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 바토리의 바람
바토리의 왼팔은 오르피나의 것이다.
그리고 오르피나는 엘의 권능을 일부 이어받은 네 사도 중 하나다.
따라서 바토리의 왼팔엔 미약하게나마 혼돈의 마력이 담겨 있다.
바토리는 그것을 알았다.
또한 아틸라, 샤를, 네 사도, 도롱뇽이 힘을 합쳐 구성한 방어벽이 혼돈의 마력진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끼어들었다.
바토리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혼돈의 마력을 발현하면, 자신의 왼팔을 포함해 몸에 무언가의 이변이 발생할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
바토리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혼돈의 마력을 취득한 게 아니다.
후유증은 거셀 것이다.
그러나 주저하지 않았다.
바토리는 저 마력진을 막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다.
그녀는 이 세계를 구원할 유일한 방법을 엘을 통해 들었다.
세계는 구원되어야 한다.
‘아틸라는 구원되어야 한다.’
바토리는 웃었다.
자신을 향해 다급히 소리치는 그를 보며, 그녀는 제 선택이 옳았음을 알았다.
왼팔은 이미 날아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감당할 수 없는 폭발의 전조가 전신을 휘감고 있다.
콰륵!
바토리의 육체가 분해됐다.
붕괴된 그녀의 육체가 핏물로 변했고, 붉은 안개의 과정을 거쳐 인간의 형태로 돌아왔다.
사라졌던 왼팔도 복구됐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
바토리는 방어벽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만둬! 바토리!”
아틸라가 소리쳤다.
그는 샤를에게 발현했던 심안을 통해 바토리의 미래를 확인했다.
바토리는 방어벽에 힘을 보태고, 다시 죽을 것이다.
그렇게 부활할 뒤 다시, 또다시 죽을 것이다.
일곱 개의 목숨을 소진할 때까지.
아틸라가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바토리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우드득……, 우득…….
아틸라의 두 발이 지면에 못 박힌 듯 고정돼 있었다.
아틸라만이 아니다.
함께 방어벽을 생성한 네 사도와 샤를, 도롱뇽도 얼음처럼 굳어져 있었다.
“비, 빌어먹을 바토리 할망구!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도롱뇽도 바토리의 생각을 읽었다.
도롱뇽은 용혈의 반지를 통해 수없이 바토리와 교감한 사이다.
바토리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주, 죽으면 안 돼! 바토리 할망구!’
도롱뇽은 코르키코스를 잃었다.
하지만 그에겐 아틸라를 포함한 동료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도롱뇽에게 특별한 존재는 펀치와 바토리다.
도롱뇽은 사르데니야 왕국을 멸망시켰다.
아무리 그것이 제 의지가 아니었다 해도 자신이 바토리의 왕국과, 부모와, 알고 지내던 대부분의 이를 멸살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도롱뇽은 그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래서 도롱뇽에겐 바토리가 특별했다.
도롱뇽은 이 전쟁이 끝나면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아틸라, 펀치, 바토리와 함께, 완전함의 세계가 된 중간계를 탐험하고 싶었다.
먼 옛날 코르키코스와 함께 그리했듯이.
“야, 야만 미물! 어떻게 좀 해 봐! 저러다 바토리 할망구 진짜 죽는다!”
아틸라도 그렇게 할 생각이다.
그러나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고개와 눈동자만을 가까스로 돌릴 수 있을 정도다.
혼돈의 마력진을 방어하는 방어벽은 그 정도로 시전자의 육체에 과부하를 일으켰다.
“움직이면 안 돼요. 김도현 씨.”
아자젤의 목소리가 들린다.
언제나 충만하던 그의 여유는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다.
아자젤은 초조한 상태다.
아자젤은 알고 있다.
‘여기서 알테라가 이탈하면 방어벽은 무너진다.’
자신을 포함한 네 사도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힘을 합하고는 있지만, 이 방어벽을 세운 주된 힘은 아틸라와 샤를의 마력이다.
그들만큼 강한 혼돈의 힘을 지닌 이는 이곳에 없다.
