설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새끼. 아니, 이놈은 그걸 기억하지 못했다.
예상은 했지만, 화가 불쑥 튀어 나와 연우와 티격태격하게 된 것 이다. 그래도 좋았다. 연우는 첫 사랑이 아닌 친구로도 최고였고 그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었다.
뭐, 결국 연우는 다른 여자 친 구가 생겼고 혜영은 바라만 보는 상황이 돼 버렸지만, 기다리면 언 젠간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정말 기회가 왔다.
“너도 한번 강해져 볼래?”
솔직히 무서웠다.
끔찍한 고통.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힘든 곳이라니. 하지만 그러 면 강해질 수 있다고? 그래서 조 건을 달았다.
“…… 그럼, 나도 이 농장에 있 을 수 있어?”
사실, 요리는 못한다. 그렇다고 청소하는 역할은 따로 있는 것 같 고 비서라는 저 여자가 연우 옆에 있을 생각을 하니 열이 뻗쳤다.
얼마나 힘든지? 머리에 들어오 지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살 빼는 것보다 힘들까.
먹지도 못하고 미친 듯 공부하 며 근육이 악을 지르는 운동까지 했다. 그때 모든 걸 성공하고 얻 었던 성취감에 혜영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최근에 남 자들 접근이 많아진 것도 한몫했 다.
물론, 그건 일반인이었던 혜영 이 가진 상상력의 한계였다.
혜영은 호기롭게 던전에 들어갔 고.
이후로 단 일 분도 연우 욕을 쉰 적이 없었다.
“이 개새에에에! 나가면 뒈졌어 어어! 미친 연우 새끼야아아아! 으아아아!”
그때부터였을 거다. 귀곡성이라 는 게 산속에 울리기 시작한 게.
“귀가 왜 이리 간지럽지?”
연우가 약지로 귀를 후비며 중 얼거렸다. 옆에서 평범한 옷을 입 었지만 거친(?) 몸매는 가릴 수 없다는 걸 몸소 증명하고 있는 리 젤이 말했다.
“누가 주인님 욕을 하는 모양입 니다.”
헤르메스, 요섭, 리젤은 헤맨과 함께 이 세상에 관한 상식 공부를 시작했다. 오후에 상식 공부 한 시간, TV 시청 한 시간.
게임에서의 영향인지 헤맨은 한 국어를 사용하는 데 문제없었다. 헤르메스야 한국에서 오랜 시간 살았고 요섭도 한국 서버의 캐릭 터였다.
리젤도 던전에서 한국어를 배웠 다고 한다. 사신이라 그런 건지, 머리가 좋았던 건지 금방이었다고 했다.
“협회장은 잘 지내나.”
연우는 모닥불 위에 직화로 구 운 쌍뿔 멧돼지 목살을 뒤적거렸 다. 옆에서 헤맨이 불쑥 나와 대 답했다.
“꽤 만족스러운 모양입니다. 협 회 내에서 입지가 크게 올랐습니 다. 위원회에서 압박하던 것도 거 의 사라졌다고 합니다.”
“괜찮네. 조금만 더 노력하면 투 클래스 마스터가 될 수 있겠 지.”
한 단계지만, 여타 다른 옵션들 이 상상 이상으로 크게 다가올 거 다.
현실에서 투 클래스 마스터는 전 세계에 열 명이 채 되지 않는 다고 한다. 생각보다 많은 수였지 만, 아스가르드에 비하면 턱없이 적었다.
재능도 중요하지만, 깨달음과 운이 동반돼야 한다.
다행인 건, 이제 협회장은 8단 계에서 9단계 올라가는 노력으로 마스터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 그건 어마어마한 메리트가 있다.
협회장에게 그라니아 대륙에 관 해 물었다. 많이 아는 건 없었지 만, 대부분의 몬스터가 그곳에서 온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혜영은 어디까지 갔지?”
들어간 지 일주일이 지났다.
“지금 4번 마법 구역에서 구르 고 있습니다. 너무 무모합니다. 벌써 7번이나 죽을 뻔했습니다. 제가 개입하지 않았으면 정말 죽 었을 겁니다.”
연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 다.
다른 이들에게는 정말 죽을 수 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한다. 하지 만 혜영에게는 죽지 않게 해 준다 고 했다. 근데 그걸 정말 믿을 줄 은 몰랐다.
살가죽이 벗겨지고 팔다리가 잘 리는데 죽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을까? 혜영이 연우를 얼마나 믿 는지 보여 주는 단면이었다.
“잘됐어. 조금만 신경 써 줘.”
“ 알겠습니다.”
원래 5단계 정도 되는 ‘마력량’ 뿐이었다. 하지만 벌써 7단계를 목전에 두고 있다. 던전의 효과도 있었지만, 사실 혜영의 재능이 더 큰 몫을 했다.
“오늘 차가 도착한다고 했지.”
연우는 손을 살짝 저었다.
살랑.
실프가 옆으로 다가와 어디쯤 왔는지 알려 줬다.
“간단하게 주차장을 만들어야겠 어.”
도로는 친구들이 오기 전에 닦 았지만, 차를 놓을 곳이 없었다. 연우는 목살 몇 개를 입에 털어 놓고 남은 소주를 마셨다.
