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 최후의 전쟁 (7)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가상의 지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일이다. 지구는 오직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정된 세계였지. 하지만 중간계는 다르다. 지구보다 더욱 넓은 공간과 더욱 많은 생명을 필요로 하지. 그뿐 아니라 가상의 중간계는 혼돈의 야망을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의 완전한 세계여야 한다.”
엘의 계획은 이랬다.
혼돈이 자신의 울타리와 중간계를 합치려는 순간, ‘진짜 중간계’를 ‘가상 중간계’와 바꿔치기한다는 것.
터무니없는 계획처럼 들렸다.
엘의 말처럼, 가상 중간계를 만드는 건 가상 지구를 만드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난도 작업일 것이다.
게다가 혼돈을 속일 수 있을 정도의 완전한 세계여야만 한다니.
“난 이미 대부분의 작업을 완료해 두었다. 너와 샤를의 격돌로 중간계가 완전한 세계가 되는 순간, 내가 만든 가상 중간계 또한 완전한 세계로 업데이트될 것이다. 다만 그것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지. 만약 그사이 혼돈이 마력진을 펼쳐 울타리와 중간계를 합치려 한다면.”
“한다면?”
엘이 씩 웃으며 답했다.
“누군가는 시간을 벌어 줘야겠지.”
* * *
그날의 일을 떠올리던 바토리가 표정을 바꿨다.
신과 악마들의 마력이 하늘의 찢김 현상을 더 이상 방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아틸라와 샤를이 발산하는 마력 폭풍이 그것을 막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저 어마어마한 힘으로도 부족할 정도로 다른 세계의 침입은 거셌다.
끼긱……, 끼기기기긱……!
찢긴 하늘의 틈새가 더 벌어졌다.
구멍이 넓어진 만큼 더욱 거대한 존재들이 중간계를 침범했다.
네 사도가 그들을 공격하는 것이 보였다.
사도들은 더 이상 하늘의 구멍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중간계로 침입하는 존재들을 사력을 다해 막았다.
이계의 존재들은 이공간과 중간계를 가리지 않고 침투했다.
어쩌면 저 이계의 존재 하나하나는 각기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생김새의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
이쪽 세계의 인지를 아득히 넘어섰다는 것이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다.
“우리도 간다. 바토리 할망구.”
이계의 괴물들을 향해 도롱뇽이 날았다.
오토와 루미니우스는 지상으로 떨어진 괴물들을 처치하며 연합군을 보호했다.
거대한 괴물은 신과 드래곤이, 작은 괴물은 연합군과 제국군이 맡았다.
하지만 전황은 좋지 않았다.
이계의 괴물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다.
다행인 점도 있었다.
괴물들은 서로 싸우기도 했고, 언데드 군단은 괴물을 상대로 상당한 전력을 보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병사들은 그러지 못했다.
“으으……! 저걸 어떻게……!”
“싸워! 찌르라고!”
“놈들도 불사신은 아냐! 어떻게든 상처를 내면 죽을 거다!”
그들은 용기 있게 괴물들과 싸웠지만, 능력이 미치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질 것이다.
보다 못한 오토가 루미니우스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병사들과 함께 땅을 밟으며 괴물들과 싸웠다.
“검을 들어라! 내가 선두에 서겠다!”
오토의 검기가 세 마리의 괴물을 한꺼번에 베었다.
오토는 몸을 아끼지 않고 선두에 서서 괴물들을 도륙했다.
그 모습에 연합군의 사기가 올라갔다.
시기 좋게 키릴이 외쳤다.
“오토마이어 왕을 따르라!”
“우와아아아아!”
오토마이어를 외치는 병사들의 함성 소리가 쩌렁쩌렁 공기를 울렸다.
* * *
‘……?’
샤를이 순간 멈칫했다.
자신을 공격하는 아틸라의 안구에 일순 검은자위가 돌아온 것 같았다.
‘설마……?’
샤를은 다시금 아틸라의 얼굴을 확인했다.
검은자위는 보이지 않는다.
터질 듯 불거진 혈관만이 가득할 뿐이다.
역시 착각이었나, 생각한 순간.
“샤를.”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를의 눈이 커졌다.
