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 정복 (3)
달은 흐릿했지만 이곳저곳에서 타오르는 모닥불 덕에 군영은 대낮처럼 환했다.
아틸라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의 등장으로 나바라 진영은 활기가 넘쳤다.
프릴루이나와 카르노피아를 잃은 클라우디우스 제국군은 북으로 후퇴했다.
아틸라는 추격할까 생각했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발현했던 프릴루이나의 브레스가 도롱뇽의 날개를 얼려놓기도 했고, 또 오토와 루미니우스의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기에 다음을 기약했다.
나바라 병사들은 이미 전면전에 승리라도 한 것처럼 기뻐했다.
오토마이어 황제가 하사한 푸짐한 술과 고기 때문이다.
“으하하하! 술맛이 아주 기가 막히는군!”
“자! 한 잔들 더 하세! 이번 전쟁은 이미 이긴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맞아! 검은늑대의 아틸라와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돌아왔다고!”
“그 둘은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가장 가까운 친우이기도 하지! 듣기론 수없이 많은 위험과 고비를 함께 넘기셨다 하더군!”
“북부에서 네 마리 드래곤이 나타났을 땐 정말 이제 다 끝이구나, 하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그때 딱!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등장하지 않았나! 난 정말 오줌을 지릴 뻔했다니까!”
“자네도 그랬나? 나도! 으하하하하하!”
병사들은 잔을 부딪치며 열심히 고기를 뜯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에 이런 자리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옳았지만, 오토는 지금이야말로 군의 사기를 끌어올릴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또한 적어도 수일 간은 클라우디우스가 섣부른 공격을 감행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도 있었다.
샤다이 황제는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대책을 마련하고 다시 전투를 시작하려면 제법 시일이 걸릴 터.
아니, 사실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오토는 그저 오랜만에 만난 옛 동료들과 함께, 이런 활기찬 분위기에서 술을 마시고 싶었다.
“으하하하! 아틸라 이 친구가 돌아오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소! 안 그렇소 황후! 으하! 으하! 으하하하하!”
오토가 아틸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껄껄 웃었다.
그는 아틸라가 했던 ‘친구’라는 말에 무척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그럼 나도 이제 황제 친구가 생긴 건가?’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오토의 광대가 승천했다.
오랜 시간 아틸라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아틸라가 자신을 향해 친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건 처음이었다.
말없이 술을 들이켜던 아틸라가 오토를 향해 스륵 눈동자를 굴렸다.
“치워라.”
“아 넵.”
오토는 아틸라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는 어색하게 얼굴을 긁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런 오토를 보며 카스피가 한숨을 뱉었다.
이전처럼 오토가 한심해 보여서가 아니다.
카스피는 황제의 면모를 보일 때의 오토와, 오랜만에 만난 아틸라 탓에 드러난 지금의 오토에게서 큰 간극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오히려 카스피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저러다 또 예상치 못한 순간에……, 하아아…….’
다른 병사들과 떨어진 커다란 모닥불 주위엔 오토, 카스피, 아틸라, 바토리, 도롱뇽, 펀치가 모여 앉아 있었다.
모닥불 위에선 토끼 고기가 노릇노릇 구워졌다.
키릴과 슈시아를 포함한 다른 동료들은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중이다.
그들과는 이번 전쟁을 마무리한 뒤 나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이렇게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있으니 옛 생각이 무럭무럭 나는 것 같소.”
오토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카스피도 웃었다.
오랜만에 만난 바토리와 카스피의 대화 소리가 음악처럼 공기를 울렸다.
조금 전부터 아틸라의 눈치를 슬슬 보던 오토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근데 아틸라 님.”
“왜.”
“그게 말이요. 음, 뭐시냐. 그게 그러니까…….”
아틸라는 저게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가, 하는 표정으로 오토를 돌아봤다.
“뭔데. 뭔데 또 콧구멍을 벌름거려.”
