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 조우
왜인진 모르겠지만, 오토는 아인하르트의 대군과 언데드 군단이 나타난 순간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전군! 돌겨어어억!”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가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오토는 그렇게 했고, 그러자 놀랍게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전까지도 오토는 나바라 왕국군을 이끄는 지휘관이었다.
하지만 연합군을 진두지휘한 적은 없었다.
원래 그 자리는 샤를의 것이었고, 샤를이 변모한 뒤엔 키릴이 맡았다.
얼마 전 상당수의 병사가 왕국을 수비한다는 명목으로 퇴각했다.
키릴도 총사령관직을 내려놨다.
그렇다고 오토가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될 수 없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연합군의 병사들은 오토를 인정했고, 또 존경했다.
그러나 오토의 곁엔 늘 아틸라가 있었다.
지금껏 연합군을 통솔해 온 키릴도 있었다.
병사들은 그간 키릴의 노고를 지척에서 지켜본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키릴이 총사령관직을 내려놓았을 때 아쉬워하면서도, 한편으론 여전히 키릴을 총사령관처럼 따랐다.
그러면서 아틸라에게 기대했다.
아틸라에겐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는 고위악마 셋을 쓰러뜨렸다.
듣기론 언데드 군단의 수장이었던 버서커 카르타고마저 쓰러뜨렸다고 한다.
아틸라는 범접할 수 없는 영웅이었다.
손을 뻗어도 결코 닿을 수 없는 신격화된 영웅.
그것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아틸라는 지금도 하늘 위에서 언데드 드라칸과 싸우고 있다.
그러나 연합군 병사들은 더는 아틸라를 보지 않았다.
그들의 전투는 하늘 위가 아니라 이곳, 지상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상에서 자신들과 함께 싸우는 전사는 아틸라가 아닌 오토다.
“물러서지 마라!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아틸라와 달리 오토는 병사들이 범접할 수 없는 영웅이 아니다.
그는 병사들과 같은 대지를 밟고, 함께 피 흘리고 땀 흘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다.
물론 그가 지닌 검술은 압도적이었다.
병사들이 보기에 오토의 검기는 아틸라 못지않았다.
그의 환수인 골드 드래곤도 놀라운 힘을 지녔다.
그러나 오토와 골드 드래곤은 병사들과 같은 눈높이에 있었다.
둘은 지상군의 가장 강력한 창날이자, 가장 단단한 방패였다.
“오토마이어 나바라 왕을 따르라!”
그 상황에서 터져 나온 키릴의 외침은 병사들로 하여금 누가 연합군의 새로운 지휘관인지 깨닫도록 만들었다.
병사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어느새 그들 모두는 오토마이어의 이름을 목청껏 외치고 있었다.
“기분 좋겠네? 영주 나리.”
오토의 옆으로 날아든 카스피가 속삭였다.
그러고는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다시금 전장의 혼돈 속으로 사라졌다.
오토는 검을 휘두르고, 방패를 뻗어 막으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키릴이 부관처럼 오토의 곁을 지켰다.
키릴은 조력자의 역할을 할 때 더욱 빛이 나는 존재다.
키에에에에에!
하늘 위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오토는 고개를 들었다.
하나 남은 언데드 드라칸이 추락하고 있었다.
도롱뇽의 날개가 펄럭, 움직였고 그 순간 오토와 아틸라의 시선이 서로를 마주 봤다.
아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끝으로 둘의 시선이 각자의 전장을 향했다.
오토가 다시금 전투 함성을 질렀다.
내뻗친 검기가 전투 코끼리의 머리를 베었다.
도롱뇽의 날갯짓이 머리 위를 울렸고, 점점 멀어졌다.
오토는 아틸라가 통로 너머로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 * *
“생각과는 다른 풍경이구나.”
바토리의 말대로 주위 풍경은 통로 밖에서 보던 것과 달랐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아틸라는 감각을 집중했다.
“카앗! 뭐가 내 눈을 찔렀다!”
어둠 속을 비행하던 도롱뇽이 아프다며 죽는 소리를 했다.
그러나 그 어떤 통증도 정신 교육에 비할 바는 아니었기에, 도롱뇽은 아픈 와중에도 부지런히 날개를 움직였다.
“냄새가 난다. 냄새가.”
도롱뇽이 코를 킁킁댔다.
