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 최후의 전쟁 (1)
샤를은 드라코리치의 머리 위에 서 있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
아틸라는 샤를이 지난번 마주했을 때보다 더욱 강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샤를.”
아틸라가 입을 열자 샤를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이 아틸라를, 바토리를, 펀치를, 마지막으로 도롱뇽을 봤다.
도롱뇽은 부릅뜬 눈동자로 드라코리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도롱뇽이 보기에 지금의 드라코리치는 이전과 달랐다.
샤를이 아틸라에게 눈을 돌렸다.
“푸르손의 저주를 몰아낸 모양이군.”
“운이 좋았지.”
“날 막으러 온 건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텐데.”
아틸라가 드라칼리온에 손을 가져갔다.
샤를이 웃었다.
“난 너와 싸우고 싶지 않다. 아틸라.”
“날 죽이려 고위악마까지 끌어들인 네가 할 말은 아닌 거 같군.”
“넌 오해하고 있다.”
“오해라고?”
“네 말대로 고위악마들을 소환한 건 나다. 그러나 널 죽이기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야.”
아틸라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말장난을 할 생각인가. 난 불과 얼마 전까지 푸르손의 저주로 죽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틸라는 말과 생각이 따로 논다는 것을 알았다.
샤를이 그것을 파고들었다.
“말장난을 하고 있는 건 너다. 아틸라.”
대답 없는 아틸라에게 샤를이 말했다.
“네 짐작대로, 난 네가 푸르손의 저주를 극복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샤를은 강력한 예지를 지니고 있다.
사도들이 만든 통로를 순식간에 자신의 세계로 바꿔 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샤를은 통로가 생성될 것을 예지했고, 대비한 것이다.
“그래서, 네 눈으로 확인한 내 미래는 어떤 모습이지?”
그렇게 말하며 아틸라는 심안을 발현했다.
샤를이 미래를 볼 수 있다면, 아틸라는 그런 샤를의 생각을 읽어 내면 된다.
샤를의 표정이 변했다.
매섭게 치켜뜬 눈으로 아틸라를 노려봤다.
“나의 내면을 엿볼 셈인가.”
아틸라와 샤를의 시선이 허공 어딘가에서 부딪쳤다.
그것이 얽히고, 서로를 물어뜯으며 파장을 일으켰다.
놀라운 일이었다.
실체를 지닌 물리력이나 마법력이 아닌, 시선을 부딪는 것만으로 공기의 질감이 변했다.
“넌 이전에도 그 힘을 내게 사용했다.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확실히 알 것 같군.”
샤를의 눈동자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그것이 허공에 얽힌 공기의 파장을 빙결하고, 산산이 부쉈다.
아틸라의 심안은 샤를에게 먹히지 않았다.
그러나 아틸라는 엘에게 심안을 시전했을 때와 같은 ‘벽’을 느끼지는 못했다.
샤를은 심안에 면역이 아니다.
심안은 샤를에게 통할 수 있다.
그래서 녀석은 지금의 상황을 억지로 깨뜨려 버린 거다.
“기분 나쁜 기술이군. 아틸라.”
샤를의 몸에서 짙은 마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에 대항하듯 바토리가 왼팔의 힘을 개방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
샤를이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예전의 너는 가급적 피하고 싶은 상대였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흐응.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하지 않겠느냐.”
“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지.”
샤를은 눈동자만을 굴려 바토리를 봤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겠다.”
샤를의 동공이 파충류처럼 좁혀졌다.
그 순간 바토리는 마치 발가벗겨진 듯, 자신의 모든 것이 샤를에게 노출되는 기분을 느꼈다.
오래전 아틸라에게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난 너의 미래를 알고 있다.”
무심한 목소리.
그러나 바토리는 그 무미건조한 음성에 섬뜩한 살기가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바토리의 풍경이 지워졌다.
바토리는 암흑 속에 서있었다.
아틸라도, 도롱뇽도, 펀치도 보이지 않는다.
