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 최후의 전쟁 (4)
그의 손엔 검이 쥐여 있었다.
드라칼리온.
이유는 모르지만 그 이름은 기억이 났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의 계기로 그렇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드라칼리온을 뻗는다.
드라칼리온은 날이 긴 검이다.
긴 것만이 아니라 무겁고 두껍다.
벤다기보다는 둔기처럼 때리는 것이 본래 용도일지도 모른다.
카앙!
내뻗은 드라칼리온이 상대의 검에 막혔다.
상대의 검은 가늘고 매끄럽다.
도저히 드라칼리온을 방어할 수 있는 검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는 그 가느다란 검으로 드라칼리온을 막고, 반격했다.
푸슈슛!
엷은 소음과 함께 이물감이 느껴진다.
상대가 뻗은 반격의 검이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낸 순간, 그는 쾌감을 느꼈다.
이상한 일이다.
상처를 입었는데 통증이 아닌 쾌감을 느끼다니.
그는 떠오르는 의문을 뒤로한 채 상대를 봤다.
휘날리는 금발.
바다처럼 푸른 눈.
그는 상대가 누구인지 모른다.
아름다운 사내다.
사내의 몸 주위엔 파릇한 기운이 번져있다.
그 너머로는 마치 혼돈의 우주를 보는 것처럼 시커먼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다.
콰콰콰콰콰콰……!
그는 의아함을 느꼈다.
눈앞이 붉다.
다른 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는 사내의 몸에서 발하는 푸른 기운과 검은 기운을 분명한 색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이내 그는 자신의 몸 주변에도 그 같은 기운이 존재한다는 걸 발견했다.
노을처럼 번지는 붉은 기운.
그 너머에서 휘몰아치는 검은 기운.
그는 그것이 사내의 몸에서 발하는 기운과 동류라는 것을 알았다.
쌍둥이처럼 같은 힘.
겉모습은 그렇지만 내면마저 같지는 않은 듯하다.
그냥 그는 그렇게 느꼈다.
누군가 이유를 따져 묻는다면 답하지 못할 것이다.
키리릭……!
사내의 검이 드라칼리온의 틈을 비집으며 들어온다.
그제서야 그는 왼손에도 검이 들려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무휼.
콰직!
무휼의 날이 사내의 검을 습격했다.
드라칼리온과 무휼을 가위처럼 교차한 그는 두 발로 땅을 짓밟으며, 하체로부터 발산된 용력을 양팔로 뻗었다.
그 가공할 힘이 사내의 몸을 강하게 튕겨 냈다.
주르르르! 뒤로 밀려나는 사내를 향해 그가 달렸다.
어찌나 과격하게 달리는지 시야가 인정사정없이 흔들린다.
진동하는 시야 너머로 자세를 정리하는 사내가 보인다.
그는 양팔에 힘을 주었다.
드라칼리온과 무휼을 휘둘러 사내의 목을 취하려 했다.
그러나 사내는 그림 같은 몸놀림을 펼쳐 그것을 회피했다.
엄청난 반사 신경이다.
그는 상대의 움직임에 놀라는 한편, 왜 자신이 저 사내와 검을 겨루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떠오르는 이유는 없다.
그저 온몸에서 끓어오르는 투쟁심과, 분노와, 아찔한 쾌감이 그의 몸을 강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본능이다.
이성이 사라진 자는 본능에 지배된다.
지금 그의 본능은 눈앞의 사내를 쓰러뜨리라 외치고 있다.
치르륵……! 카앙! 콰쾅! 콰콰콰쾅!
그의 청력이 어느 순간 활짝 개방되는가 싶더니 이전까지 들리지 않던 소음이 들렸다.
천둥이라도 치는 듯했다.
그는 고개 들어 하늘을 봤다.
그리고 이 거대한 소음을 발현한 것이 하늘이 아닌, 자신과 사내의 충돌로 빚어진 결과라는 걸 알았다.
* * *
오토는 부릅뜬 눈으로 하늘을 보고 있었다.
오토뿐 아니라 연합군과 제국군의 모든 병력이 같은 곳을 봤다.
“저, 저게 무슨……!”
하늘이 검게 변했다.
밤이 찾아온 것이 아니다.
깊이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그저 검은색으로 뒤덮인 하늘.
