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417화 (417/425)

417. 새로운 세계 (4)

몇 해 전, 클라우디우스 제국은 언데드 군단과의 대전쟁으로 영토 일부가 크게 손상됐다.

에레트리아 군주령을 비롯해, 수많은 언데드의 시체로 뒤덮인 광활한 대지는 한동안은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땅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곳에서 살아가던 많은 주민들은 다른 군주령으로 이주했다.

그렇게 제국 극북부의 ‘죽음의 땅’처럼 황폐화된 그곳에서, 어느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키이이이잉!

하늘에서 거대한 빛줄기가 내려왔다.

얼마나 거대했는지, 그 빛을 다른 군주령의 주민들이 육안으로 확인했을 정도였다.

‘저, 저게 뭐지……?’

‘설마 또 그날과 같은……!’

주민들은 공포에 빠졌다.

그들은 ‘검은 하늘의 날’을 겪은 이들이었고, 그래서 그날의 공포가 재발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소식은 머지않아 황성으로 들어갔다.

샤다이 황제는 지체 없이 용기사들을 출동시켰다.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백성들의 걱정대로 검은 하늘의 날이 재발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단독 행동은 금한다. 명령 없이 움직이지 마라.”

용기사들의 지휘관은 레드 드래곤 카르노피아의 마스터, 아벨 카리누스.

아벨은 다른 용기사들과 함께 빛줄기가 떨어진 장소로 날아갔다.

제국 북동부 수해와 멀지 않은 곳.

또한 언데드 군단과의 대전쟁으로 폐허가 된 그곳.

쉼 없이 날개를 움직여 도착한 그 장소에서, 아벨과 용기사들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도했다.

“저게 무슨……!”

잘 닦인 도로.

지금은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의 건축물.

마치 어느 고대의 왕도를 보는 것처럼 예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도시.

그 도시는 혼돈으로 가득한 작금의 대륙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곳에 있었다.

용기사들은 무엇에 홀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낙원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

정녕 이곳이 얼마 전까지 제2의 죽음의 땅으로 불리던 곳이 맞는단 말인가.

“……그, 그런데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질 않는데?”

“유령 도시인가?”

“어떻게 이런 거대한 도시가 하루아침에…….”

아벨의 진입 명령이 없었기에 용기사들은 대도시를 보며 저마다 중얼거렸다.

아벨은 안력을 높여 꼼꼼히 도시를 살폈다.

용기사들의 말대로 도시 안에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로도, 건물도, 모두가 새것이다.

심지어 도시의 하늘 위를 흐르는 구름마저 새것처럼 보였다.

저 멀리 구름 아래 고풍스러운 성이 보였다.

누가 보아도 이 아름다운 거대 도시의 군주가 기거할 것으로 예상되는 장소.

“내가 선두에 선다. 삼각 대형으로 뒤를 따르도록.”

아벨의 명령에 용기사들이 하늘 위로 입체적인 진을 만들었다.

아벨은 극도로 조심하며 전진했다.

말로 설명할 순 없었지만,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아벨은 눈앞의 낯선 도시로 진입할 수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둘러진 것처럼 무언가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다른 용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벨이 카르노피아에게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현상이지? 카르노피아.’

카르노피아도 알지 못했다.

다만 카르노피아는 저 보이지 않는 벽 안의 도시에서 가늠할 수 없는 먼 과거의 기운을 느꼈다.

* * *

셰이카 라딤에겐 ‘단주의 눈’이란 신비로운 힘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지닌 귀기를 이용해 짐승(주로 까마귀)의 정신을 일부 지배하고, 시선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다.

하싸씬의 단주 시절 셰이카는 그 능력을 활용해, 파문된 카스피의 성장을 지켜봤다.

그러나 셰이카의 모든 힘을 이어받은 카스피에겐 그 능력이 없다.

