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415화 (415/425)

415. 새로운 세계 (2)

605.24제곱 킬로미터.

대한민국 서울시의 면적이다.

김도현은 태어나 한 번도 서울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는 서울이라는 울타리 밖에도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직접 육안으로 본 적은 없다.

TV나 인터넷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했을 뿐.

그럼에도 김도현은 서울 바깥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현대 사회는 과거와 다르다.

직접 두 눈으로 보지 않고도 세계의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지구 바깥의 세상에 대해서도 인류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

그런 지구의 주위를 도는 것은 달이다.

김도현은, 아니 아틸라는 서울로 돌아왔다.

이유는 모른다.

‘슬슬 떠나야 할 시간이구나.’

‘또 다른 장소의 내가, 혼돈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거든.’

그 말을 끝으로 아버지가 사라진 후, 아틸라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눈을 떠 보니 익숙한 장소였다.

야옹.

뽀얀 털뭉치가 한가로이 다가와 종아리에 뺨을 문지른다.

“……고양이.”

고양이의 이름은 고양이다.

왜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는 모른다.

고양이의 세계 속에서 아틸라가 사라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양이는 쩌억 하품을 하며 앞발을 들어 아틸라의 허벅지를 벅벅 긁었다.

여전히 그의 다리를 스크래처로 사용하는 건방진 녀석이다.

“…….”

아틸라의 앞엔 전신거울이 있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다.

아무렇게나 풀어진 긴 머리.

옷으로 감출 수 없는 단단한 근육.

거울이 드러낸 존재는 김도현이 아닌, 아틸라다.

“너,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거냐?”

야옹, 고양이가 대답한다.

아틸라는 거울 속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는 처음으로 아틸라와 김도현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주방으로 걸어가 고양이 사료를 꺼냈다.

기다렸다는 듯 고양이가 앵앵대며 보챈다.

“알았으니까 기다려.”

고양이 밥그릇에 사료를 붓고, 물도 갈아 준다.

고양이가 뇸뇸뇸 소리를 내며 앙증맞게 밥을 먹는다.

아틸라는 그 옆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고양이의 식사를 지켜본다.

고양이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부드럽다.

펀치와는 달리, 아주 부드러운 털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틸라의 생각이 어머니에게 닿았다.

고양이가 있다면, 어머니 또한 계실지 모른다.

아틸라는 옷장을 열어 단벌 코트를 꺼내 입었다.

이렇게 몸이 커졌는데 신기하게도 잘 맞는다.

치렁치렁한 긴 머리는 뒤로 모아 대충 고무줄로 묶었다.

외출 전 마지막으로 거울을 본 아틸라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얼굴과 몸은 아틸라인데, 옷은 김도현의 것을 입고 있다.

야옹.

신발을 신고 나가려는데 고양이가 엉겨 붙는다.

평소라면 신발장 앞에서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을 녀석이 저러고 있다.

잠시 무언갈 생각하던 아틸라는 신발장에서 고양이 가슴줄을 꺼냈다.

그것으로 고양이의 몸을 단단히 고정하고, 줄의 끝을 쥔 후 다른 손으론 이동장을 들었다.

이 녀석은 산책이 가능한 흔치 않은 고양이다.

“어머. 고양이다.”

“귀여워라.”

밖으로 나오자 행인들이 고양이에게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아틸라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

아틸라는 알고 있다.

저들은 가상의 지구를 살아가는 가상의 인간들이다.

아틸라는 문득 이 세계와 주변인들이 움직이는 흑백사진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부르르릉.

고양이를 이동장에 넣고 버스를 탔다.

빈 자리에 앉아 차창 밖을 바라본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익숙한 풍경이 네모난 창 너머를 휘익휘익 흘러간다.

그의 발달된 청력은 여러 소리를 감지했다.

기어봉 움직이는 소리.

방향 지시등 깜빡거리는 소리.

승객들이 스마트폰을 조작하는 소리.

버스가 멈추고, 앞문이 열리고, 새로운 승객이 올라탄다.

