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천지의 합 (2)
두근, 바토리의 심장이 뛰었다.
엘의 마력이 개입에 성공했다.
그 말은 즉, 엘이 만든 ‘가상 중간계’가 ‘진짜 중간계’ 위에 덧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 안심할 수 없다. 혼돈은 엘로힘의 개입을 이미 깨닫고 있을 것이다.
루미니우스의 말대로다.
혼돈은 엘의 개입을 눈치챘을 것이다.
엘 역시 혼돈이 그럴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여기서부터가 진짜다.
- 충격에 대비해라.
차아아앙!
루미니우스가 펼친 빛이 장막이 거대한 보호막을 형성했다.
오토는 카스피를 감싸 안으며 자세를 낮췄다.
바토리와 키릴을 포함한 많은 기사와 병사들도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췄다.
어느 틈에 자그만 몸으로 돌아온 펀치도 바토리의 발치에 동글게 몸을 말았다.
쿠쿠쿵. 쿠쿠쿠쿠쿵.
루미니우스의 보호막 위로 갖은 충격이 가해졌다.
그때마다 땅과 공기가 진동했고, 지상의 병력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으으! 으아아아아!”
“며, 멸망이다! 세계의 멸망이라고……!”
“닥쳐 이것들아! 골드 드래곤이 우릴 지켜 주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는 거냐!”
누군가의 말처럼, 루미니우스의 보호막은 지상 병력을 안전하게 수호하고 있었다.
엘이 루미니우스의 마력에 힘을 보태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엘의 입장에서는 중간계에 간섭을 시작한 혼돈을 상대하고, 가상 중간계를 진짜 중간계와 바꿔치기해야 한다는 막중한 부담이 있다.
그럼에도 엘은 중간계를 보호하는 것에 힘을 분산했다.
그는 중간계를 지키길 원한다.
혼돈으로부터 완전하게 독립된 세상으로 거듭나길 원한다.
애초부터 가상 중간계를 만든 이유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그그……, 그그그그그……!
하늘에선 끝없이 빛이 폭발하고, 폭풍이 몰아치고, 벼락이 내렸다.
지상의 존재들은 하늘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오직 루미니우스만이 어렴풋이 현상을 감지할 뿐이다.
루미니우스는 아자젤과 정신의 일부가 연결돼 있다.
- 사도들이 엘로힘과 힘을 합쳤다.
사도들만이 아니다.
알테라, 샤를 아인하르트,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도 본능적으로 자신의 혼돈을 방출해 엘을 도왔다.
그 상황이 아자젤을 통해 루미니우스에게 전달됐다.
- 엘의 마력이 혼돈의 의지를 막아서고 있다. 알테라와 샤를 아인하르트의 힘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루미니우스는 엘의 의지가 혼돈의 의지에 접촉하는 것을 느꼈다.
엘은 혼돈을 설득할 셈이다.
그것은 인간의 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대화는 불필요하다.
혼돈은 오직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움직인다.
혼돈이 판단했을 때, 엘이 만든 가상 중간계가 완전한 세계라면.
그래서 불완전한 세계인 ‘혼돈의 울타리’와 합쳐졌을 때 충분히 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아울러 진짜 중간계가 ‘무언가의 결함’으로 완전함의 세계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면.
혼돈은 그 즉시 ‘진짜 중간계’를 포기하고, ‘가상 중간계’를 취할 것이다.
“아틸라……!”
흔들리는 바토리의 눈이 하늘을 바라봤다.
* * *
아틸라는 혼돈의 의지가 방어벽을 무너뜨리는 광경을 봤다.
바토리가 영원한 죽음을 각오하고 완성시킨 방어벽.
그러나 그것은 혼돈이 발생시킨 ‘천지의 합’을 아주 조금 늦추는 것으로 자신의 사명을 다한 채, 소멸했다.
아틸라는 엘의 마력이 하늘과 땅 사이에 펼쳐지는 것을 봤다.
그것이 지면에서부터 상승하는 혼돈의 마력진을 흡착했고, 하늘로 떠올랐다.
자리의 모든 이가 그 광경을 봤다.