이유는 카스피에게 힘을 전달할 시점의 셰이카가 다른 능력을 습득하기 위해 ‘단주의 눈’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얻은 새로운 능력은 단주의 눈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그 능력을 활용해 셰이카는 바토리와의 대결에서 순식간에 우위를 점했다.

‘저 아이는 대체……!’

그것은 바토리로서도 처음으로 맛본, 믿지 못할 경험이었다.

셰이카는 바토리의 마법 발현을 강제로 억눌렀다.

그렇게 대륙 최강의 마법사였던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셰이카에게 변변한 대응도 못한 채 쓰러졌다.

아무리 마법사가 살수와 상성이 좋지 않다고 해도, 그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대륙의 어느 누구도 셰이카와 같은 힘을 지니지 못했다.

그 힘이 카스피에게 계승됐다.

극한으로 단련된 귀기를 무형의 칼날로 빚어 방출해 타깃의 마력 운용을 억제하는 기술.

물론 마력 운용을 저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러나 카스피 같은 초월적인 살수가 타깃을 처리하는 덴 전혀 부족함 없는 시간이기도 했다.

“크허억……!”

북부 제국의 마법사가 입에서 피를 뿜었다.

그는 자신의 심장을 뚫어버린 단검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이해할 수 없었다.

살수를 감지한 순간 방어 마법을 시전했지만, 발현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마법사는 평소 육체를 단련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마력을 단련해 강해진다.

바꿔 말하면, 마법사는 마력을 잃는 순간 일개 보병만도 못한 나약한 존재로 전락한다.

마법을 발현할 수 없게 되는 것.

마법사에게 그보다 공포스러운 순간은 없다.

“너…… 는…… 대체…….”

북부의 마법사가 바닥에 허물어졌고, 숨이 끊겼다.

그의 부릅뜬 눈은 마지막까지도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카스피는 전장의 혼돈 속으로 은신하며 다음 타깃을 찾았다.

피 냄새가 자욱하다.

병장기 부딪는 소음이 끊이지 않는다.

이계의 존재들로부터 가까스로 평화를 되찾은 인간들이, 어제를 잊고 서로를 공격한다.

카스피는 북부 제국군과 힘을 합쳐 언데드 군단과 싸운 적이 있다.

말 그대로 어제의 동맹이 오늘의 적이 된 것이다.

‘과연 북부 대제국이야. 저 정도 수준의 마법사가 끝도 없이 등장하다니.’

* * *

클라우디우스 제국과 나바라 제국 간의 전면전.

그것은 레드 드래곤 카르노피아와 화이트 드래곤 프릴루이나가 기습적으로 나바라의 국경을 침공하며 시작됐다.

키랴랴랴!

키랴랴랴랴랴!

불과 얼음의 브레스.

서로 상반되는 두 힘이 나바라의 영토를 몰아쳤다.

키릴을 위시한 성기사단과 국경 수비대, 그리고 라일이 파견한 마법사단이 두 드래곤을 상대로 싸웠다.

나바라는 클라우디우스에 비해 공중 전력이 취약하다.

그렇다고 없는 드래곤을 만들어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바라는 강력한 지대공(地對空) 무기를 제작했다.

오직 드래곤만을 쓰러뜨리기 위해 만들어진 압도적인 살상 병기.

“조준! 발사!”

키릴의 외침과 동시에 엄청난 크기의 작살이 공중으로 쏘아졌다.

크기만 큰 것이 아니다.

라일을 포함한 여러 우수한 마법사들의 비전이 담긴, 마력의 작살.

콰드드득!

그것이 화이트 드래곤의 한쪽 날개를 관통했다.

화이트 드래곤이 비명을 질렀고, 그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북부 제국의 두 마스터는 주춤했다.

심장에 관통되기라도 했다면,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아벨은 나바라 제국이 대 드래곤전을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것을 알았다.

‘저런 무기를 만들었다고……?’

사실 그 무기는 나바라 제국이 독창적으로 생각해 만든 건 아니었다.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이름을 지닌 이 엄청난 병기를 처음 구상하고 만든 건,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와의 전투를 대비했던 과거의 제롬이었다.

