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 새로운 세계 (5)
루미니우스의 말대로였다.
오토는 하늘 저 멀리에서 날아오는 두 마리의 드래곤을 봤다.
오토가 히죽 웃었다.
“그래. 이제야 제대로 붙어 보겠군.”
오토에게 불리한 싸움이다.
아무리 루미니우스의 무력이 다른 드래곤보다 뛰어나다 해도, 두 마리 드래곤을 동시에 쓰러뜨릴 정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오토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차피 치러야 할 싸움이다.
나바라 제국에서 공중전이 가능한 건 자신뿐이다.
‘내가 쓰러뜨려야 한다. 카르노피아와 프릴루이나를.’
물론 슈시아의 발키리 부대와 라일의 마법사단은 드래곤에게 유의미한 공격을 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드래곤을 상대한다면 지상군이 무너진다.
클라우디우스는 남부 대륙의 모든 제국과 왕국을 합한 것보다 면적이 큰 대제국이고, 그만큼 군사력도 비대하다.
게다가 클라우디우스의 지상군엔 무익종 드레이크를 포함한 용족들이 다수 존재한다.
반면 나바라의 전투 코끼리 부대는 이제 이전만큼의 위상을 발휘하지 못한다.
지난 전쟁으로 상당수의 코끼리가 죽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급적 죽이지 말 것을.’
오토의 손에 죽은 코끼리 숫자도 상당했다.
하지만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최대한 빨리 처리한다. 우리가 놈들을 제거한다면 전황은 순식간에 우리 쪽으로 기울 것이다.”
전쟁은 나바라에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클라우디우스 제국은 일반 병사의 무력도 상당했지만, 빼어난 전투력을 지닌 기사와 지휘관이 나바라 제국보다 훨씬 많았다.
오토는 언젠가 아틸라에게 대륙의 강자를 구분하는 세 가지 등급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영웅(英雄) 등급.
전설(傳說) 등급.
마지막으로 신화(神話) 등급.
오토가 판단했을 때, 클라우디우스 제국엔 영웅 등급의 실력자가 많았다.
남부 대륙으로 온다면 왕국 하나는 충분히 주름 잡을 정도의 전사와 마법사들.
그러나.
나바라 제국엔 영웅 등급을 넘어서는 실력자들이 있다.
지난 전쟁에서 활약한 영웅들.
그중에서도 특히 카스피, 키릴, 슈시아, 라일은 ‘전설 등급’의 실력자가 아닐까, 오토는 생각했다.
- 너 역시도 전설이다. 오토마이어.
오토의 생각을 읽은 루미니우스가 말했다.
- 물론 황후의 실력은 나머지보다 윗줄에 있긴 하지만.
“빌어먹을. 나도 안다고 이 노란 도마뱀 놈아.”
오토가 킬킬대며 웃었다.
루미니우스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간다. 오토마이어.
루미니우스가 날개를 펴며 하늘로 솟았다.
* * *
클라우디우스 제국은 전쟁이 한창이었지만, 막상 일반 백성들은 전쟁의 기운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이유는 언데드 군단과의 전쟁이나 이계의 괴물 소탕 때와는 달리, 제국의 영토에서 치러지는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우스 제국은 나바라 제국을 침공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전선은 북으로 움직일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제국의 백성들은 긴 전쟁의 후유증에서 점차 벗어나, 일상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에 깃든 안정 때문일까.
백성들은 제국 북동쪽에 건설된 신비로운 도시에 관심을 가졌다.
“고대의 도시엔 아직 주민들이 없는 건가?”
“그렇겠지. 결계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하지 않나.”
“하긴 그렇군.”
사람들은 그곳을 ‘고대의 도시’라 불렀다.
도시를 관찰한 역사학자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저것은 먼 고대의 건축 양식이다’라는 의견을 표했기 때문이다.
화이트 드래곤 프릴루이나도 비슷한 의견을 피력했다.
- 난 먼 옛날 요툰 전쟁을 겪었다. 저것은 그 당시에 볼 수 있던 건축 양식과 상당히 흡사하다.
왜 고대의 도시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샤다이 황제는 도시에 대한 연구를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고대 도시는 강력한 결계로 둘러싸여 있었고, 당장 급한 일은 나바라 제국과의 전쟁이었으니까.
‘일단은 나바라를 장악한다. 고대 도시는 그 후에 연구해도 늦지 않다.’
샤다이 황제는 자신의 기억 중 상당 부분이 누락됐다는 것을 안다.
또한 그는 누락이 처음 시작된 시기가 선대 황제였던 아버지의 임종 시기와 겹친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충격 때문인가.’
샤다이 황제는 아버지를 존경했다.
그로 인해 발생한 쇼크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잘 되었군.’
황제는 고대 도시에 결계가 둘러진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여겼다.
그는 도시를 탐구한답시고 많은 모험가와 학자들이 그곳을 찾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진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황제는 더는 그곳에 군대를 주둔시킬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차라리 그 병력까지 남부 침공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
머지않아 황제의 군대가 고대 도시에서 철수했다.
간혹 도시 안쪽에서 젊은 남녀가 목격됐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했지만 흐지부지 사라졌다.
그렇게 고대 도시에 인간의 발길이 점차 사그라질 무렵, 한 모험심 많은 늙은 용병이 그곳을 찾았다.
말로만 듣던 고대 도시.
도시가 자아내는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에 용병은 감탄했다.
“내 평생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는 처음 보는구나.”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용병은 결계 바깥에서 천막을 치고 생활하며 도시의 전경을 감상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꿀같은 낮잠에 취해 있던 용병의 어깨를 누군가 툭툭 건드렸다.
“흠……. 흠냐……. 잘 자고 있었는…… 누, 누, 누구요?”
