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새로운 세계 (6)
마른하늘에서 천둥이 쳤다.
세 마리의 드래곤이 격돌하는 하늘.
드래곤의 발톱과 브레스가 서로를 공격했다.
오토는 카르노피아와 프릴루이나를 상대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분발했다.
그러면서 확실히 알았다.
루미니우스가 카르노피아와 프릴루이나보다 강하듯, 자신 역시 두 드래곤의 마스터보다 강하다는 것을.
오토의 눈이 아벨을 노려봤다.
그는 아벨을 알고 있다.
아벨 역시 오토를 안다.
카르노피아가 발현한 브레스를 루미니우스가 날개를 움직여 피했다.
그 자리로 프릴루이나의 발톱이 날아든다.
루미니우스도 마주 발톱을 뻗어 그것을 막았다.
프릴루이나가 으르렁대며 말했다.
- 그대는 어찌하여 남부인의 편을 드는 것인가. 루미니우스.
프릴루이나와 루미니우스는 오랜 세월을 알고 지낸 사이다.
그들은 먼 옛날 요툰 전쟁에서 함께 싸웠다.
- 북부인과 남부인은 원래 하나였다. 너 역시 잘 알고 있을 텐데. 프릴루이나.
프릴루이나가 발끈하듯 말했다.
- 신들께선 우리에게 북부의 용인을 도우라 명하셨다. 지금 그대가 하는 행동은 신들의 의지를 거스르는 것이다.
- 재미있군 프릴루이나. 난 그런 명령을 받지 않았다.
- 뭐라고?
루미니우스의 발톱에 빛의 힘이 깃들었다.
그것이 프릴루이나의 몸을 사납게 밀쳤다.
- 게다가 신들은 이미 이 세계를 떠났다. 더 이상 이곳엔 신의 자취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 프릴루이나. 넌 존재하지 않는 신의 그림자를 따를 생각인가.
- 신성모독이다! 루미니우스!
뒤로 밀려난 프릴루이나가 브레스를 쐈다.
루미니우스는 빠르게 몸을 움직였지만 완벽하게 회피하진 못했다.
트트트틋……!
루미니우스의 날개 일부가 얼어붙었다.
그것이 그의 기동성을 저하시켰다.
“아벨!”
프릴루이나의 마스터, ‘에이스’가 아벨의 이름을 외치며 검을 뻗었다.
에이스는 아벨과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었고, 얼음의 드래곤을 다루는 마스터답게 매우 차가운 인상을 풍겼다.
그녀의 검에서 얼음의 검기가 뿜어졌다.
반대쪽에선 아벨이 발산한 불의 검기가 쏘아졌다.
채채채챙!
화르르르르……!
루미니우스는 빛의 방패를 세웠다.
오토도 검기를 발산해 그들의 공격을 막았다.
이어 프릴루이나와 카르노피아가 동시에 루미니우스를 덮쳤다.
퍼어엉!
두 드래곤에게 공격을 허용한 루미니우스가 지면을 향해 추락했다.
그 광경을 나바라의 병사들도 봤다.
“화, 황제 폐하께서……!”
나바라 군의 사기가 꺾였다.
언뜻 팽팽한 접전을 이어가는 듯 보였지만, 역시 하나의 드래곤으로 두 마리의 드래곤을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그때였다.
타타타타타탓!
저만치에서 병사들의 머리와 어깨를 밟으며 달려오는 날렵한 그림자가 있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온 그림자는 군마를 탄 기사의 투구를 지르밟으며 하늘로 솟았고, 추락하는 루미니우스를 향해 사슬낫을 뻗었다.
“영주 나리!”
그 모습을 본 오토가 입을 찢으며 웃었다.
“살쾡이 암살자!”
촤르륵……! 오토의 오른팔에 사슬낫이 감겼다.
오토는 모든 힘을 오른팔에 집중했다.
힘차게 팔을 휘둘러 카스피의 몸을 끌어당겼다.
파아앙!
귀기에 감싸인 카스피의 몸이 공중으로 솟았다.
추락하는 오토와 루미니우스를 지나, 그들을 추격하는 카르노피아와 프릴루이나를 향해 올라갔다.