하늘만이 아니라 땅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풍경이 검었다.
그럼에도 군마를 포함한 주위 병사들의 모습은 대낮처럼 구분이 가능했다.
그렇게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진 세계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그그그……! 그그그그그그……!
하늘이 갈라지고 있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소름 끼치는 소음이 머리 위를 울렸다.
무형의 검은 하늘이 형태를 갖추며 찢겼다.
찢긴 하늘 너머로 사납게 소용돌이치는 미지의 공간.
그 사이를 비집으며 거대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저, 저게 뭐야……!”
“손……?”
사실 손이라기엔 기괴한 형태였다.
손가락이 무려 13개나 달려 있었으니까.
따라서 그것은 손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은 그것을 손이라고 단정했다.
그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것이 없었다.
끼기기기기긱……!
13개의 손가락이 하늘의 장막을 더욱 길게 찢었다.
연합군과 제국군은 서로를 향한 공격을 멈췄다.
직전까지의 혈전이 거짓말인 것만 같다.
그 정도로 하늘 위에 펼쳐진 광경은 현실성이 없었다.
“이 세계의…… 멸망인가.”
누군가 말했지만 답하는 이는 없었다.
오토는 이대로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 같다는 상상을 했다.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현재 중간계는 대격변의 영향으로 많은 세계가 중첩돼 있다.
실제로 13개의 손가락에 의해 갈라지는 검은 하늘 아래에선 여전히 신과 악마가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난무하는 이 세계에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정도는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닐 것이다.
“영주 나리!”
카스피가 루미니우스의 등으로 뛰어 올라왔다.
피투성이가 된 카스피를 보며 오토는 순간 움찔했지만, 그녀의 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한숨을 돌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영주 나리!”
카스피가 호들갑을 떨며 물었지만 오토라고 까닭을 알 리 없었다.
불안한 눈동자를 굴리던 카스피가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저길 봐!”
오토의 눈이 다시 하늘을 봤다.
하늘이 찢기는 현상은 점점 더 광범위하게 번지고 있었다.
신과 악마들도 더는 무시할 수 없었는지 하늘을 향해 각자의 마력을 퍼부었다.
직전까지 서로를 물어뜯던 그들은 새로이 등장한 공통의 적 앞에 일시적으로 단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신과 악마와 달리 지상의 병력들은 갈가리 찢기는 하늘을 멀뚱멀뚱 바라만 볼 뿐,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그그그그그……!
신과 악마의 마력이 흡사 찢어진 헝겊을 꿰매는 것처럼 하늘의 갈라짐을 복구했다.
그러나 잠시일 뿐이었고, 저 위대한 신과 악마조차 이 땅에 드리운 대격변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고작 신과 악마의 힘으로 대격변을 막을 수 있었다면 샤를이 그리하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그리고 샤를은 알지 못했다.
그가 아틸라와 맞붙으며.
아니 그의 ‘완전한 세계’와 아틸라의 ‘불완전한 세계’가 충돌하며 중간계에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는 것을.
“저건……?”
오토가 무언갈 발견했다.
그는 찢기는 하늘 아래 생성되는 새로운 변화를 봤다.
그것을 가장 먼저 감지한 건 직관의 눈을 가진 슈시아였다.
“오토! 카스피!”
슈시아가 루미니우스 위로 훌쩍 올라왔다.
직관을 발현한 그녀의 눈은 짙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공간이 뒤틀리고 있다. 이전에 아틸라와 샤를이 맞붙었을 때와 같은 현상이다.”
슈시아의 말에 오토와 카스피도 깨달았다.
샤를이 아몬의 힘을 각성하고 언데드 군단의 군주가 된 날.
그날 샤를은 아틸라와 숙명의 대결을 펼쳤고, 그 여파로 허공에 균열을 발생시켰다.
그 균열의 힘으로 수해의 일부가 사라졌고, 그 상황을 이용해 샤를은 북부 제국을 침공했다.
“그, 그렇다면……!”
“아틸라가 지금 샤를과 싸우고 있다는 거잖아 영주 나리!”
콰콰콰쾅!
갈라진 하늘의 틈새에서 벼락이 쳤다.
그중 어떤 것은 신과 악마의 이공간에 떨어졌고, 어떤 것은 지면과 부닥쳤다.