샤를은 부릅뜬 눈으로.
도롱뇽은 어울리지 않게 해맑은 눈으로.
네 사도는 경외에 가득한 눈으로 하늘 위의 기적을 바라봤다.
“……엘로힘이시여.”
아자젤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틸라는 아자젤의 저런 얼굴을 처음 보았다.
오르피나도 아자젤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슬픈 눈으로 아틸라를 돌아봤다.
이 순간만큼은 아레스도 입을 다문 채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 아레스의 곁엔 포이베가 있었고, 그녀는 오르피나가 아틸라를 보던 것과 비슷한 눈으로 아레스를 돌아봤다.
그들을 보던 아틸라의 눈앞이 희게 변했다.
시력을 앗아갈 듯한 광채가 폭발하듯 번졌다.
그와 동시에 아자젤이 무어라 소리쳤고, 사도들이 마력을 발동시켰다.
아틸라는 저들이 엘을 조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틸라도 본능적으로 몸 안의 혼돈을 발산했다.
샤를과 도롱뇽도 조력을 시작했다.
그들 사이에서 빛이 폭발했다.
폭풍이 몰아쳤다.
벼락이 내렸다.
그 와중에도 아틸라는 엘의 모습을 봤다.
그의 몸에서 발산하는 가공할 마력과, 그가 만든 가상의 중간계를 눈으로 확인했다.
엘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그럼에도 보였다.
엘이 스르륵 눈동자를 움직였고, 그의 시선이 아틸라에게 고정된 순간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폭풍과 벼락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틸라는 끝없이 새하얀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현아.”
아틸라는 목소리를 향해 돌아섰다.
그곳에 엘이 있었다.
“용케 혼돈의 마력진을 막아 주었더구나.”
“……엘.”
“바토리는 무사하다.”
대답 없는 아틸라에게 엘이 이어 말했다.
“펀치도, 카스피도 목숨을 건졌다. 오토마이어와 루미니우스가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
“샤를이 본 미래는 거짓이었나.”
질문으로 답을 대신하는 아틸라를 보며 엘이 웃었다.
“거짓이 아니다. 물론 샤를은 혼돈의 힘에 개입당하고 있었지. 그러나 네가 그 아이의 내면을 흔들어 버린 뒤론, 진실의 미래만을 그 눈에 담았다.”
“하지만 바토리는.”
샤를이 본 미래 속에서, 바토리는 영원한 소멸을 맞이했다.
그것이 바뀌었다.
그렇다면 샤를이 본 미래가 거짓이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전에도 말했듯 예지의 힘은 완벽하지 않다. 너 또한 알고 있듯이.”
“하지만 당신은 결코 변하지 않는 미래도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틸라의 말대로, 엘은 사르데니야 왕국의 멸망과 샤를의 탄생이 불변의 미래였다고 말했다.
아틸라는 묻고 싶었다.
바토리가 영원한 소멸을 맞는다는 것이 가변적 미래였던 것처럼.
지금부터 벌어질 일 또한 변할 수 있는 미래인 것이냐고.
아니면.
결코 변할 수 없는 불변의 미래인 것이냐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도현아.”
이 새하얀 공간에 진입한 순간 아틸라는 알았다.
그는 엘을 통해 미래를 봤다.
그리 먼 미래는 아니다.
지금부터 수 시간에 걸쳐 벌어질, 아주 가까운 미래.
“가상의 중간계를 진짜처럼 둔갑하기 위해선 정녕 그 방법밖에는 없다는 건가.”
“혼돈이 진짜 중간계를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지.”
“당신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군.”
아틸라가 바라본 근미래.
그곳에 엘은 없었다.
아자젤, 오르피나, 아레스, 포이베도 없었다.
그제서야 아틸라는 오르피나가 왜 그런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봤는지, 그리고 포이베가 왜 오르피나와 비슷한 표정으로 아레스를 바라봤는지 알 수 있었다.
아틸라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자신은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제국의 황성에서 엘을 만났던 그 순간부터.