“그, 그러니까 아틸라 님의 말대로라면 우리 이제 친구 아니요.”
어색하게 입술을 옴지락대며 오토가 이어 말했다.
“그럼 말이우. 그…… 오래전에도 한번 했던 말이긴 한데…….”
주저하던 오토가 이윽고 무언갈 결심한 듯 크게 외쳤다.
“우, 우리 말이요! 이제 진짜 반말할 때도 되지 않았수? 치, 친구끼리는 원래 다 그러는 거 아니요!”
아틸라는 물끄러미 오토를 봤다.
그러고는 이 패영전 세계에 진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어느 밤을 떠올렸다.
그날 아틸라는 오토, 펀치와 함께 숲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오토가 도적단 두목에서 막 영주가 됐을 때의 일이다.
오토는 제 영지를 돌보지 않고 무작정 아틸라를 따라왔다.
‘걍 거기 있었으면 호의호식하며 살 텐데 왜 따라와서 그 고생을 하고 있냐.’
‘이게 무슨 고생이오. 몸에 맞지 않는 자리에 앉아 펜대나 굴리는 게 고생이지.’
모닥불을 피우느라 검댕이 묻은 오토의 얼굴이 떠오른다.
‘험험. 그리고 말이오 아틸라 님.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우.’
‘빨랑 말하던가 불이나 마저 피워라. 도적질로 먹고살았다는 놈이 불도 제대로 못 피우냐.’
‘그…… 우리 이만하면 서로 말 놓을 때도 되지 않았수?’
‘난 처음부터 놓고 있었는데?’
‘아니! 나 말이오 나! 이제서야 말하지만 나 37살이오! 게다가 이젠 귀족 나으리고 말이오!’
그날의 일을 떠올린 아틸라가 피식 입가를 올렸다.
새끼. 그때만 해도 파릇파릇한 30대였네.
아틸라로서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지은 기분 좋은 미소였다.
하지만 오토에겐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불안한 눈을 굴리던 오토가 제풀에 놀라 황급히 말을 정정했다.
“으하하! 노, 농담이요! 아무리 친구라도 예의는 지켜야 하는 법! 으하하하하!”
그러더니 시뻘게진 얼굴로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바토리와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던 카스피가 놀라 말했다.
“헉! 그럼 리베르는 지금 그 부활한 사르데니야의 왕성에 있는 거야? 혼자서?”
“그렇단다 카스피.”
“왜 안 데려왔어? 리베르의 마법 실력도 제법 쓸 만하잖아.”
바토리의 그림자에 가려 있을 뿐, 리베르가 엄청난 실력자라는 걸 카스피는 알고 있었다.
“그러려 했는데 리베르가 거절하더구나.”
“왜?”
“그야 당연히 나와 아틸라의 데이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겠느냐.”
아틸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바토리가 웃었다.
이전 같으면 그런 바토리를 손으로 밀어낼 아틸라였지만, 지금의 그는 그저 묵묵히 술을 마실 뿐이었다.
카스피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는 못 참겠다는 듯 도롱뇽을 붙잡아 콱 껴안았다.
“아아아앙! 너무 좋아!”
“켁! 이, 이거 놔라 살쾡이 미물! 놔라! 나 배 터진다!”
사실 리베르가 두 사람을 따라오지 않은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사르데니야의 결계는 그간 외부의 침입을 막는 보호막의 역할을 해 왔지만, 한편으론 아틸라, 바토리, 리베르를 가둬 두는 통제막의 역할도 했다.
물론 왕도는 넓었기에 답답함을 느끼진 않았다.
그러던 중 결계의 일부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감지한 바토리는 그 미묘한 틈새를 이용해 결계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만난 것이 지난번의 늙은 용병이었고, 그 짧은 만남이 원인이 되어 아틸라와 바토리는 이곳으로 왔다.
