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 정복 (1)
“아 돌레비츠 쿠엣 에바니테.”
바토리가 발현한 고대 마법이 클라우디우스 제국군을 덮쳤다.
투명한 균열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불의 구체들.
그것이 북부의 병사와, 기사와, 용기사들의 몸을 활활 불태웠다.
북부의 마법사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마력을 하나로 합쳐 불길을 진화했다.
북부 마법사들은 크게 놀랐다.
‘저런 마법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가 없군……!’
‘난 알 수 있다. 저건 현시대의 마법이 아니야. 고대의 마법이다!’
‘남부엔 라일 플라마 말고도 저런 엄청난 마법사가 있었단 말인가.’
‘아니, 저자는 북쪽에서 블랙 드래곤을 타고 내려왔다. 그렇다면 설마 제국 북동쪽 고대 도시도……!’
그들의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이 이어졌다.
생각은 제각각이었지만 그중 하나의 공통된 의견이 있었다.
모두가 힘을 합쳐 싸우지 않으면, 저 무시무시한 남부의 마법사를 막을 수 없다는 것.
‘……빌어먹을.’
‘저 고집쟁이 영감탱이와 마력을 섞어야 한다고?’
‘벌써부터 욕지기가 치미는 기분이군.’
본래 마법사란 자존심이 강하고, 이기적인 존재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마법 세계를 탐구하고 확장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도, 다른 마법사와 협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남부보다는 북부에서 더욱 도드라지는 현상이기도 했는데.
이유는 중앙 마탑을 중심으로 불, 물, 대지, 바람의 4개 마탑으로 나뉜 남부와 달리, 북부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학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중엔 몇몇 유력 학파가 있고, 그들이 북부 마법계를 주름잡는 존재이긴 했다.
아무튼 그런 체제 탓에.
북부의 마법사들은 무소불위의 황명을 내려받아 마법사 부대를 운용하면서도 사실상 단독 행동이 많았다.
그러나 마법사들도 더 이상 자존심을 내세울 수는 없었다.
저 남부의 마법사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게 바토리는 의도치 않게 북부 마법사들의 일시적 대통합을 일궈 냈다.
“흐응. 힘을 합치니 제법 봐줄 만하구나.”
바토리는 웃었다.
그녀는 저들이 협력해도 자신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정도의 자신감과 실력이 그녀에게 있었다.
크리엘도라 북부와 남부 대륙을 통틀어 그 어떤 마법사도 바토리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살수의 암살 기도만은 조심해야겠지.’
바토리의 동그란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는 셰이카 라딤에게 완패한 적이 있다.
그것이 그녀의 조심성을 일깨웠다.
물론 바토리는 북부에 셰이카 정도의 실력을 지닌 살수가 있을 가능성은 낮다고 여겼다.
게다가 다시 셰이카와 맞붙는다 해도, 그때처럼 어이없이 당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그럼에도 바토리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감각을 곤두세우며 주위 기척을 살폈다.
바토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그녀의 모습에 다소 의외성을 느낄 것이다.
지금까지의 자신만만하고 여유롭던 모습과 달리 극도의 조심성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그것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난 이제 관조자가 아니다.’
* * *
천지의 합이 일어난 뒤 중간계는 많은 것이 변했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실질적으로 체감하는 건 역시 대륙을 뒤덮었던 수해의 상당 부분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북부와 남부는 이렇게 대전쟁을 벌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바토리에겐 수해가 사라진 것보다 더욱 큰 변화가 있었다.
바토리는 인간이 됐다.
‘내가, 다시 인간이 되었다고……?’
아틸라와 함께 가상 지구에서 중간계로 넘어온 직후, 바토리는 그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건, 바꿔 말하자면 리베르가 구슬로 변했다는 뜻이 된다.
게다가 바토리는 아틸라가 샤를의 눈을 통해 리베르의 죽음을 봤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두려움은 더욱 가중됐다.
‘이제 중간계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토리와 리베르는 ‘신(오르피나)’의 손길로 관조자가 되었다.
그래서 구슬로 변한 리베르를 되돌리는 데 ‘오르피나의 성물’이 필요했던 것.
하지만 이제 신은 없고 오르피나의 성물도 사라졌다.
정말로 리베르가 구슬이 되었다면 되살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전에 바토리는 리베르의 구슬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바토리의 걱정은 아주 어이없게 해소됐다.
키이이이잉!
머리 위로 빛줄기가 내려왔다.
빛줄기는 대지를 금빛으로 물들이며 확장됐다.
그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내린 거대한 물줄기가 대지라는 이름의 광활한 천을 순식간에 제 빛으로 적셔 가는 듯했다.
투트틋, 투트트틋…….
대지와 결합한 빛이 도로와, 건물과, 강을 만들었다.
그렇게 형성되는 아름다운 도시를 보며 바토리는 두 눈을 부릅떴다.
너무도 익숙한 풍경.
‘사르데니야.’
그랬다.
그것은 사르데니야의 왕도였다.
도시는 엄청난 속도로 건설됐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바토리는 사르데니야 왕성의 알현실에 서 있었다.
놀랍게도 알현실엔 어리둥절한 표정의 리베르가 있었다.
바토리가 달려가 그를 품에 안았다.
리베르는 살아 있었다.
- 이만 너의 세계로 돌아가렴. 그곳에 널 위한 선물을 준비했으니까.
그제서야 바토리는 엘이 말했던 선물이 무엇인지 알았다.
현시대에 부활한 사르데니야 왕국.
그리고 인간으로 되돌아온 자신.
‘네 소원은 이루어질 거야. 바토리.’
엘의 말대로 되었다.
사르데니야 왕국이 부활했다.