‘혼돈은 무질서한 공간, 시간, 육신, 그 밖의 모든 것을 의미하지. 아주 오래전, 혼돈은 자신이 끝없이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팽창한 자신이 분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지. 또한 분열할수록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는 것도.’
다음으로 엘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혼돈은 하나의 계획을 세웠다. 저절로 분열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을 분열시킨 뒤 모든 것을 하나로 합칠 생각을 말이야.’
혼돈은 자신을 분열시켰다.
훗날, 분열된 모든 것을 다시 하나로 되돌리기 위해.
그렇게 가장 먼저 혼돈에게서 분열된 존재가 바로.
‘혼돈은 자신과 유사한 힘을 지닌 분신(分身)을 분할했다.’
엘이다.
“사도들도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거군.”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었을 경우에 한해서이지만.”
“당신은 혼돈과 하나가 되는 건가.”
엘이 미소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겠지.”
“그게 무슨 말이지?”
“나 역시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아틸라는 말없이 엘을 노려봤다.
그 모습에 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독립된 세상으로 변한 중간계는 많은 것이 변할 것이다. 또한 많은 것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 중간계에서 사라질 여러 세계와 존재들은, 인간을 포함한 너희 지성 종족과 그리 큰 접점이 있지 않으니까.”
그 말과 동시에 아틸라의 시야가 확장됐다.
그는 마치 인공위성이라도 된 것처럼 크리엘도라 대륙의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중간계는 극도의 무질서 상태다.
중간계의 많은 것들이 가상의 중간계로 이전되고 있다.
남북을 가로막던 수해가 소실된다.
바다의 존재를 감춰왔던 대륙 끝단의 수해도 먼지처럼 흩어지고 있다.
북해의 하늘에서는 공중섬이 내려앉는다.
그렇게 완전한 세계를 이룩했던 진짜 중간계는 다시 일시적인 무질서의 세계로 접어든다.
혼돈의 야망을 피할 수 있도록.
그러나.
지금 아틸라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건 오직 하나였다.
‘이 세계에서 신과 악마는 사라진다.’
네 사도와, 엘 역시도.
아틸라는 화가 났다.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당신은 대륙을 지성 종족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시키고 있다. 그것은 옳은 선택인가.”
“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존재다. 본래 결정권자란 모두가 만족할 결과를 낼 수 없는 법이지. 난 결정을 내렸고, 후회하지 않는다.”
엘과 사도들이 지금껏 벌였던 일들을 선(善)이라 말할 수는 없다.
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악한 일도 서슴지 않았다.
아니, 애초부터 선악의 구분 따윈 무의미하다.
완벽한 선이나 완벽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의 상징인 ‘신(神)’과 악의 상징인 ‘악마(惡魔)’는 본래 하나였고, 불완전한 존재인 혼돈의 야망에 의해 탄생됐다.
최초의 인간은 신과 악마의 시체 속에서 태어났다.
인간은 태생부터가 모순인 존재다.
“하지만 도현아. 내가 중간계의 지성 종족들을 위한 미래를 만든 것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엘의 눈이 지그시 아틸라를 바라봤다.
아틸라는 그 눈빛에서 오래전 지구에서 보던 아버지의 모습을 봤다.
“너와 샤를이 살아갈 세계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왜 당신은.”
“그게 아버지의 마음이니까.”
엘이 씩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난 여기서 너와 대화하고 있지만, 동시에 다른 곳에선 샤를을 만나고 있다. 네가 나에게 소중한 아들인 것처럼, 샤를 또한 마찬가지거든.”
“당신의 아들은 샤를이다. 난 그저 분신일 뿐이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아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은 조금은 서운한 얼굴로 아틸라를 봤다.
하지만 잠시였고, 이내 시원한 미소를 입가에 걸며 머리 위를 올려봤다.
“슬슬 떠나야 할 시간이구나.”
어느새 머리 위 풍경이 변했다.
그곳에선 하늘과 땅에서 시작된 두 마력진이 서로를 끌어당기며, 거의 한 몸이 되어가고 있었다.
“또 다른 장소의 내가, 혼돈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거든.”
이별은 급작스러웠다.
아틸라는 뒤늦게 아버지를 불렀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