카스피의 몸에서 발하는 기운을 느낀 두 드래곤은 긴장했다.
게다가 아벨과 에이스 역시 카스피가 보통의 실력자가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아벨은 판단했다.
프릴루이나는 직전에 브레스를 사용했고, 따라서 브레스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끝나지 않았다.
반면 카르노피아는 브레스를 발현할 수 있다.
“간다. 카르노피아.”
아벨의 의지를 전해 받은 카르노피아가 아가리를 벌렸다.
지금의 카스피는 사슬낫을 손에서 놓은 상태다.
절대로 브레스를 회피할 수 없다.
그 순간 카스피가 카르노피아를 향해 오른손을 뻗쳤다.
그 의미 없어 보이는 동작에 아벨이 의문을 느꼈고, 카스피가 속삭였다.
“입 다물어. 빨간 도마뱀.”
두근.
아벨의 심장이 크게 울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벨과 이어진 카르노피아의 심장이 울렸다.
카르노피아는 그와 같은 감각을 처음 경험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자신의 심장을 움켜쥔 것 같았다.
그리고 카르노피아는 깨달았다.
브레스가 발현되지 않는다.
“카르노피아!”
그사이 카스피의 신형은 프릴루이나의 코앞까지 접근했다.
프릴루이나가 앞발을 휘둘렀다.
카스피는 표범처럼 날랜 움직임으로 그것을 피하고, 역으로 프릴루이나의 발톱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네. 프릴루이나의 마스터.”
프릴루이나의 머리 위에 꼿꼿이 선 채로 카스피가 말했다.
에이스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카스피를 봤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조금 전 카스피가 무언가의 힘을 발휘해 카르노피아의 브레스를 억제했다는 것을.
“너는 대체……!”
에이스는 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카스피의 폭풍 같은 공격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파캉! 캉! 카아아앙!
에이스의 몸이 크게 뒤로 밀렸다.
힘에서 뒤처지는 게 아니다.
완력이라면 전사인 자신의 우위에 있다.
그러나 카스피의 공격은 에이스의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전사도 아니고, 살수도 아니다.
“후……. 이제야 바토리의 마음을 알 것 같아.”
“그게 무슨……!”
카스피의 눈이 살기를 머금었다.
“감히 내 낭군님을 건드려?”
파카아앙!
카스피가 휘두른 귀수가 에이스의 몸을 날렸다.
프릴루이나의 몸에서 떨어지는 에이스의 가슴에서 핏물이 뿜어졌다.
프릴루이나가 소리쳤다.
- 에이스!
콰드득!
카스피의 귀수가 프릴루이나의 목에 박혔다.
치명상은 아니다.
드래곤의 비늘은 엄청나게 단단하다.
그래서 프릴루이나는 카스피를 무시한 채 에이스를 향해 날았다.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카스피는 왼손으로 사타나일을 들었다.
‘도와줘. 벨라.’
우우웅, 사타나일이 진동했다.
카스피는 귀수로 벌어진 비늘의 틈에 사타나일을 꽂았다.
프릴루이나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는 목에 박힌 자그만 날붙이에서 익숙한 기운을 감각했다.
- 요르문간드!
퍼어어엉!
카스피를 향해 불의 브레스가 쏘아졌다.
카스피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프릴루이나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황후!”
그것을 오토가 안전하게 받아냈다.
오토의 품에 안긴 카스피가 타오르는 눈으로 오토를 봤다.
“하아……, 황제 폐하.”
그러고는 냅다 고개를 뻗어 오토의 입술을 덮쳤다.
오토는 당황했지만, 이내 가슴에 불길이라도 인 것처럼 카스피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하아……, 황제 폐하……. 나머진 이따가…… 밤에…….”
“그때까지 기다리질 못하겠소! 황후!”
“하아……. 그렇다면 지금…….”
- 그,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오토마이어!
여차하면 자신의 등 위에 이불이라도 깔 기세인 둘을 향해 루미니우스가 다급히 외쳤다.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프릴루이나와 에이스가 부상을 입었지만, 카르노피아와 아벨은 여전히 건재하다.
카스피가 아쉬움의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나중에 이 노란 도마뱀 녀석도 한번 혼쭐을 내줘야겠다고.