아틸라의 이탈은 방어벽의 붕괴로 이어진다.
엘의 ‘가상 중간계’가 업데이트되는 데엔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까지는 절대 아틸라가 움직여선 안 된다.
부드득……, 부드드득……!
그러나 아틸라는 자신의 의지를 바꾸지 않았다.
다만 혼돈의 마력진과, 그것을 막기 위해 발현한 방어벽이 아틸라의 두 발을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놨을 뿐이다.
강력한 속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은 아틸라와 샤를의 몸에 내재된 엘의 마력과, 그런 엘을 탄생시킨 혼돈의 마력이 충돌하며 발현된 속박이니까.
‘아무리 엘의 힘을 가장 진하게 이어받은 알테라라 해도, 저 속박을 깨뜨리지는 못한다.’
그것을 알면서도 아자젤은 불안했다.
게다가 방어벽은 아직 완전한 상태가 아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
아자젤의 외침과 함께 바토리의 왼팔이 분해됐다.
또 다시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몸이 두 번째 붕괴를 맞았다.
아틸라의 눈에서 혈관이 불거졌다.
도롱뇽도 눈을 희번덕거리며 자리를 이탈하려 했다.
그런 둘의 미묘한 움직임이 방어벽의 안정성을 흐트러뜨렸다.
아레스가 버럭 소리쳤다.
“가만히 좀 있어 이 멍청한 아들 새끼야!”
“가, 가만히 있기는! 저대로라면 내 친구 바토리가 죽는다고!”
“쟨 관조자잖아! 몇 번 더 죽어도 상관없다고!”
“그게 아닌 거 같으니 그러지! 카아앗!”
도롱뇽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아레스의 말대로, 바토리는 앞으로 몇 차례 더 죽어도 부활할 수 있다.
그것이 관조자다.
리베르가 살아 있는 한, 바토리는 앞으로 네 번 더 죽어도 부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리베르가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다.
도롱뇽은 이계의 존재들이 이곳만을 습격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놈들은 중간계의 다른 곳에서도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리베르 역시 위험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리베르는 이미 바토리보다 더욱 많은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아니지. 재수 없게 둘이 죽는 시간이 겹치면 그대로 끝이잖아!’
그 사실을 깨달은 도롱뇽이 바락 괴성을 질렀다.
“카아아아앗!”
도롱뇽은 온몸을 비틀며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아틸라도, 샤를과 네 사도도 하지 못한 일을 도롱뇽이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빌어먹을! 브레스라도 쏠 수 있으면 내가 죽여 주면 되는데!”
도롱뇽은 바토리의 죽음에 자신이 끼어들면, 바토리의 부활 가능 횟수가 초기화된다는 것을 안다.
아틸라 역시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니 그들을 포함한 이곳의 모든 이들은 방어벽의 구축에 온 힘을 퍼붓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 방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물론 아틸라도 그렇게 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이기어검의 힘을 활용해 보려고도 했으나 되지 않았다.
부드득……! 악다문 아틸라의 어금니에서 핏물이 흩어졌다.
아틸라는 샤를의 눈을 통해 주변을 살폈다.
오토와 카스피를 포함한 동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연합군과 제국군도 사라졌다.
마력진과 방어벽이 만들어 내는 가공할 힘이 그들 모두를 어딘가로 튕겨 내 버렸다.
바토리의 왼팔이 다시금 분해된다.
“야만……전사야…….”
피 칠갑을 한 그녀의 몸에 세 번째 붕괴가 찾아든다.
콰르륵!
아틸라는 산산조각으로 분해되는 바토리를 봤다.
그러면서 그는 샤를이 보는 미래를 탐색했다.
미래는 바뀌지 않았다.
이대로 바토리는 네 번 더 죽는다.
그렇게 그녀는 구슬로 변할 것이다.
물론 바토리가 구슬이 된다 해도, 리베르가 살아 있다면 바토리를 부활시킬 수 있다.
그러나 아틸라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샤를의 눈을 통해 확인했다.
