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 내가 만든 세계
“화, 황제 폐하! 황제 폐하!”
시녀들의 외침에 황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갓난아기의 힘찬 울음소리.
침대에서 흠뻑 땀에 젖은 모습으로 아기를 안고 있는 황후가 보였다.
“화, 황후!”
오토를 본 카스피가 배시시 미소했다.
스무 시간이 넘는 진통 끝에 낳은 아기.
오토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황후와 아기의 안전을 빌었다.
“황후 폐하와 황녀 전하 모두 건강하십니다.”
시녀의 목소리에 오토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깨달은 자리의 모든 이들이 밖으로 물러났다.
오토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황후와, 그녀의 품에 안긴 어린 황녀를 바라봤다.
“……그것 봐요. 내가 딸이라 했죠?”
“이 아이가……, 저, 정말 내 딸이라고……?”
“안아 볼래요?”
고개를 끄덕인 오토가 조심조심 아기를 안아들었다.
따뜻하다.
그리고 사랑스럽다.
오토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이어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황녀의 이름은 ‘벨라’가 되었다.
* * *
나바라 제국과 클라우디우스 제국의 전쟁은 나바라의 승리로 끝났다.
샤다이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죽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결국 오토의 검에 쓰러졌다.
클라우디우스 제국은 항복을 선언했다.
그렇게 북부의 광활한 대지가 나바라 제국으로 흡수됐고, 오토마이어 황제는 역사상 유례없는 거대 제국을 건설했다.
‘오토마이어 황제 폐하 만세!’
‘크리엘도라 대륙의 지배자! 오토마이어 나바라!’
오토마이어 황제는 그간 클라우디우스 제국의 속국이었던 몇몇 군주령을 독립시켰다.
그의 목표는 예나 지금이나 대륙 통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었다.
바토리는 사르데니야의 왕이 되었다.
리베르의 활약으로 사르데니야 왕국은 벌써부터 활기가 넘쳤다.
백성들은 지난 언데드 군단과의 전쟁에서 활약했던 영웅인 바토리 에르제베트 왕을 가슴 깊이 존경했다.
“서두르거라 도롱뇽아. 어서 빨리 카스피의 아이를 보고 싶구나.”
“지금 빨리 가고 있잖아!”
“흐응. 이 정도가 너의 최선이었더냐. 전쟁이 끝나니 뱃살이라도 뒤룩뒤룩 붙은 것이더냐. 드라코니안이란 이름이 네 늘어진 뱃살을 잡고 웃겠구나.”
“뭐, 뭐라고? 나 뱃살 없다! 카앗! 이몸의 비행 실력을 제대로 보여 줄 테니 꽉 잡기나 하라고!”
바토리는 아틸라, 펀치, 도롱뇽과 함께 나바라 제국의 황도를 향하고 있었다.
카스피가 무사히 출산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면 떠나겠다던 아틸라도 카스피의 임신 사실을 알고는 한동안 사르데니야에 머물렀다.
그날 밤, 나바라의 황성에선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아, 아틸라 님! 내가 아버지가 되어 버렸소! 이제 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요!”
“새끼. 난들 알겠냐.”
오토는 말과 달리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어린 벨라를 보며 귀여워 죽겠다는 듯 콧구멍을 벌름댔다.
키릴, 슈시아, 라일, 크누트도 만사를 제쳐 놓고 황성을 찾아왔다.
그렇게 지난 전쟁의 영웅이자 아틸라의 동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아기가 정말 예쁘구나. 그렇지 않느냐.”
바토리가 아틸라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널 닮은 아기를 낳아 줄 수 있느니라.”
“난 잘 키울 자신이 없는데.”
“내가 더 신경 쓰면 되지 않느냐. 이래 봬도 난 제법 아기를 좋아한단다.”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바토리는 오토와 카스피 못지않게 벨라를 좋아했다.
“나도 한 번만 안아 보자꾸나 카스피.”
