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 최후의 전쟁 (2)
현실도, 그렇다고 완전한 환술도 아닌 세계.
그곳에서 두 전사가 검을 섞었다.
콰앙! 쾅! 콰르르르……!
둘의 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검이 닿을 때마다 하늘이 울리고 대지가 요동쳤다.
당연한 일이다.
두 전사는 인간이 아니다.
한 명은 최강의 악마 아몬의 힘을 각성한 요정과 악마의 혼혈.
다른 한 명은 인간의 육체를 지니고 있지만 내면엔 누구도 가늠하지 못할 혼돈을 간직한 존재.
재미있는 점은 대악마 아몬의 힘과 혼돈의 힘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두 전사는 다르면서 같고, 또 같으면서 다른 힘을 지녔다.
거울을 통해 보는 자신처럼.
모든 것이 똑같아 보이지만 실상 똑같은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하게 반전된 모습.
쉬이익!
샤를이 질풍처럼 검을 뻗었다.
아몬의 힘을 각성한 뒤 샤를은 한 번도 전장에 선 적이 없다.
그는 황성의 어둠에 틀어박혀 자신의 방대한 힘을 갈고닦고, 한계를 시험했다.
그 시간이 샤를을 더욱 완성된 전사로 만들었다.
그의 측근 중 하나였던 카르타고는 검신합일(劍身合一)의 경지를 이뤘다.
샤를의 경지는 그보다 높다.
카앙!
내뻗친 듀란달이 드라칼리온을 튕겨 냈다.
아틸라는 검이 아니라, 마치 검 모양의 대포알에 얻어맞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충격이 아틸라로 하여금 듀라칼리온을 손에서 놓치게 만들었다.
물론 아틸라의 왼손엔 여전히 무휼이 있다.
그러나 무휼만으로 지금의 샤를을 막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샤를은 카르타고를 뛰어넘는 검사다.
아틸라는 당황하지 않았다.
샤를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오히려 입가에 미소까지 머금었다.
‘샤를의 세계는 완전하다.’
군더더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검세.
아틸라는 자신의 목적에 한걸음 다가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멀어지는 드라칼리온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강한 의지를 발현해 드라칼리온을 불렀다.
아틸라는 카르타고와의 마지막 대결에서 이런 식으로 드라칼리온을 끌어당긴 적이 있다.
이후로 시도한 적은 없는 기술.
그러나 아틸라는 가능할 거라 확신했다.
구우웅.
묵직한 공명과 함께 드라칼리온이 순식간에 아틸라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전투를 시작한 이후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샤를이 얼굴빛을 바꿨다.
아틸라는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이것은 카르타고의 검신합일을 뛰어넘는 ‘이기어검(以氣馭劍)’의 경지였다.
콰쾅!
드라칼리온과 무휼이 힘을 합쳐 샤를의 공세를 막았다.
샤를의 검격은 무지막지했다.
아틸라는 샤를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버서커의 힘을 끌어내지 않은 상태라면 말이다.
‘기다려야 한다.’
아틸라는 아직 버서커의 힘을 발현하지 않았다.
그는 때를 기다렸다.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광폭의 권능을 발현할 수 있는 아틸라지만, 광폭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려면 사전에 육체를 혹사시킬 필요가 있다.
몸을 무작정 악화시키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아틸라는 그동안 샤를과의 대결을 대비해, 몸을 긍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애써왔다.
푸르손의 저주가 그것을 방해했지만, 결국 아틸라는 포이베의 도움으로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어 샤를을 만날 수 있었다.
아틸라는 샤를에게 집중했다.
버서커의 힘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몸을 예열시켰다.
어중간한 상태론 안 된다.
‘내 육체와 의지는 완벽하게 불완전한 세계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래야만 완전한 세계의 샤를과 충돌해 방대한 에너지를 폭발시킬 수 있다.
그렇게 이 세계를 뒤집어, 중간계를 완전함의 세계로 재구축해야 한다.