“오기 전에 끝내자.”
보이지 않는 손의 단계가 오르 면서 길이와 개수가 올랐다. 전성 기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하지만, 드래곤을 잡거나 신마 대전을 나 가는 것도 아니니 충분하다.
바닥에 뭘 깔지 생각하다가 무 난하게 ‘중급 강화 대리석’을 깔기 로 했다. 지진이 나거나 전쟁이 날 일도 없겠지만, 이왕이면 튼튼 한 게 좋다.
비가 올 수도 있으니, 천장도 올려야 한다.
“헤맨, 재료 좀.”
연우가 천천히 일을 시작했지 만, 금방이었다. 경사가 있는 산 악 지형이기에 보이지 않는 손으 로 지반을 손보고 대리석을 도로 와 연결했다.
수평을 맞추고 배수관을 연결해 물이 차지 않도록 하고 기둥을 세 웠다. 위로 천장을 올렸다. 건설 스킬이 4단계였기에 어렵지 않게 완성할 수 있었다.
때마침, 큼지막한 트럭이 줄줄 이 들어왔다.
롤스로이스, 벤틀리, 포르쉐 등 등. 보조석에서 각 지점의 지점장 이 직접 나왔다.
‘지점장은 할 일도 없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직접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최대한 출 고 시간을 당기려 했는데, 이게 한계였습니다.”
“여기에 내리면 되겠습니까?”
연우는 형식적인 인사만 해 주 고 차가 내려오는 게 보였다. 저 걸 다 탈일이나 있을까 싶었지만,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이게 바로 사치 부리는 맛이다.
8대를 구매했지만, 주차장은 총 16대를 세울 수 있게 만들었다. 두세 개 정도만 손님용으로 두면 될 것 같았다.
‘시간 되면 더 사 봐야겠다.’
시계도 사야 한다. 당장 차고 다닐 건 있지만, 컬렉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살랑.
실프가 한 번 더 날아와 속삭였 다.
“뭐? 연지랑 연호가?”
올 때가 되긴 했다. 스킬 북을
주고 알아서 하라고 했지만, 슬슬 벽에 막힐 때가 된 거다. 게다가 로한 길드장과의 일도 있으니. 궁 금증이 폭발하기 직전일 거다.
연우는 가는 길까지 인사를 전 하는 지점장들에게 형식적인 인사 를 하곤 차를 둘러봤다.
“헤맨, 보존 마법 좀.”
헤맨은 손을 휘저었다. 먼지가 쌓이지 않고 이외에 어떠한 손상 도 막아 주는 마법들이 겹겹이 발 동됐다.
연지와 연호가 온다.
분명 연우에게 궁금한 게 많고 성장에 대한 도움을 받으려는 것 도 있을 거다.
연우는 음식을 준비했다.
방금 가볍게 한잔 마셨지만, 술 이 부족하다.
오늘 저녁은 블랙 쿡의 달걀을 이용한 명란계란말이와 민물장어 구이다. 참고로 명란젓은 마트에 서 샀고 장어는 전기 속성 몬스터 다.
“오빠!”
“형!”
연지와 연호가 도착했다. 역시 운전은 연지가 했는데, 이곳저곳 흙이 잔뜩 묻어 있는 것과 연호의 창백한 얼굴을 보니 어떤 상황이 었을지 예상이 됐다.
“어서 와.”
연우는 바로 수중 테이블로 데 려 왔다.
“형! 저 차들 뭐야? 대박. 형 차야?
“와, 오빠. 나 저거 하나 주면 안 돼?”
연우는 가볍게 무시했다. 리젤 와 헤맨은 보이지 않기로 했다. 두 동생에게 보여 주면 부모님께 다이렉트로 보고가 들어갈 거다.
김이 살살 올라오는 계란말이와 철사 불판에 올려진 두툼한 장어 한 마리가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한 마리였지만, 불판 하 나를 가득 채우는 크기였다.
“와아. 잘 먹겠습니다!”
“맛있어!”
역시 두 동생이 있으면 시끄럽 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야?”
연우가 묻자 연호가 연지 눈치 를 봤다. 연지는 그게 답답한지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아후. 답답해. 연호는 연금술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볼 게 있고. 난 그때 오빠가 어떻게 됐던 건지 궁금한 거고.”
연지가 솔직하다.
연우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협 회장은 대략적인 힘을 알고 혜영 은 반쯤 예상만 하고 있다. 연지 와 연호? 아스가르드 플레이어의 힘을 끌어온 건 알려 줄 수 없지 만, 힘을 모두 숨길 생각은 없었 다.
“일단, 한잔 하고.”
“그래! 짠!”
모두 성인이 된 뒤로 같이 술자 리를 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 야 할까.
“일단, 난 개사기 캐릭터야. 농 장 주인인데 저기 보이는 헤르메
그제야 배설물을 나르는 헤르메 스를 본 연지와 연호의 눈이 휘둥 그레졌다.
“대충 느끼겠지만, 원 클래스 마스터.”
“ 헐?”
“저기 위에 대장간 있는데, 거 긴 이제 거의 투 클래스 마스터에 이르는 대장장이가 있지. 모두 내 부하.”
최대한 간결하게 설명하는 거 다.
나만 플레이어다 :절대자의 귀농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