바토리는 주위에 감각을 집중했다.
정면의 허공이 일렁거렸고, 그곳에서 미끄러지듯 샤를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토리는 샤를에게서 강렬한 공격 의지를 감지했다.
그래서 마멸의 칼날을 발현했다.
차아앙!
쏘아지는 마멸의 칼날.
그것을 노리며 뻗치는 샤를의 검기.
두 마력의 날붙이가 뱀처럼 몸을 섞었고, 승자는 샤를이었다.
바토리는 재차 마멸의 칼날을 운용했다.
그러나 샤를은 칼질 한 번으로 파쇄했고, 그것을 넘어 바토리의 몸을 갈기갈기 찢었다.
분해된 바토리의 몸이 붉은 핏물이 됐다.
기화해 안개처럼 변한 그것이 다시 바토리의 몸으로 변했고, 그렇게 바토리는 짧은 부활의 과정을 마쳤다.
하지만 직전과 비슷한 상황을 겪으며 재차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일곱 개의 목숨이 소진돼 육체가 구슬로 수렴될 때쯤, 바토리의 의식은 현실로 돌아왔다.
“……!”
바토리의 무릎이 휘청거렸다.
그녀는 환각 속에서 샤를과 싸웠다.
아니, 그건 환각이 아니다.
바토리가 샤를에게 대적할 경우 벌어질 미래의 일부였다.
바토리는 제삼자의 시선으로 자신과 샤를이 겨루는 광경을 봤다.
현실에서는 눈 한 번 깜빡거릴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바토리에겐 수 시간이 흐른 것처럼 길었다.
아틸라가 샤를에게 검을 겨눴다.
“샤를. 너의 예지는 완전하지 않다. 너와 나의 근원인 혼돈조차 불확실한 예지력을 갖고 있었다.”
“네 말대로 나의 예지는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내가 보는 미래엔 힘이 있고, 정해진 도착지로 향하려는 관성이 있다.”
“미래는 변할 수 있다.”
“내 눈으로 확인한 네 미래가 어떠한지 물었었지.”
샤를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흥미롭더군. 네가 지닌 가변적 미래는.”
“가변적 미래?”
“너는 특별한 존재다. 아틸라.”
그렇게 말한 샤를이 바토리와 도롱뇽을 차례로 봤다.
“물론 저들 또한 평범한 존재는 아니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네게 원하는 건 이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샤를의 얼굴이 인간적인 것으로 돌아왔다.
“나와 함께해라 아틸라.”
“이유는?”
“이 세계를 완전한 것으로 바꾸기 위해.”
아틸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틸라가 샤를을 찾은 목적.
그것이 바로 중간계를 완전한 세계로 바꾸기 위함이었으니까.
‘넌 너의 세계를 더욱 불완전한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너의 ‘불완전한 세계’를 샤를의 ‘완전한 세계’와 충돌시켜, 그 충격에서 발생한 방대한 에너지로 이 세계를 뒤집어야 한다. 초대받지 않은 다른 세계의 겹침을 몰아내고, 중간계를 완전함의 세계로 재구축해야 한다.’
엘이 했던 말이다.
아틸라의 ‘불완전한 세계’와 샤를의 ‘완전한 세계’.
그 두 세계를 충돌시켜 중간계를 완벽하게 독립된 세계로 재구성한다.
“또한 그것이야말로 지척까지 다가온 대격변의 파멸로부터 이 세계를 구할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이어진 샤를의 말에 아틸라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파멸에서 구한다고? 네가 원하는 건 이 세계의 완전한 지배가 아니었나.”
“지배를 위해선, 먼저 구해져야겠지.”
“재밌는 사고방식이군.”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강압적인 지배가 아니다. 난 인간들에게 평화로운 세상을 선사할 것이다.”
“네가 만들려는 건 언데드라는 공포로 통제된 세계다. 그것이야말로 압제이며, 또한 진정한 평화라 할 수 없는 세계다.”