의식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린, 순도 백 퍼센트의 버서커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틸라의 발달된 감각은 그 지점을 찾을 수 있다.
파캉! 카아앙!
날붙이 부딪는 소음이 산맥을 울렸다.
아틸라는 방어를 등한시하고 보다 공격적인 태세로 전환했다.
그 탓에 아틸라의 몸엔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상처가 중첩됐다.
아틸라의 눈빛에 점차 광기가 자리 잡았다.
* * *
도롱뇽은 쇄도하는 드라코리치의 송곳니를 봤다.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피했다.
부웅.
바토리의 눈이 상황을 돌아봤다.
그녀는 샤를과의 전투가 이런 식으로 진행될 줄은 몰랐다.
샤를은 드라코리치를 떠났고, 먼 곳에서 아틸라와 검을 부딪치고 있다.
전장은 둘로 나뉘었다.
“도롱뇽아!”
도롱뇽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칼날 산맥에 진입한 이후부터 이상했다.
다만 바토리는 용혈의 반지를 통해 도롱뇽의 심중을 어렴풋이나마 감각할 수 있었다.
‘무엇이 널 그리 두렵게 만드는 것이더냐.’
도롱뇽이 드라코리치와 각별한 사이였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전까지 도롱뇽은 드라코리치에게 이렇게까지 정신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지금의 도롱뇽은 확실히 이상하다.
끼아옹!
펀치가 도롱뇽의 목을 탁탁 앞발로 때렸다.
바토리는 몰랐지만 펀치 역시 도롱뇽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고 있었다.
- 도롱뇽아.
- 내 친구 도롱뇽아.
도롱뇽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롱뇽은 마음의 문을 걸어 잠갔다.
그의 내면은 먼 옛날 코르키코스와 함께하던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도롱뇽의 눈에 비친 코르키코스는 아틸라 일행이 알던 드라코리치와 달랐다.
본래 드라코리치는 오직 뼈로만 구성된 외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코르키코스.’
코르키코스의 뼈 위엔 살과 근육, 그리고 촘촘한 비늘이 붙어 있었다.
몸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다.
여전히 몸의 절반 이상은 뼈가 드러나 보였고, 그 속엔 흐물거리는 장기의 일부가 자리했다.
그럼에도 도롱뇽은 그 끔찍한 외형에서 코르키코스의 옛 모습을 찾았다.
도롱뇽은 그리움을 포함한 여러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아틸라 일행을 만나기 전까지, 도롱뇽이 마음을 연 대상은 코르키코스가 유일했다.
그러나 코르키코스는 도롱뇽을 지키다 죽어 언데드가 됐고, 이후의 도롱뇽은 코르키코스를 포식한 대가로 오랜 시간 악마의 광기에 지배됐다.
‘내 말이 들려? 코르키코스.’
도롱뇽은 계속해서 코르키코스를 불렀다.
그러나 코르키코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바토리와 펀치가 끊임없이 도롱뇽을 부르고 있지만, 도롱뇽이 듣지 못하는 것처럼.
코르키코스가 재차 도롱뇽을 공격했다.
도롱뇽은 가까스로 그것을 피했다.
그러면서 계속 코르키코스의 이름을 불렀다.
‘코르키코스!’
한편 바토리는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도롱뇽이 코르키코스에게 공격을 가하지 않고 오직 회피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도롱뇽아! 정신을 차리거라 도롱뇽아!”
바토리는 조바심이 났다.
먼 곳에서 전투하는 아틸라를 보며 점점 불안감을 키웠다.
바토리는 아틸라의 계획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아틸라가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바토리는 드라코리치를 쓰러뜨리고 아틸라에게 가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드라코리치는 도롱뇽 이상의 강자.
공멸의 수단을 쓰지 않는 이상 바토리 혼자서는 결코 쓰러뜨릴 수 없는 상대다.
게다가 이런 공중전의 상황에서, 거대화마저 발현하지 못한 펀치는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바토리는 다시금 도롱뇽의 이름을 불렀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 * *
“드라코리치는 되살아나고 있다.”