제롬은 아틸라의 도움으로 샤를이 범선을 만들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드래곤 슬레이어의 제작법이 기술된 책을 남부 항구도시의 어느 은밀한 장소에 숨겨 두었다.

샤를의 예지안에 의하면 머지않아 하싸씬의 단주가 된 사바흐가 이곳을 찾을 것이고, 그 책을 발견해 카스피에게 전달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은 카스피를 통해 오토에게 전해졌고, 드래곤 슬레이어는 실체화됐다.

물론 상당한 마력이 담겨야만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무기였기에 대량 생산은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단 두 대의 드래곤 슬레이어가 북부 제국의 드래곤들을 주춤하게 했고, 덕분에 나바라 제국은 큰 피해 없이 반격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작이 바로 카스피였다.

‘어, 어디서 공격하는 건가!’

‘빌어먹을! 보이지 않아!’

카스피는 단신으로 북부군에 침투해 지휘관들을 암살했다.

아틸라, 샤를, 바토리가 없는 이 세계에서 카스피를 저지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남부의 위대한 영웅인 오토, 슈시아, 라일, 크누트조차 일대일로는 카스피를 제압할 수 없다.

카스피는 인간이면서도 인간을 초월한 자.

그녀는 셰이카의 전성기를 뛰어넘었다.

대륙 최강의 생물인 드래곤과도 정면 승부를 벌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바로, 카스피다.

‘내게도 드래곤 한 마리만 있다면 정말 두려울 게 없을 텐데.’

내심 카스피가 아쉬워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너무 눈에 띄는 존재인 드래곤은 살수인 그녀와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 전쟁을 빠르게 끝내려면 북부의 핵심 인물들을 제거해야 해.’

사실 카스피는 북부 제국의 황성으로 잠입해 황제를 암살할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오토가 강력하게 만류했다.

오토는 종전을 원하는 것이지 정복을 원하는 게 아니다.

황궁 기사단 또한 보통의 실력자들이 아니다.

물론 카스피의 실력이 그들보다 우위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오토는 카스피를 그런 위험한 곳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카스피는 오토의 말을 듣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때마침 오토가 황제의 진면목을 드러냈고, 그래서 카스피는 다시금 달뜬 한숨을 뱉으며 오토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었다.

두 눈을 부릅뜬 채 숨이 끊긴 북부 마법사를 보며, 카스피가 다시금 뜨거운 숨을 뱉었다.

‘하아……. 그날 밤은 정말 잊히지가 않아.’

카스피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카스피는 그동안 남자를 몰랐다.

오토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된 남자는 신비롭고, 따스했으며, 또한 중독적이었다.

카스피는 문득 뱃속에서 이물감을 느꼈다.

‘……응?’

가만히 배를 만져 봤다.

그녀의 발달된 감각이 몸 안을 탐색했다.

하지만 딱히 감지되는 것은 없었다.

착각이었던 건가?

“무슨 일이지? 카스피.”

사바흐가 카스피의 곁에 나타났다.

이번 마법사 암살 임무는 카스피 혼자가 아닌, 사바흐와 새로운 암부가 함께했다.

스승의 얼굴을 본 카스피가 흠칫 놀라며 두 팔을 내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 배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이라니까요!”

서둘러 은신하는 카스피를 보며 사바흐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살기 어린 눈을 뜨며 중얼댔다.

“빌어처먹을 오토마이어 새끼. 결국 저지른 거냐.”

* * *

난데없는 한기를 느낀 오토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카스피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루미니우스와 함께 전장을 지휘하고 있었다.

- 무슨 일이냐. 오토마이어.

“비, 빌어먹을 나도 모르겠다. 갑자기 몸에 한기가 쫘악 도는 게 웬지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 감이 좋군.

“뭐?”

- 앞을 봐라. 카르노피아와 프릴루이나가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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