그리고 바토리는 인간의 몸이 되어, 아틸라와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완전하진 않다.
왕국은 껍데기만 부활했을 뿐, 그 속을 살아가던 사람들까지 되돌아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토리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이렇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만 네 형제를 놓아주거라. 도롱뇽아.’
도롱뇽은 코르키코스라는 이름의 죄책감을 마음속에서 지웠다.
그날, 바토리도 자신이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많은 사람들을 영원히 가슴 안에 묻었다.
죽은 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이 이 세계의 법칙이다.
바토리도 이젠 이 세계의 법칙을 따르는 자가 되었다.
그녀는 이 세계에서 관조자의 힘이 사라졌음을 알았다.
자신도, 눈앞의 리베르도, 더 이상 관조자가 아니다.
바토리는 인간이 됐다.
그녀의 목숨은 하나다.
그 하나의 목숨으로,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과 현시대를 살아갈 것이다.
스스슷.
바토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자신을 습격하려는 살수의 살기를 감각했다.
바토리가 발현한 보호막이 살수의 단검을 막았다.
한 명이 아니었다.
네 명의 살수가 동시에 바토리를 습격했다.
바토리의 입꼬리가 비틀리듯 위를 향했다.
“무리 지어 덤비면 이길 것 같았더냐.”
살수들의 움직임은 전광석화 같았다.
그러나 바토리는 그들이 셰이카에 미치지 못하는 실력자라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바토리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강력한 살상 마법이 그녀의 몸에서 발현됐다.
그때 어디선가 날아든 새빨간 빛이 살수들을 습격했다.
그 공격에 북부의 네 살수는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헤헤. 바토리.”
히죽 웃으며 모습을 드러낸 건 카스피였다.
도롱뇽의 등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뒤, 바토리의 부탁을 받은 카스피는 펀치와 함께 적진으로 달려갔었다.
그런데 되돌아왔다.
“이 녀석들이 바토리를 노리는 것 같길래 따라왔어.”
카스피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나 그냥 바토리 곁에 있을래. 아무도 바토리를 못 건드리게 할 거야.”
바토리가 말해 주었기에, 카스피는 바토리가 더 이상 관조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토리가 신경 쓰였다.
“적진은 바토리가 밀어 버리면 되잖아. 게다가 최전방엔 키릴이랑 난쟁이 왕 아저씨도 있고. 난 여기서 바토리를 지킬래.”
마법사 암살 임무 역시 사바흐와 암부가 있다.
카스피는 바토리와 함께 있고 싶었다.
허락을 구하는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카스피가 바토리를 봤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바토리가 미소했다.
카스피도 헤헤 웃었다.
“근데 바토리는 인간이 됐는데도 얼굴이 그대로네? 난 피부가 막 푸석푸석해지는 것 같은데.”
비죽 입술을 내미는 카스피를 보며 바토리가 말했다.
“아니란다. 네 피부는 여전히 활기찬 빛을 머금고 있단다.”
“헤헤. 정말?”
바토리가 가상 지구로 떠나 있는 동안 중간계는 수 년의 세월이 흘렀다.
놀라운 일이었다.
바토리가 가상 지구에서 머무른 시간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바토리의 눈에 비친 카스피는 수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보였다.
“이번 전투의 향방은 공중전에 달려 있겠구나.”
바토리의 시선이 머리 위를 바라봤다.
여섯 마리 드래곤이 피 튀는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카스피도 불안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 봤다.
그녀의 시선은 이제 아틸라보다는 오토에게 더욱 쏠려 있었다.
잠시 후 커다란 소음이 하늘 위를 울렸고, 바토리가 입가를 올렸다.
프릴루이나가 지면으로 추락하고 있다.
아틸라가 승기를 잡았다.
* * *
퍼어엉!
도롱뇽의 초 레어 송곳 브레스가 프릴루이나의 복부를 관통했다.
이미 상처투성이였던 프릴루이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추락했다.
-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프릴루이나가 중얼거렸다.
그는 전의를 상실했다.
에이스가 죽었다.
아틸라의 손에.
- 에이스…….
프릴루이나는 자신의 목숨 또한 위태롭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요르문간드의 저주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의 브레스가 서로 간에 어떤 ‘상승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몸의 수복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프릴루이나는 그 힘의 정체를 유추해 봤고, 나름의 답을 구했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의 몸엔 요툰의 왕, 이미르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 강력한 피가 요르문간드의 저주와 반응하며 무언가 화학 반응을 일으켰을 것이다.
-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프릴루이나는 저만치 널브러진 에이스의 시신을 봤다.
에이스를 저렇게 만든 아틸라를 봤다.
프릴루이나는 수 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술을 사용해 자신의 등 위에 올라탄 아틸라.
그는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해 에이스를 압도했고, 숨통을 끊었다.
이어 그의 검이 자신의 비늘을 비집고 들어와 온몸을 난도질했다.
그 위로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의 브레스가 쏘아졌다.
그 인과로 자신은 추락했고, 이렇게 죽어 가고 있다.
퍼어어엉! 펑! 퍼엉!
드래곤들이 몸을 부딪히는 소리가 하늘 위를 울린다.
그러나 시력을 포함한 몸의 감각이 둔해진 프릴루이나는 작금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알 수 없었다.
프릴루이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뱉었다.
드라코니안.
모든 드래곤의 탄생에 모태가 된 존재.
저 존재는 너무도 강하다.
심지어 다른 드래곤과는 완전히 다른, 송곳처럼 날카로운 브레스를 끝도 없이 발현한다.
직접 맞붙어 보고 나서야 프릴루이나는 먼 옛날 요툰 전쟁 때의 공포를 떠올렸다.
싸우지 말았어야 했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와의 전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피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