벨라를 안아든 바토리의 얼굴에 홍조가 깃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틸라는 두근,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바토리는 아름답다.
그러나 아기를 품에 안은 바토리는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아틸라를 보며 한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기에 더욱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아틸라 아틸라. 저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지 않은 것 같지 않아?”
카스피가 아틸라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왔다.
카스피가 가리키는 곳엔 키릴과 라일이 있었다.
그들은 달빛에 물든 테라스에서 서로의 잔을 부딪치며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은 의미가 없어졌지만 키릴은 패영전의 여주인공이다.
바토리를 제외한다면 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키릴과, 샤를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상당한 미남자인 라일이 저러고 있으니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요즘 라일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니까? 마탑 복구 때문에 한창 바쁠 텐데 말이야.”
카스피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고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며 말했다.
“아틸라. 난 아틸라와 바토리가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어.”
아틸라는 물끄러미 카스피를 내려 봤다.
이젠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지만, 아틸라가 보기에 카스피는 여전히 소녀 같았다.
‘애가 애를 낳았군.’
아틸라가 답하지 않자 카스피는 다시금 히죽 웃는 낯으로 돌아갔다.
아틸라는 주위를 둘러봤다.
슈시아와 크누트가 설전을 벌이는 모습이 보였다.
둘은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다.
그런데 잠시 후, 둘은 서로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기분 좋게 술에 취한 옛 동료들.
그들을 보며 아틸라는 마찬가지로 기분 좋은 감정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론 외로움을 느꼈다.
이 세계에 진입한 후 아틸라는 한 번도 술에 취한 적이 없었다.
한 번쯤은 저렇게 취해 보고 싶다.
취기를 빌려 마음속의 이야기를 모조리 늘어놓고 싶다.
그의 오랜 동료들에게.
바토리에게.
끼아옹!
펀치가 아틸라의 어깨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아틸라의 얼굴을 핥았다.
아틸라는 펀치의 이마를 말없이 쓰다듬었다.
* * *
잔치는 며칠 동안 이어졌다.
축하를 위해 모인 동료들도 하나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아틸라와 바토리도 황성을 떠나기로 했다.
카스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토리에게 무언갈 물었다.
바토리는 조금은 슬퍼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고, 그 모습에 카스피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이곳을 벗어나면 아틸라는 자신의 길을 갈 것이다.
“잘 살아라. 오토.”
카스피에게 먼저 작별 인사를 남긴 아틸라가 오토에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으로 청하는 악수.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악수.
오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털어 내고는 씩씩하게 아틸라의 손을 맞잡았다.
“잘 사슈! 아틸라 님!”
울음을 참기 위해서인지 오토는 연신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아틸라가 말했다.
“아틸라.”
“……네?”
“그냥 ‘아틸라’라고 부르라고.”
어리둥절한 얼굴의 오토를 향해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친구끼리는 그렇게 하는 거라면서.”
아틸라가 뒤돌아 도롱뇽의 등에 올라탔다.
바토리도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는 도롱뇽의 등에 올랐다.
펀치가 아틸라와 바토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고, ‘카아앗! 너네 음식 더럽게 맛없더라!’ 하는 도롱뇽의 외침과 함께 그들의 모습이 멀어졌다.
멍하니 그것을 보던 오토는 아틸라 일행이 손톱 크기로 작아진 뒤에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또 보자! 아틸라!”
* * *
사르데니야로 돌아가는 내내 바토리는 나바라 황성에서 있었던 일을 떠들었다.
아틸라는 별다른 대꾸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바토리는 신이 난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러던 것이 점차 잦아들었다.
그리고 저 멀리 사르데니야의 왕성이 보인 순간부터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바람 가르는 소리만이 공허하게 귓가를 울린다.
“하강해라. 도롱뇽.”
아틸라의 말에 도롱뇽이 움찔했다.
“응? 왜? 왕성까지는 아직 좀 남았는데?”
“하라면 해.”