“최소한의 통제는 필요하다. 이전에도 말했듯 인간은 악한 존재니까. 그들에겐 스스로의 악한 본능을 억눌러 줄 압도적인 힘이 필요하다.”
“천만에.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평화의 의미를 깨닫고, 쟁취해야 한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었다.”
“네 말대로 인간은 어리석다. 그러나 머지않아 깨달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인간만이 아닌, 중간계를 살아가는 모든 지성 종족의 과업이 돼야 한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이지.”
“사공들이 얼마나 안간힘을 썼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갈 수 있었겠나.”
“흥미로운 발상이군.”
샤를이 피식 웃었다.
오른팔을 치유하기 위한 여정에서 이따금 보이곤 했던 순수한 미소.
“아틸라. 난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혼돈이 중간계를 노리고 있다.”
둘의 대화가 멈췄다.
샤를은 의미를 파악하려는 듯한 눈으로 아틸라를 봤다.
“넌 혼돈에게 이용당하고 있다. 샤를.”
“이용이라.”
“넌 왜 이 세계를 완전함으로 만들려는 건가.”
샤를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이 세계는 대격변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마계와 신계의 겹침 현상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수많은 세계의 존재들이 중간계를 침범할 것이다. 그들로부터 중간계를 지키려면 먼저 이곳을 완전함의 세계로 재구성해야 한다. 그렇게 이 세계를 단단하게 만들어, 다른 세계의 침략자를 몰아내야 한다.”
“그것은 네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인가.”
“뭐라고?”
“이 세계가 완전함의 세계로 바뀌면 정말로 다른 세계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 근거는 어디에서 온 거지?”
“답이 뻔한 물음이군. 난 미래를 읽을 수 있다. 난 네가 지닌 가변적 미래를 읽었고, 그 안에서 해답을 찾았다.”
“그 해답이라는 것이, 네가 만들어 갈 세상에 내가 포함되는 거란 말인가.”
아틸라의 입술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넌 혼돈에게 속고 있다. 샤를.”
샤를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와 내가 한배를 탄다면 이 세계는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
샤를을 겨눈 드라칼리온에서 검기가 피어올랐다.
“애초부터 너와 난 서로의 대적자로 예정된 존재다.”
“끝내 나와 싸우겠다는 말인가. 아틸라.”
“그래야만 너와 내가 바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다.”
아틸라와 샤를에겐 공통의 목적이 있다.
이 세계를 완전함의 세계로 재구축하는 것.
그러나 아틸라와 샤를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서로 다른 방법을 택했다.
아틸라는 엘을 통해 이 세계의 진실에 접근했고, 샤를은 스스로 내다본 미래에서 방법을 찾았다.
아틸라는 확신하지 못했다.
어쩌면 자신이 틀리고, 샤를이 맞을 수도 있다.
애초부터 백 퍼센트 확신 가능한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정엔 각자의 주관이 큰 자리를 차지한다.
또한 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에 수없이 잘못된 결정을 내리곤 한다.
아틸라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엘을 무조건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다.
아틸라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했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샤를이 듀란달을 뽑았다.
그의 검 끝이 드라칼리온의 검 끝을 똑바로 겨눴다.
“너와 내가 맞붙는다면 둘 중 하나는 죽을 것이다 아틸라.”
“난 죽을 생각도, 널 죽일 생각도 없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군.”
그렇게 말하며 샤를이 웃었다.
아틸라도 웃었다.
파카앙!
두 자루 검신이 허공에서 부닥쳤다.
두 전사의 모습이 바토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바토리가 당황한 표정을 했고, 펀치도 놀라 끼아옹! 울음소리를 냈다.
이내 바토리는 아틸라와 샤를을 찾았다.
두 사내는 저 멀리 칼날 산맥의 고지에서 폭풍처럼 검을 부딪치고 있었다.
“도롱뇽아!”
바토리는 아틸라를 향해 도롱뇽을 움직이려 했다.
그때 기습적으로 날아든 드라코리치가 도롱뇽을 습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