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412화 (412/425)

412. 천지의 합 (1)

빛이 감지된다.

바토리는 분해됐던 몸이 재구성되며 시력을 회복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를 다시 볼 수 있을까.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그렇게 다시 한번, 그를 느낄 수 있을까.

바토리는 그의 모습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찾을 수 없다.

눈앞이 부옇다.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주변을 둘러싼 핏빛 안개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시력과 함께 복구를 시작한 청력이 무언갈 감각한 순간, 가늘게 입술이 떨렸다.

그의 목소리.

아틸라의 목소리다.

“바토리!”

그 목소리가 작금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깨뜨리는 주문이라도 된 것처럼, 바토리의 시야가 개었다.

바토리는 한층 또렷해진 눈으로 아틸라를 찾았다.

그는 조금 전의 그곳에, 그대로 서 있었다.

바토리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틸라!”

그의 이름을 외치며 바토리는 생각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자신은 혼돈의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일곱 차례 목숨을 잃었다.

결코 부활이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자 급작스러운 공포감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이것은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완전한 소멸을 앞둔 관조자의 한낱 백일몽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토리는 영겁의 세월을 살아왔다.

그녀는 리베르와 더불어, 가장 오랜 시간을 살아온 관조자다.

크리엘도라 대륙의 그 어떤 지성 종족도 바토리만큼 오래 산 이는 없다.

그렇다면 죽음 직전에 떠오르는 과거 또한 많을 터.

그중 하나가, 이렇게 꿈의 형식으로 머릿속을 채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아틸라의 또 다른 외침을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 …… ……!”

바토리는 아틸라가 무어라 다급히 소리치는 것을 봤다.

여전히 그녀의 내면에 가득한 공포감이 잡음을 내며 목소리를 지운다.

바토리는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을 억누르며 아틸라의 입술을 읽었다.

카스피.

화륵…….

바토리는 등 뒤에서 익숙한 기척을 느꼈다.

아니, 그녀가 직접 느꼈다기보다는 손에 끼워진 시공추적의 반지가 그것을 알렸다.

바토리는 몸을 돌렸다.

타오르는 귀기로 온몸을 감싼 채, 짚더미처럼 털썩 무릎을 꿇는 카스피가 거기 있었다.

“헤헤……. 바……토리……. 미안…….”

푸욱, 카스피의 귀수가 지면에 꽂혔다.

카스피의 몸은 엉망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빛나는 또 다른 시공추적의 반지가 보였다.

언젠가 피핀과 제롬을 찾으려던 전투에서, 바토리는 카스피에게 시공추적의 반지를 빌려줬었다.

‘이번 전쟁이 마무리될 때까지만 내가 갖고 있을게. 그래도 되지? 바토리.’

“그것…… 봐 바토리……. 반지 덕에…… 바토리를 찾을…… 수 있었잖아…….”

그제서야 바토리는 깨달았다.

일곱 번의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

바로 그 시점에 카스피가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게다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모르지만, 카스피는 시공추적의 반지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추적했다.

시공추적의 반지는 카스피가 운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벨라가…… 알려…… 주…….”

무너지는 카스피의 몸을 바토리가 안았다.

서둘러 카스피의 몸에 보호막을 둘렀다.

카스피는 죽지 않았다.

바토리는 카스피의 몸이 왜 이렇게 엉망이 됐는지 알고 있다.

이곳에서 발하는 마력은 혼돈을 지니지 못한 이에게 치명적이다.

마력을 운용하지 못하는 자에겐 더욱 그렇다.

한편으로 바토리는 의문을 느꼈다.

카스피는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바토리는 방어벽이 생성되며 발산한 힘이 주위의 모든 것을 날려 버리는 것을 봤다.

그것은 왼팔에 혼돈의 힘을 일부 간직한 바토리조차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실제로 바토리 이상의 마력을 지닌 루미니우스조차 이곳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카스피가 흡수한 셰이카의 힘이 가능하게 만든 것일까.