재밌는 사실은 사르데니야의 결계가 처음부터 존재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중간계로 돌아오자마자 아틸라는 샤를을 만나러 떠났었고, 그때는 결계가 없었다.
결계는 아틸라가 사르데니야를 벗어나자마자 생성됐다.
그리고 샤를을 만난 아틸라가 범선의 제작법이 쓰인 책을 건넨 후, 다시 공간을 무시하며 아틸라를 결계 안으로 빨아들였다.
“리베르는 왕국의 백성들을 모을 것이다.”
바토리의 말에 카스피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백성이라고?”
“지금의 사르데니야엔 사람이 없지 않느냐. 리베르는 사람을 모을 것이다. 그렇게 사르데니야는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진정한 부활을 맞이할 수 있겠지.”
무언갈 생각하던 카스피가 물었다.
“그, 그럼 바토리는 이제 다시 사르데니야의 공주……, 아니 왕이 된 거야?”
“별생각은 없었는데 리베르가 자꾸 권하더구나. 하지만 지금이라도 아틸라가 왕의 자리를 내놓으라 명한다면 내 언제든 포기할 생각이 있느니라.”
“필요 없다니까.”
아틸라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바토리는 이전에도 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고, 그때의 리베르는 기겁을 하며 극구 반대했다.
그러고는 죽일 듯이 아틸라를 노려봤는데, 그 얼굴이 떠오른 아틸라는 갑자기 조금 짜증이 났다.
“흐응. 리베르를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걘 충성심이 너무 강해서 그렇단다. 우리가 식을 올리면 분명 네게도 충성을 다 할 게다.”
“충성은 무슨. 필요 없다.”
그 말에 오토와 카스피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바토리는 분명, 식을 올린다는 표현을 썼다.
게다가 아틸라는 그 말에 딱히 거부 의사를 표하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두, 두, 두 사람 혼인하는 거요?”
오토가 물었고, 카스피는 두 손으로 제 볼을 감싸며 꺄악꺄악 소리를 질렀다.
바토리가 두 사람에게 미소한 뒤,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아틸라를 돌아봤다.
그러나 아틸라의 대답은 세 사람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는 것이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난 떠날 거다.”
* * *
패전 소식은 금세 샤다이 황제의 귀에 들어갔다.
황제는 당황했다.
상대를 압살하기 위해 네 마리 드래곤을 모두 투입했는데, 되돌아온 소식은 레드 드래곤과 화이트 드래곤의 죽음이었다.
‘카르노피아와 프릴루이나가 죽었다고?’
아벨과 에이스도 죽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블루 드래곤과 그린 드래곤은 살아 돌아왔지만, 지상군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지난 전투로 클라우디우스는 상당한 전력을 잃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북부는 나바라보다 비대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황제는 가슴속에서 이는 불안의 불씨를 털어 냈다.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황제에겐 아직 두 마리의 드래곤이 남아 있다.
드레이크를 포함한 여러 용족과 용기사가 남아 있다.
또한 제국 최강의 무력 집단인 황궁 기사단과, 그에 준하는 수많은 기사단이 있다.
거기에 더해 지난 수년간 소수의 요툰을 길들이는 데 성공한 북부 야만전사들도 있다.
황제는 요툰이야말로 드래곤의 가장 강력한 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대제국의 힘을 보여 주겠다. 오토마이어 나바라.’
황제는 요툰과 북부 야만전사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황제는 검은늑대의 아틸라가 북부 야만인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았다.
‘북부인들은 미개하다.’
그들은 오랜 세월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서로를 약탈해 온 민족.
그런 그들이 표면적으로나마 통합을 이룬 건 지난 수 년에 불과하다.
언데드 군단과 이계의 괴물이라는 공통의 적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나바라 제국이라는 새로운 적이 등장했다.
황제는 웃었다.
북부 야만인들은 클라우디우스를 위해 싸울 것이다.
황제는 대무신왕의 전설을 과소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