- 프릴루이나가 몹시 화가 났군.
덜미에서 괜한 한기를 느끼며 루미니우스가 말했다.
그의 말대로 프릴루이나는 에이스가 다친 것에 분노한 상태였다.
프릴루이나는 목의 상처를 수복하려 했다.
그러나 몸 안으로 침투한 요르문간드의 저주가 그것을 방해했다.
- 너는. 어떻게 요르문간드의 힘을.
프릴루이나는 전투를 오래 끌어선 안 된다는 판단을 했다.
다른 무엇보다 에이스가 다쳤다.
당장 죽을 만한 상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얕은 상처도 아니다.
“쿨럭……!”
에이스의 입에서 핏물이 쏟아졌다.
그녀는 프릴루이나의 등 위에서 간신히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내가…… 이렇게 어이없게 당하다니……!’
에이스는 납득할 수 없었다.
기사로서의 역량만 본다면, 그녀는 아벨보다 뛰어났다.
그녀는 황궁 기사단 출신이었다.
그런데도 상대는 단 몇 합만에 자신의 몸에 치명상을 입혔다.
게다가 가장 두려운 건, 카르노피아의 브레스를 억제했던 저 알 수 없는 힘.
프릴루이나가 말했다.
- 저자는 귀살의 일족이다. 에이스.
“귀살의 일족?”
- 그러나 귀살의 일족에게 저런 능력이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군.
프릴루이나도 카스피가 카르노피아의 마력 운용에 개입했다는 것을 알았다.
저런 힘을 지닌 인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제서야 그들은 카스피가 어떤 방식으로 제국의 마법사들을 차례로 제거했는지 깨달았다.
‘그야말로 마법사들의 천적이라는 건가.’
에이스는 심호흡했다.
이것이 죽을 만한 상처가 아니라는 건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혔다.
여전히 승산은 이쪽에 있다.
게다가 클라우디우스 제국은 아직 완전한 힘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완전한 힘을 드러낼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에이스는 알고 있었다.
에이스의 입가가 위로 솟았다.
등 뒤를 날아오는 익숙한 기척이 프릴루이나를 통해 전해졌다.
루미니우스의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 오토마이어!
펄럭! 날개를 휘두른 루미니우스가 옆으로 물러났다.
저 멀리에서 날아온 물의 브레스가 직전까지 루미니우스가 있던 곳을 관통하며 지나갔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키랴랴랴랴랴랴!
어느샌가 모습을 드러낸 그린 드래곤이 나바라의 지상군에게 브레스를 쏘아대고 있었다.
오토는 얼빠진 얼굴로 그 광경을 봤다.
‘블루 드래곤과 그린 드래곤도 클라우디우스 제국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소문이오.’
사바흐의 말대로였다.
블루 드래곤과 그린 드래곤이 나타났다.
그동안 전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오토는 두 드래곤이 적당한 용인을 찾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두 드래곤의 등 위엔 보란 듯이 마스터가 서있었다.
오토가 킬킬대며 웃었다.
“……빌어처먹을. 4 대 1로 싸워야 한다고?”
이번만은 카스피도 크게 긴장했다.
카르노피아와 프릴루이나까지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길 수 없다.
“영주 나리……!”
카스피가 오토의 손을 꼬옥 잡았다.
오토도 카스피의 손을 강하게 맞잡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자칫 잘못하면 자신과 카스피를 포함해, 모든 나바라의 병사들이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 마리 드래곤은 오토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루미니우스를 노리며 사방에서 동시에 달려들었다.
루미니우스가 브레스를 쐈다.
오토가 검기를 방출했다.
카스피도 귀기 표창을 날렸다.
그러나 그 무엇도 드래곤들에게 치명상을 입히진 못했다.
나바라의 지상군들도 그 광경을 봤다.
“황제 폐하……!”
병사들은 망연자실했다.
이대로라면 황제가 죽는다.
그러던 중 한 병사가 하늘 저편에서 날아오는 검은 그림자를 봤다.
그 그림자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가까워졌고, 그 원인이 그림자에서 길게 뻗친 한 쌍의 검은 날개에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병사는 목이 터져라 그것의 이름을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