스스스……, 스스스스스…….
벼락이 내린 곳에서 이계의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생김새는 말로 설명하기조차 어려웠다.
이 세계의 인지로는 이해할 수 없는 외형.
“저, 저게 뭐야……!”
“뭐긴 뭐야! 괴물이지! 이, 이계의 괴물이라고!”
“마, 막아! 쓰러뜨…… 끄아아아아……!”
수해의 몬스터도, 칼날 산맥의 괴수도, 그렇다고 마계의 악마도 아닌 그들이 중간계를 침략했다.
* * *
샤를은 즐거움을 느꼈다.
아틸라를 죽이게 되는 단 하나의 미래.
그것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쉴 새 없이 검을 움직이며 샤를은 생각했다.
아틸라는 나와 함께해야 한다.
그는 나의 하나뿐인 형제다.
파카캉!
아틸라의 공격은 무시무시했다.
생각을 가늠할 수 없는 붉은 안구가 더욱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괴물을 상대하는 기분이다.
“후우욱……, 후욱……!”
아틸라의 입에선 끊임없이 붉은 입김이 뿜어졌다.
그것이 그의 몸을 감싸는 오러의 형태로 변했다.
아틸라가 움직일 때마다 붉은 잔상이 따라 움직였다.
그것과 약간의 차이를 두고 검은 마기가 휘몰아치듯 뒤를 따랐다.
샤를도 마찬가지다.
샤를의 몸에 안착한 요정의 마력이 푸른 잔상을 그렸다.
검은 마기가 한발 늦게 뒤를 따랐다.
콰쾅! 콰콰콰쾅!
둘의 대결을 먼발치에서 본다면, 마치 붉은 유성과 푸른 유성이 끊임없이 서로에게 부닥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실제로 바토리의 눈에 비친 둘의 모습이 그랬다.
바토리는 아틸라를 염려하면서도, 그가 내보이는 놀라운 힘에 감탄했다.
아틸라는 강하다.
지금의 아틸라는 고위악마를 넘어, 대악마를 포함한 그 어떤 신을 상대해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좋지 않다.
샤를은 모든 신과 악마를 통틀어 최강의 존재다.
게다가 하늘에서 벌어지는 이상 현상도 심상치 않았다.
“서두르자꾸나 도롱뇽아.”
“나도 알아! 카아앗!”
도롱뇽은 드라코리치를 노려봤다.
자신의 하나뿐인 형제 코르키코스.
그를 향한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니다.
도롱뇽은 여전히 코르키코스를 아낀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그와 함께 살아가고 싶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
코르키코스는 죽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언데드는 더 이상 코르키코스라 부를 수 없는 존재다.
놈은 드라코리치.
마왕의 환수다.
키랴랴랴랴랴랴!
도롱뇽의 브레스가 드라코리치를 습격했다.
그러나 위력이 부족했다.
도롱뇽은 드라코리치에게 몸의 상당 부분을 포식당했고, 그래서 약화됐다.
반면 드라코리치는 도롱뇽의 일부를 포식하며 이전보다 강해졌다.
드라코리치는 도롱뇽의 브레스를 견뎌 냈다.
그 위로 마멸의 칼날이 쏘아졌다.
카카캉!
마멸의 칼날이 드라코리치의 뼈를 부쉈다.
그녀의 마법은 드라코리치에게 통했다.
규격 외 강자들이 난무하는 이곳이었지만, 바토리 또한 규격을 벗어난 존재인 건 마찬가지다.
더구나 그녀의 곁엔 도롱뇽이 있다.
아틸라의 영향으로 광폭화한 펀치가 있다.
우어어어어!
펀치의 광폭화는 아틸라의 광폭과 동시에 발현되지 않았다.
샤를은 자신과 아틸라의 세계를 바토리, 도롱뇽, 펀치의 세계와 분리했었다.
그래서 아틸라의 광폭은 펀치에게 닿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 어느 때보다도 불완전한 강력함을 드러낸 아틸라의 ‘혼돈(混沌)’이 샤를의 완전무결한 ‘질서(秩序)’와 부딪쳤다.
그것이 분리됐던 세계를 다시 하나로 합쳤고, 펀치를 광폭화 상태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