아니면 요르문간드의 마력을 품은 사타나일이.

어찌 됐든 결론은 하나다.

‘넌 죽어서도 카스피를 지켜 주는 것이더냐. 셰이카.’

바토리는 카스피의 품 안에서 사타나일이 유달리 빛을 내며 진동하는 것을 봤다.

츠츠츠츳……!

바토리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살 타는 냄새.

바토리는 자신의 등이 타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방어벽이 완전체가 된 후, 이곳에서 발하는 마력은 더욱 강해졌다.

그것이 바토리의 피부를 태웠다.

그러나 바토리는 자신에게 보호막을 시전하지 않았다.

모든 보호막은 카스피를 위해 써야 한다.

“……펀치야.”

바토리는 카스피의 뒤에서 펀치를 봤다.

그제야 상황이 명확히 이해가 갔다.

카스피는 이곳의 상황을 몰랐을 터다.

그런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와 자신의 목숨을 끊어 주었다.

평소의 카스피라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이다.

바토리는 카스피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안다.

아무리 죽어도 되살아나는 관조자라 해도, 카스피가 직접 바토리의 목숨을 끊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네가 카스피에게 알린 것이더냐.”

놀랍게도 펀치는 이곳의 마력을 제법 잘 견디고 있었다.

펀치는 아자젤의 환수였고, 지금은 아틸라와 혼돈을 공유하는 사이다.

펀치의 몸 안에도 일말의 혼돈이 존재할 것이다.

다만 방어벽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의 마력 운용이 불가할 뿐이다.

끼아옹!

펀치가 바토리의 어깨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최대한 몸을 넓게 펼쳐 바토리의 등을 덮었다.

“날 감싸 주는 것이더냐.”

바토리는 왼팔의 마력을 개방해 카스피를 보호했다.

사실은 이곳에 남아 아틸라를 돕고 싶었지만 지금은 카스피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바토리는 고개 돌려 아틸라를 봤다.

그러고는 빠르게 마력진의 중심에서 벗어났다.

* * *

오토는 마력의 폭풍 속으로 뛰어 들어간 카스피와 펀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오토는 카스피의 진입을 만류했다.

그러나 카스피는 손에 낀 시공추적의 반지와 펀치의 다급한 행동에서 무언갈 감지했고.

‘이거 놔 영주 나리! 바토리를 구해야 한다고!’

그래서 온몸에 귀기를 두른 채 펀치와 함께 폭풍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오토도 따라 들어가려 했다.

루미니우스가 그것을 막았다.

루미니우스는 저 폭풍 속으로 진입할 수 있는 건 오직 혼돈의 마력을 지닌 이들뿐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오토는 루미니우스를 무시하며 폭풍 속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수 초도 지나지 않아 상당한 화상을 입은 채 밖으로 튕겨졌다.

“크윽……! 빌어먹을……!”

땅을 치며 분개하는 오토를 루미니우스가 치유했다.

- 귀살자 카스피는 무사할지도 모른다. 오토마이어.

충혈된 눈의 오토를 보며 루미니우스가 이어 말했다.

- 셰이카 라딤의 귀기는 다른 귀살자들과 달랐다. 그녀는 수차례나 ‘벽’을 뛰어넘은 특별한 존재였지. 인간이면서도 인간을 초월한 존재. 그런 자가 수많은 벽을 넘어 마주한 진리는 무엇일 것 같은가. 어쩌면 그것은 결국 혼돈일는지도 모른다.

“……뭐라고?”

- 저 강대한 폭풍의 주체는 혼돈이다. 내면에 혼돈을 간직하지 못한 존재는 안으로 진입할 수 없다.

루미니우스의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졌다.