아틸라의 목소리.
하지만 아틸라는 분명 순도 높은 버서커의 광기에 빠져 있다.
그런데 어떻게.
콰아아아앙!
샤를이 보인 일순의 틈을 드라칼리온이 노렸다.
드라칼리온의 검신이 샤를의 흉부를 타격했고, 샤를은 요정의 마력과 대악마의 마기로 둘러싸인 보호막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껏 이 순간만을 노려온 듯한 일격.
그 충격이 샤를의 몸을 진동시켰다.
샤를은 자신의 내면이 흔들리고,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새로운 미래를 봤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미래.
그 미래 속에선 중간계가 혼돈의 힘에 삼켜지고 있었다.
‘이건……?’
샤를은 변화한 미래를 탐색했다.
아틸라와 검을 부딪는 자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마력 폭풍.
그것이 만들어 낸 거대한 균열.
아틸라와 검을 섞을수록 폭풍은 강해진다.
균열도 더욱 거대해진다.
그렇게 팽창한 균열이 이계의 겹침을 몰아낸다.
샤를은 아틸라가 했던 말의 의미를 알았다.
‘너와 내가 한배를 탄다면 이 세계는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
샤를은 아틸라와 함께하며 중간계를 완전함의 세계로 바꾸려 했다.
그것이 중간계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미래를 보는 그의 눈이 찾아낸 해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전의 충격으로 미래가 바뀌었다.
새롭게 바뀐 미래에선 이전의 결과가 삭제돼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틸라의 일격은 강력했지만 샤를은 특별한 부상을 입지 않았다.
상처 입은 건 오히려 아틸라 쪽이다.
그리고 둘의 싸움은 여전히 호각을 다투고 있다.
그런데 직전의 충격 한 번으로 이렇게까지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말인가.
‘넌 혼돈에게 속고 있다. 샤를.’
두근, 샤를의 가슴이 뛰었다.
자신이 봐왔던 미래.
아틸라의 목소리는 그것이 혼돈에 의해 조작된 가짜 미래일 가능성을 수면 위로 떠올렸다.
샤를은 구토감을 느꼈다.
카앙!
아틸라의 공격이 샤를의 몸을 밀쳤다.
샤를은 달려드는 아틸라와 겹쳐지는 또 다른 아틸라를 봤다.
그가 말했다.
‘애초부터 너와 난 서로의 대적자로 예정된 존재다.’
‘끝내 나와 싸우겠다는 말인가. 아틸라.’
‘그래야만 너와 내가 바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다.’
아틸라의 말대로다.
자신과 아틸라는 서로 대적하고 있고, 그 충돌에서 발생한 방대한 에너지가 다른 세계의 겹침을 뒤집으려 하고 있다.
샤를은 혼란스러웠다.
아틸라와 동맹을 맺는 것이 중간계를 구하는 길이라 여겼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아틸라와 대적하는 것이 중간계를 구하는 길이었단 말인가.
무엇이 진실인가.
정말로 자신은 혼돈에게 속고 있었던 것인가.
어쩌면 지금 보이는 새로운 미래가 아틸라의 혼돈에 의해 조작된 것은 아닐까.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선택해야 한다.
새로이 다가올 미래는 파멸적이다.
혼돈의 울타리와 합쳐진 중간계는 더 이상 이전의 중간계가 아니다.
자신이 알던 중간계는 사라진다.
그곳을 살아가던 모든 생명과 함께.
샤를의 눈이 아틸라를 봤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맹공을 가하는 중이다.
아틸라는 점점 강해진다.
그에 따라 샤를도 강해진다.
그렇게 발산된 마력의 폭풍도, 그것이 집약된 균열도 더욱 강성해지고 있다.
‘아틸라는 불완전해지고 있다.’
샤를은 아틸라에게서 혼돈의 어둠을 느꼈다.
자신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힘.
샤를은 다시금 아틸라의 안구에 검은자위가 돌아온 것 같다는 착각을 했다.
퍼어어엉!
아틸라가 뻗은 검이 샤를을 튕겨 냈다.
샤를이 밀려난 만큼 아틸라의 몸도 밀렸다.
샤를은 아틸라의 눈동자를 봤다.