뒷문으로는 기존의 승객이 내린다.

아틸라는 생각한다.

저들의 머릿속엔 담긴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저들 스스로의 의지인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를 창조했던 아버지에게 주입 당한 가짜 의지인 것일까.

끼익, 드르드륵…….

버스에서 내린 아틸라는 고양이를 이동장에서 꺼낸 뒤 병원을 향해 걸었다.

고양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쫑쫑쫑 발을 움직였다.

고양이의 규칙적인 발소리가 기분 좋게 귀를 울린다.

예전엔 들을 수 없었지만, 지금의 아틸라는 조금만 주의를 집중하면 들을 수 있는 소리다.

“고양이는 출입 금지입니다.”

병원의 경비가 아틸라를 제지한다.

고양이는 동그랗게 눈을 뜨며 아틸라를 올려 본다.

그런 고양이를 아틸라도 말없이 내려 봤다.

녀석을 보니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아틸라는 고개 들어 경비를 봤다.

그 순간 경비의 얼굴에 혼란스러움이 차올랐다.

아틸라는 자신의 팔에 팔짱을 끼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그것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붉은색 코트를 입은 긴 머리의 여자.

목에는 하얀 머플러를 둘렀고, 코트 아래로는 살짝살짝 짧은 치마가 엿보인다.

반쯤 벌린 붉은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난다.

따스한 입김이 눈송이를 녹인다.

눈이 내린다.

겨울이다.

“이제서야 날 불러 준 것이더냐.”

바토리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달콤하다.

고양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손에 들었던 가슴줄도, 이동장도 사라졌다.

아틸라는 고양이가 바토리의 모습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머리를 스친다.

‘훗날 네가 만나게 되는 고양이는 바토리를 모태로 만들어졌다.’

“왜 아무 말도 없는 것이더냐.”

바토리가 장난기 어린 얼굴로 채근한다.

아틸라는 그런 바토리를 잠시 내려 보다가,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부드러운 촉감.

꽃잎 같은 향기가 콧속을 채운다.

아틸라는 바토리의 입술이, 얼굴이, 그리고 온몸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느낀다.

이어 그녀의 두 손이 자신의 등을 감싸 안는 것을 느낀다.

아틸라는 그녀에게서 살아있는 인간을 느낀다.

바토리는 ‘진짜’다.

이 흑백사진 같은 가짜 세계를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 속에서, 오직 그녀만이 진짜 인간의 체취를 흘린다.

“흐응…….”

바토리의 달뜬 숨결이 간지럽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들린다.

아니 그건 어쩌면 아틸라, 그 자신의 심장 소리일는지도 모른다.

아틸라는 천천히 바토리에게서 얼굴을 뗐다.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

그것을 들어 올리며 눈을 뜬 바토리는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다.

그녀의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린다.

그저 아틸라의 팔을 꼬옥 두 팔로 붙잡는다.

“드, 들어가셔도 됩니다.”

경비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틸라는 병원으로 들어갔다.

바토리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긴 복도를 걸었다.

어머니의 병실 앞에서 어머니의 이름을 확인한다.

한차례 심호흡을 한 뒤 문을 열었다.

덜컥.

창은 닫혀있다.

그럼에도 커튼은 흩날린다.

덩그러니 침대 하나가 놓여 있다.

원래 어머니의 병실은 개인실이 아니다.

그러나 아틸라는 그런 것에 별다른 의문을 느끼지 않는다.

“어머니.”

이번에도 대답은 없다.

아틸라 역시 예상하고 있던 일이다.

그저 어머니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침대로 다가가자 곤히 잠든 어머니의 얼굴이 보인다.

언제나와 같은 모습.

어머니의 얼굴은 그대로다.

다만 그 안에서 다른 존재의 낯익음이 느껴진다.

‘네 어머니는 오르피나를 모태로 창조된 인물이다. 그래야만 내가 남편으로서의 삶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어머니의 얼굴은 오르피나를 닮았다.