잠에서 깬 용병이 흠칫 놀라 물었다.
그의 눈앞엔 무시무시한 근육을 지닌 거구의 남자와, 이 세상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가 서있었다.
여자가 입을 열었다.
“이곳을 감시하던 군대는 어디로 사라졌느냐.”
여자의 말은 분명 제국어였지만, 묘하게 예스러운 맛이 있었다.
“다, 당신은 누구…….”
“어이 형씨. 군대 어디 갔냐고.”
남자의 공격적인 목소리에 늙은 용병은 바르르 몸을 떨었다.
그의 오랜 경험이 즉각적인 위험 신호를 보냈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저자는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살인마 중의 살인마다.
용병은 냅다 무릎을 꿇었다.
“모,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뭐?”
남자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여자가 말했다.
“네가 그리 무섭게 말하니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내가 뭘.”
“나야 이제 익숙해졌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 넌 인간이라기보단 한 마리의 몬스터와 다를 것이 없단다.”
남자는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을 움직였지만, 결국 긴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그 덥수룩한 수염도 좀 정리하자꾸나. 전엔 말끔하게 깎고 다니더니 이젠 도통 자기 관리를 안 하는 것이더냐. 다 잡은 물고기에겐 먹이를 주지 않는다더니, 네가 딱 그짝이로구나. 물론 난 지금의 네 모습도 나름 야성미가 있어 좋지만 말이다. 흐응…….”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두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본 늙은 용병도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 둘은 연인 관계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쉬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늙은 용병은 나름 많은 사람을 겪어봤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눈앞의 남녀처럼 이질적인 기운을 풍기는 연인은 본 적이 없었다.
‘여인은 마치 어느 고대 왕국의 공주 같구나. 그에 반해 남자 쪽은…… 응? 잠깐. 고대 왕국의 공주?’
용병의 머리에 무언가가 스쳤다.
눈앞에 보이는 고대의 도시.
저 멀리 도시 한가운데 우뚝 솟은 성.
도시 안에서 젊은 남녀를 봤다는 소문.
“서, 설마 당신들이……!”
그렇게 말하던 늙은 용병은 남자의 찌푸린 얼굴을 보자마자 즉각 태도를 바꿨다.
“화, 황제의 군대는 모두 철수했습니다. 드, 듣자 하니 이곳에 둘러진 결계 때문에 더 이상 주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소문입니다. 철수한 군대는 아마 남부 제국 침공전에 투입했을 겁니다. 암요. 분명 그럴 겁니다.”
그러자 남자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남부 제국 침공전? 아인하르트 제국은 사라지지 않았었나?”
“무, 물론 아인하르트 제국은 소멸했습죠. 하지만 아인하르트의 해방된 속국들과 몇몇 왕국을 흡수한 새로운 제국이 탄생했습니다.”
“새로운 제국? 그게 어딘데.”
“나바라 제국입니다요.”
“……뭐?”
남자가 여자의 얼굴을 돌아봤다.
여자도 남자의 얼굴을 마주 봤다.
그렇게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들이 동시에 한숨을 뱉었다.
“이거 좀 빌립시다. 형씨.”
남자가 늙은 용병의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았다.
용병이 히익! 비명을 지르며 이마를 땅에 박았다.
“사, 살려 주십시오! 묻는 말엔 뭐든지 답하겠습니다! 두, 두 분을 여기서 봤다는 것도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제발 목숨만은……!”
그러나 늙은 용병이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사각사각, 익숙한 소음만이 머리 위를 울릴 뿐이었다.
용병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여자가 든 손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을 면도하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면도가 진행될수록 늙은 용병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남자의 얼굴이 생각보다 앳되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면도를 마친 남자의 얼굴은 이십 대 후반처럼 보였다.
우락부락한 덩치가 아니었다면 그보다 어리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고맙소. 날을 잘 갈아두셨군.”
남자가 용병에게 단검을 건넸다.
그러고는 뒤돌아 고대의 도시를 향해 걸었다.
그런 남자에게 팔짱을 끼며 여자가 말했다.
“흐응. 역시 난 지금의 네 모습이 좋구나.”
“도롱뇽하고 펀치는.”
“성루 위에서 낮잠이나 자고 있지 않겠느냐.”
“밥은 먹고 가야겠지?”
“그리하자꾸나. 먹어야 힘도 나는 법이니.”
“메뉴가 뭔데.”
“어제 먹던 김치찌개가 조금 남아 있단다.”
“딱 좋군.”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던 남녀가 도시 속으로 들어갔고, 점점 작아지며 사라졌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던 늙은 용병은 흠칫하며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놀란 눈으로 달려가 남녀가 사라진 곳을 살폈다.
그러나 결계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뭐, 뭐지……? 내가 귀신에라도 홀렸던 건가……?”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평생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본 적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남자 또한 신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의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늙은 용병은 그런 남녀를 처음 보았다.
그러나 천막 앞에 떨어진 면도의 흔적을 발견한 순간, 용병은 자신이 헛것을 본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 고대 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젊은 남녀의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어!”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늙은 용병은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거대한 블랙 드래곤이 조금 전의 남녀와, 자그만 새끼곰 한 마리를 태운 채 도시를 빠져나와 용병의 옆을 스쳤다.
그는 저 드래곤을 본 적이 있었다.
수년 전 언데드 군단과의 전투에서 놀라운 활약을 펼쳤던 최강의 드래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한껏 귀찮음을 표하는 드래곤의 눈과, 무심한 남자의 눈과, 장난기를 머금은 여자의 눈이 늙은 용병의 눈과 마주쳤다.
여자는 검지를 세워 자신의 입술에 가져가며 싱긋 웃었다.
늙은 용병도 떨리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가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