바토리가 구슬이 되고, 머지않아 리베르도 죽는다.
중간계를 침입한 이계의 괴물은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니다.
놈들은 아직도 대륙 곳곳을 습격 중이다.
바토리 또한 그것을 느꼈다.
바토리는 첫 번째 죽음이 찾아들기 전부터 리베르에게 위험이 닥쳤다는 것을 알았다.
리베르는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고 있다.
다만 바토리보다 간격이 길뿐이다.
츠츠츠츠츳……!
바토리의 몸이 부활했다.
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직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모습.
그러나 아틸라는 저 모습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바토리의 왼팔이 다시금 분해된다.
이어 흔적도 없이 온몸이 사라진다.
콰르르륵……!
그렇게 바토리는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죽음을 맞았다.
다행인 점은 그녀가 부활을 반복하며 왼팔의 힘을 방어벽에 보탤 때마다, 방어벽의 마력이 확실하게 견고해졌다는 것이다.
여섯 번째 부활을 마친 바토리가 방어벽을 봤다.
그녀는 이제 한 번 정도면 방어벽의 마력이 완전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참으로 공교롭다.
여섯 번도 아니고, 일곱 번 힘을 보태야 방어벽이 완전해진다는 것이.
‘이것이 내 운명이었단 말이더냐.’
바토리의 입술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은 이제 영원히 사라진다.
그러나 아틸라는 구원받을 것이다.
그는 혼돈에게 이용당하던 길고 긴 연쇄를 끊고, 중간계와 자신을 구원할 것이다.
그렇게 바토리 또한 자신의 바람을 이룰 것이다.
바토리의 눈에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아니다.
자신의 바람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영원한 소멸을 목전에 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진정한 바람은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은 이기적이다.
결코 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대의 같은 것으로 움직인 적이 없다.
자신은 사르데니야의 부활을 꿈꿨고.
오직 그것만을 위해 영겁의 세월을 인고했으며.
아틸라를 만난 뒤론, 그와 함께 인간의 삶을 사는 미래를 꿈꿨다.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더냐. 어리석은 망국의 공주야.’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두 뺨을 적셨다.
떨리는 붉은 입술이 수없이 같은 말을 되뇐다.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콰르륵!
바토리의 왼팔이 분해됐다.
그것으로 그녀는 방어벽이 완전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바토리는 혀끝으로 진한 피 맛을 느꼈다.
강렬한 폭발의 전조가 몸을 감쌌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틸라의 일그러진 얼굴과 온 시야를 눈사태처럼 내리치는 핏물이었다.
“바토리이이!”
콰드득!
그녀의 시야가 암흑으로 덮였다.
* * *
관조자는 불사의 몸을 지녔다.
살아 있는 파트너의 마력이 죽은 파트너의 육체를 수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엔 어떤 전제가 붙는다.
관조자를 살해한 자의 존재감이 확실해야 한다는 것.
쉽게 말해, 자살한 관조자는 부활할 수 없다.
만약 이 전제가 없었다면, 관조자는 자살이라는 방법을 통해 무한정으로 제 몸의 부활 가능 횟수를 초기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바토리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는 일곱 번 죽음을 맞았고, 그 사이 누구도 자신의 부활 가능 횟수를 초기화시켜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피와 눈물로 얼룩진 시야는 최후의 순간에 아틸라의 얼굴을 비추지 못했다.
다만 목소리만을 들었을 뿐이다.
‘바토리이이!’
그 목소리를 끝으로 그녀의 시야가 암흑으로 덮였다.
마지막에 그의 목소리라도 들은 것으로 바토리는 만족하기로 했다.
‘나는 이제 무(無)로 돌아간다.’
여전히 가슴은 슬픔으로 가득하지만, 바토리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의아함을 느꼈다.
낯익은 기분.
자신의 몸에서 무로 돌아가려는 낯선 감각은 감지되지 않는다.
그저 익숙한 감각이 몸 안을 휘돌고 있을 뿐이다.
바토리의 눈이 커졌다.
몸이 수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