바토리도 그것을 느낀 모양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그곳에 서 있었다.

아틸라는 어머니의 얼굴을 손끝으로 만져 보았다.

어머니는 흑백사진 속에 있다.

그녀에게서 바토리와 같은 진짜 생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아틸라는 몸을 돌려 병실 문을 향해 걸었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 누가 와 있는 모양이구나. 도현아.”

아틸라는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다.

잠시 어머니를 바라보던 아틸라가 문 손잡이를 잡았다.

끼익, 문이 열렸고, 문밖엔 자그만 소년을 등에 업은 그보다 조금 더 큰 소년이 서 있었다.

아틸라는 둘을 데리고 병원을 나섰다.

병원 건물을 벗어나자 빨간 스포츠카가 눈앞에 보였다.

아틸라가 운전석에 앉았고, 휘둥그렇게 눈을 뜬 바토리가 옆자리에, 두 소년은 뒷자리에 앉았다.

아틸라는 익숙하게 차를 몰았다.

너른 도로를 달렸다.

주위에 차는 많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모두가 아틸라에게 길을 양보했다.

신호가 걸리는 일도 없었다.

190km.

210km.

230km.

250km.

270km.

속도는 계속해서 빨라졌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소란에 아틸라는 룸미러를 봤다.

두 소년에서 자그만 새끼곰과 도마뱀으로 모습을 바꾼 녀석들이 무섭다며 꽥꽥 소리를 치고 있었다.

아틸라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좌우의 사물이 길게 늘어지고, 흔들리더니 이윽고 벽처럼 변했다.

얼마나 더 그렇게 달렸을까.

아틸라는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뗐다.

브레이크 페달을 내려밟았다.

천천히 자동차가 멈춰 섰다.

서울의 끝을 나타내는 이정표가 보였다.

아틸라는 차에서 내려 그곳을 향해 걸었다.

바토리가 아틸라에게 팔짱을 끼며 달라붙었다.

도롱뇽을 등에 태운 펀치도 훌쩍 아틸라의 어깨 위로 뛰어올랐다.

구우웅…….

아틸라는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혔다.

벽 바깥으로는 분명 세상이 존재한다.

하지만 넘어갈 수 없다.

“지구의 경계로구나.”

바토리의 말대로, 아틸라는 이것이 가상 지구의 경계라는 걸 알았다.

아틸라는 몇 번이고 벽을 넘어가려 했다.

있는 힘껏 도롱뇽을 던져 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끼아옹!

저만치에서 펀치가 울었다.

아틸라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펀치는 바닥에 놓인 어느 낡은 책에 코를 댄 채 킁킁대고 있었다.

아틸라는 책을 손에 들고 내용을 살펴봤다.

바토리도 흥미롭다는 얼굴로 그것을 봤다.

“흐응. 배의 제작법이 기술된 책이로구나.”

그냥 배가 아니다.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중세 시대의 범선(帆船)이다.

책의 마지막 장엔 자그만 메모지 두 개가 꽂혀 있었다.

하나는 아틸라에게.

다른 하나는 바토리에게 쓰인 것이었다.

- 마지막으로 본 지구는 어땠니. 도현아.

아틸라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역시 그를 이 세계로 돌아오게 만든 건 아버지였다.

- 너에게 제대로 지구와 작별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 책은 네 형제에게 도움이 될 거다.

바토리도 자신의 메모를 읽었다.

- 아틸라와의 여행은 즐거웠니?

병원 앞에서의 일을 떠올린 바토리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 이만 너의 세계로 돌아가렴. 그곳에 널 위한 선물을 준비했으니까.

보이지 않는 벽이 일렁이며 차원의 문이 형성됐다.

아틸라는 저것이 크리엘도라의 세계로 진입하는 통로라는 것을 알았다.

뒤를 돌아봤다.

가상의 지구.

그러나 그에겐 한때나마 진짜 세계였던 그곳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바토리의 손을 잡았다.

어깨 위에 닿은 두 환수의 감촉을 느끼며, 그는 그들의 세계로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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