- 신수 그리즐리는 혼돈을 간직한 존재. 그런 그리즐리가 귀살자 카스피를 선택했다. 아마도 녀석은 알아본 거겠지. 셰이카 라딤의 힘을 흡수한 그녀의 내면에 미약하게나마 혼돈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 그럼 살쾡이 암살자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는……!”

-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수 그리즐리와 귀살자 카스피는 폭풍 밖으로 튕겨나지 않았다. 그것은 즉, 그녀의 내면에 일말의 혼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토는 떠올렸다.

저 무시무시한 폭풍이 시작되며, 루미니우스와 자신의 몸은 사정없이 폭풍 바깥으로 밀려났다.

키릴, 슈시아, 라일, 크누트를 포함한 모든 연합군 병력과 제국군 또한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악마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카스피와 펀치는 달랐다.

그 둘은 튕겨났다기보다는, 거친 풍압에 밀려나는 오토를 향해 부리나케 달려왔다.

‘영주 나리이이!’

“그, 그래서 살쾡이 암살자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건가!”

조금 전 오토가 무리해서 진입했을 때도, 그는 무언가의 힘에 의해 밖으로 튕겨났다.

하지만 펀치와 카스피는 여전히 안쪽에 있다.

오토는 기대를 버리지 않은 눈으로 마력 폭풍을 봤다.

폭풍은 점점 거세졌다.

잠시 후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성해졌다.

구구구구구궁.

오토의 눈이 커졌다.

하늘과 땅을 덮은 마력진.

거울처럼 서로를 마주 보는 그것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토는 직감했다.

혼돈의 울타리와 중간계가 하나로 합쳐지려 하고 있다.

“저, 저게 무슨……!”

“하늘과 땅이…… 합쳐진다고……?”

“말도 안 돼……!”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병사들의 눈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들은 눈앞의 상황이 정확히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몰랐지만, 극도로 위험하다는 것만은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 방어벽이 붕괴했다.

루미니우스는 혼돈의 마력진을 방해하던 방어벽이 소실됐다는 것을 알았다.

오토도 그것을 느꼈다.

그 순간 오토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진동하는 마력의 폭풍 속에서 어떤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점점 커다래지며 가까워졌다.

이윽고 폭풍의 장막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이고 펀치야!”

그림자의 정체는 거대화한 펀치였다.

펀치의 등엔 카스피가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고, 그 뒤엔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피폐한 모습의 바토리가 카스피를 보호하고 있었다.

“사, 살쾡이 암살자! 바토리 아가씨!”

오토와 함께 루미니우스와 키릴이 달려왔다.

바토리는 자신보다는 카스피와 펀치의 치유에 집중해 달라고 말한 뒤,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 바토리의 뺨을 펀치가 핥았다.

“……다행히 시간이 맞은 게로구나.”

방어벽이 붕괴됨과 동시에 아틸라는 의지를 발현할 수 있게 되었고, 펀치를 거대화했다.

덕분에 펀치는 두 여인을 등에 태우고 보다 빠르게 마력의 폭풍을 벗어날 수 있었다.

위험천만했다.

아틸라와 펀치의 대응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카스피는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난 더는 안 되겠구나.”

바토리의 몸이 핏물로 변해 흩어졌다.

붉은 안개의 형태를 거친 그것이 다시금 바토리의 몸으로 부활했다.

바토리의 육체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정신적인 피로감은 중첩됐다.

“사, 살아난 거유?”

오토는 바토리가 부활하는 광경을 처음 보았다.

바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스피의 상태를 살폈다.

- 고비는 넘겼다.

루미니우스의 말에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하나로 합쳐지려는 하늘과 땅의 마력진을 봤다.

천지의 합(天地의 合).

오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엘에게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그 역시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또한 엘이 가진 비장의 수가 무엇인지도 알았다.

오토의 불안한 눈이 루미니우스를 돌아봤다.

루미니우스 역시 초조한 눈빛으로 두 마력진의 접근을 지켜봤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루미니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 엘로힘의 마력이 개입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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