“…….”
슬쩍 바토리의 눈치를 본 도롱뇽이 하강을 시작했다.
잠시 후, 아틸라와 바토리는 광활한 평원에 서 있었다.
메마른 바람이 불었다.
사르데니야 왕국 바깥은 여전히 황무지에 가깝다.
“어디로 갈 셈이더냐.”
“…….”
“다시 돌아올 것이더냐.”
아틸라는 바토리의 얼굴을 봤다.
그도 바토리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알았다.
사르데니야에 남는다 해도, 결국 자신은 떠날 것이다.
아틸라는 자신이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알고 싶었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동방으로 떠날 결심을 했다.
동방으로 넘어가려면 동쪽 수해를 건너야 한다.
대륙엔 수해의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역으로 동쪽 수해는 더욱 짙고 음산해졌다.
길고, 또 위험한 길이 될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도착한 동방의 땅엔 이계의 괴물이 득실거릴지도 모른다.
바토리는 사르데니야에 머물러야 한다.
‘아버지는 사르데니야를 부활시켰다.’
그렇게 아버지는 바토리의 바람을 이뤄 주었다.
아틸라는 바토리가 영겁의 세월 동안 사르데니야의 부활을 꿈꿨다는 것을 안다.
바토리를 데려갈 순 없다.
“펀치.”
아틸라와 바토리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펀치가 아틸라의 어깨 위에 올랐다.
그러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토리와 도롱뇽을 봤다.
도롱뇽은 이미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작별 인사는 없었다.
아틸라는 뒤돌아 걸었다.
얼마나 그렇게 걸었는지 몰랐다.
다만 날이 어두워지고, 다시 밝아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시간의 흐름만을 알 수 있었다.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공허했다.
그는 극도의 외로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의 가슴이 이성을 짓누르며 무언갈 결심한 순간, 심장은 뜨겁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펀치.”
반색한 펀치가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잠시 후, 아틸라는 거대화한 펀치를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 달리고 있었다.
해가 중천으로 떠오르고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할 때쯤, 아틸라는 저 멀리 여전히 그 자리에서 아이처럼 쪼그려 앉은 여자와, 그런 여자의 머리 위에 날개를 드리워 햇빛을 가려주는 검은 드래곤을 발견했다.
그녀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고개 든 그녀의 붉은 입술이 환희의 미소를 그렸다.
* * *
에필로그
크리엘도라 대륙이 어떻게 생성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오래전 크리엘도라 대륙은 요툰의 땅이었고, 주신 전쟁의 여파로 완전히 바뀌었다.
그 후로 많은 일이 있었다.
수해가 생성되고.
드워프를 조각한 세 명의 거인이 신에게 반기를 들기도 했으며.
대격변이라는 이름의 혼돈이 온 대륙을 뒤덮기도 했다.
“흐응. 역시나로구나.”
수해를 지나 도착한 동방의 땅엔 예상대로 이계의 괴물이 있었다.
놈들은 두터운 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을 습격해, 창검을 들고 저항하는 주민들을 향해 혀를 날름대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죽지 않을 것이다.
또한 머지않아 동방은 안정을 찾을 것이다.
나와, 나의 동료들, 그리고 아버지를 포함한 사도들이 서방 세계를 그렇게 만들었듯이.
그렇다.
이 세계는 우리가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만들었다.
“쓰러뜨릴 셈이더냐.”
“물론.”
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우툴두툴 혈관이 돋아난 안구가 타깃을 특정한다.
길게 찢긴 입가에 송곳니가 드러난다.
“간다. 바토리.”
괴물을 향해 달린다.
거대화한 펀치가 뒤를 따른다.
바토리의 마법과 도롱뇽의 브레스가 괴물들을 강타한다.
그럼에도 죽지 않는 괴물의 심장에 드라칼리온을 박아 넣는다.
콰드드드득!
그렇게 난.
“아우우우우우우!”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
- 지금까지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공^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