검은자위는 보이지 않는다.
착각이었던 건가.
자신을 부르던 아틸라의 목소리도 환청이었던 건가.
“……샤를.”
아니었다.
샤를은 똑똑히 들었다.
아틸라의 안구가 무섭게 흔들리며 검은자위를 드러냈다.
“……아틸라.”
아틸라의 검은자위가 조금 더 뚜렷해졌다.
그는 샤를과 겨루는 내내, 무의식의 세계에서 자신만의 사유를 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아틸라는 스스로를 잊었다.
자신과 맞서 싸우는 샤를도 잊었다.
아틸라는 무의식으로 사유했다.
자신이 저 사내와 싸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싸움의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계에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가.
길고 긴 사유의 끝에서 아틸라는 깨달았다.
자신이 샤를과 싸우고 있는 이유를.
이 싸움의 의미를.
아틸라는 샤를에게 심안을 발현했다.
심안은 통했다.
“너 역시도 깨달은 건가. 샤를.”
아틸라는 샤를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그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샤를은 혼돈의 울타리에서 벗어났다.
그는 이제 자신만의 의지로 미래를 볼 수 있다.
샤를은 제3의 눈으로 전장을 봤다.
그것을 아틸라의 심안이 공유했다.
츠츠츳……, 츠츠츠츠츳…….
이계의 괴물들이 흩어지고 있다.
괴물들이 나타난 곳은 이곳만이 아니다.
크리엘도라 대륙 전체를 놈들이 습격했다.
황폐화된 대륙이 보인다.
숲이 불타고 있다.
왕국이 무너지고 있다.
그렇게 수많은 인명이 죽어 간다.
연합군과 제국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얼굴엔 생기가 차오른다.
이계의 통로가 막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한 유일의 이유는, 아틸라와 샤를이 빚어낸 거대한 에너지 때문이다.
그그그그그그…….
두 전사의 깨달음이 더욱 방대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흩어진 에너지가 찢긴 하늘 위로 덮인다.
이계의 통로가 메워지고, 검은 장막이 사라진다.
“저, 저것 봐……!”
“하늘이……!”
털썩, 병사들이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되찾은 하늘엔 노을과 구름이 가득하다.
그들은 지금의 현실을 쉬이 믿지 못하는 눈치다.
그중 누군가가 이변을 발견했다.
“……?”
지면 위로 알아볼 수 없는 무늬가 새겨지고 있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도 비슷한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이 지면과 하늘을 빼곡히 채웠다.
아틸라와 샤를은 그 무늬의 정체를 알았다.
혼돈의 마력진.
“샤를!”
아틸라는 달렸다.
샤를도 달렸다.
그들은 직감했다.
혼돈은 지금, 자신의 울타리와 중간계를 합치려 하고 있다.
구우우웅…….
아틸라와 샤를이 공간을 넘어 중간계로 돌아왔다.
이공간에서 탈출한 네 사도와 악마들도 상황을 깨달았다.
그러나 악마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혼돈의 마력진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을 지닌 건, 마찬가지로 혼돈의 마력을 부여받은 자들뿐이다.
아틸라.
샤를.
엘에게서 힘을 부여받은 네 사도.
대악마 아몬의 힘을 흡수한 도롱뇽.
그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지닌 혼돈의 힘을 방출했고, 마력진의 완성을 가로막는 방어벽을 구축했다.
트트틋, 트트트트트틋……!
막아야 한다.
아니 늦춰야 한다.
이들은 머지않아 엘이 반격의 묘수를 꺼내들 것을 알고 있다.
그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력진의 완성을 방해해야 한다.
그러나 힘이 부족했다.
아주 약간의 힘이.
그때였다.
카카카카캉!
누군가의 마력이 방어벽에 합쳐졌다.
그리 대단한 마력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마력은 방어벽의 자그만 틈을 메꾸며 더욱 단단한 장벽을 구축하고 있었다.
샤를은 그 마력이 난입할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아틸라는 심안의 눈을 통해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봤다.
아틸라의 충혈된 눈이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그는 새로이 끼어든 마력의 주인을 돌아봤다.
피투성이가 된 인영.
왼팔이 송두리째 사라진 바토리가 거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