샤를의 목소리가 광기에 사로잡혀 가던 아틸라의 정신을 깨웠다.
“난 그동안 드라코리치, 아니 드라칸 코르키코스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샤를이 동료들의 방향을 눈짓했다.
아틸라도 눈동자를 굴려 같은 곳을 봤다.
그의 눈에 부릅 힘이 들어갔다.
“재미있는 현상이지 않은가. 아틸라.”
아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놀란 눈으로 드라코리치를 봤다.
드라코리치는 더 이상 뼈로만 구성된 스켈레톤 드래곤이 아니었다.
“드라칸 코르키코스는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포식하고 싶다는 본능을 오랜 시간 억눌러 왔다.”
그제서야 아틸라는 드라코리치와 도롱뇽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깨달았다.
드라코리치는 도롱뇽을 포식하고 있다.
그 증거로 드라코리치의 뼈엔 각종 장기와 근육, 살갗이 재생되고 있었고, 반대로 도롱뇽의 몸은 급속도로 말라 갔다.
이상한 건 바토리의 반응이었다.
아틸라가 보기에, 바토리는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너와 내가 보는 것을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보지 못한다.”
“뭐라고?”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눈엔 여전히 드라칸 코르키코스가 스켈레톤 드래곤으로 보일 거라는 말이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힘을 잃고 있다는 것 또한 알지 못할 것이다.”
위험한 상황이다.
바토리는 샤를이 만든 환각에 빠졌다.
바토리 정도 되는 마법사를, 그것도 아몬의 환술마저 일부 습득한 마법사를 환각에 빠뜨린 샤를의 힘은 대단했다.
아니, 바토리가 아몬의 환술을 습득했기에 더욱 쉽게 빠져들었는지도 모른다.
“난 드라칸 코르키코스와의 오랜 대화를 통해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의 과거를 봤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보이는 모습과 달리 여린 내면의 소유자더군. 지금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의 눈에 비친 드라칸 코르키코스는 예전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네 환수의 심중이 어떠할지는 아틸라,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그렇지 않다.
아틸라는 도롱뇽의 상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는 샤를과의 대결을 앞두었다는 핑계로 도롱뇽의 심중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
샤를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그렇군. 넌 너의 환수를 방치했던 건가. 그래서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저리도 쉽게 환각에 빠져들 수 있었던 거군.”
“…….”
“저 상태라면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완전하게 포식당하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드라칸 코르키코스는 생을 되찾을 것이고, 반대로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영원한 죽음, 혹은 영원한 시체의 삶을 살아가게 되겠지.”
샤를의 말대로다.
바토리는 환각에 빠져 현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고, 도롱뇽 또한 제 몸이 포식되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다.
아틸라는 도롱뇽에게 주인의 영역을 발현했다.
그러나 반응은 없었다.
이유는 뻔했다.
샤를이 아틸라의 세계와 도롱뇽의 세계를 분리한 것이다.
마치 메피스토펠레스가 발현했던 공간 환술처럼.
네 사도가 구성했던 이공간의 마법진처럼.
아틸라는 의지를 발현해 도롱뇽에게 움직였다.
그것을 샤를이 막았다.
“지금의 네가 날 피해 갈 수 있을 것 같은가.”
폭풍 같은 검세가 아틸라를 몰아쳤다.
아틸라는 드라칼리온과 무휼을 들어 막았지만 금세 전신에서 핏줄기가 솟았다.
아틸라가 부드득, 어금니를 깨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버서커의 힘 없이는 뚫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분노한 건가 아틸라. 그래. 그것이 너의 내면에 담긴 진정한 혼돈이겠지.”
샤를은 시시각각 변하는 아틸라의 미래를 봤다.
그것을 통해 해답을 찾은 샤를은 이곳에서 아틸라와 단둘이 승부를 벌였고, 드라코리치에게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포식하라 명령했다.
아틸라를 자극하기 위해서다.
샤를은 아틸라의 의도대로 전투가 진행된다면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