이런 상황에서 도롱뇽의 후각은 더욱 빛을 발했다.
머지않아 완전한 어둠이 사라지고, 조금은 주변을 알아볼 정도가 됐다.
일행은 수해의 한복판을 날고 있었다.
“힉! 뭐야! 수해잖아!”
수해의 그늘 속에 도사린 몬스터들이 보였다.
몬스터들은 일행의 모습을 멀거니 쳐다볼 뿐, 별다른 공격적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진짜 수해가 아니다.”
아틸라는 저것이 진짜 수해가 아닌, ‘복제된 수해’라는 것을 알았다.
복제는 혼돈이 지닌 가장 원초적인 힘.
아틸라 자신도, 엘도 그렇게 태어났다.
어쩌면 혼돈 역시도 다른 무언가에 의해 복제된 존재일는지 모른다.
아틸라는 이번 전쟁이 시작된 후, 샤를이 한 번도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것을 상기했다.
대신 그의 환수인 ‘드라코리치의 복제물’들이 대륙의 하늘을 누볐다.
바토리도 상황을 인지했다.
“그렇구나. 언데드 드라칸과 마찬가지로, 저건 샤를 그 아이가 경험한 수해의 복제물인 게로구나.”
“엥? 저게 복제물이라고? 어이, 야만 미물. 그럼 금사자 미물 새끼는 이제 막 수해도 만들 수 있다는 거야?”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 이유는 엘이 이와 비슷한 일을 행한 전적이 있기 때문.
김도현이 살아가던 세계, 지구는 진짜가 아닌 오직 아틸라만을 위해 제작된 가짜 세상이었다.
아틸라는 엘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혼돈은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손에 넣을 것이다. 그 미래에 대해 혼돈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혼돈이 원하는 미래를 손에 넣을 거라고? 그 말은 곧 중간계가 혼돈의 세계와 합쳐진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혼돈은 원하는 것을 얻을 테지만, 그것이 중간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다는 거지?’
‘도현아. 아버지는 황제의 몸 안에서 그저 놀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란다.’
이어 엘이 했던 말은 아틸라는 물론이고 바토리, 도롱뇽마저 크게 놀라게 만들었다.
“글쎄라니. 너도 모르는 거냐 야만 미물.”
도롱뇽은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다.
만약 샤를이 정말로 저 수해를 만든 것이라면, 그의 힘이 아틸라보다 강하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아틸라의 생각은 달랐다.
아틸라는 저 광활한 수해를 샤를이 구현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샤를은 진즉 저 힘을 전쟁에 이용했을 것이다.
아틸라의 결론은 이거였다.
“여긴 아마도 환술 세계일 거다. 정확히 말하자면 샤를이 발현한 균열과 환술이 뒤섞여, 그 안에 복제된 수해가 구현된 것이겠지.”
“엥? 여기가 환술 세계고, 저 수해가 몽땅 가짜라고?”
도롱뇽이 고개를 갸웃하며 이어 말했다.
“그게 내가 말한 거랑 뭐가 다른 건데?”
그 물음엔 아틸라도 제대로 답할 수 없었다.
정답이 없는 이야기다.
엘조차도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진짜라 확신하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껏 경험한 모든 세계가 ‘가짜’고, 저 방대하고 위험한 힘을 지닌 혼돈조차 ‘진짜’가 만든 수많은 존재 중 하나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눈앞의 환술 또한 어찌 가짜라 단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그것을 둘러싼 방대한 우주 역시 누군가의 환술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쓸데없이 머리 아프게 하지 마라, 도롱뇽 새끼.”
“내, 내가 뭘!”
아틸라는 정답을 찾을 수 없는 난제에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
눈앞의 현실을 직시했다.
그는 의문을 느꼈다.
사도들이 등장하고, 또 그들이 황도로 이어지는 통로를 만든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이곳은 샤를의 세계로 변했다.
이 장소는 중간계라 말하기엔 애매한 공간일 것이다.
그런데도 샤를은 이곳을 자신의 세계로 변모시켰다.
그렇다는 것은 즉.
‘샤를은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샤를은 균열, 복제, 예지의 힘을 개안했다.
아틸라는 지니지 못한 힘이다.
아니, 아틸라가 전혀 지니지 못한 힘이라 볼 수는 없지만, 샤를은 저 세 가지 힘에서만큼은 아틸라보다 월등하다.
그러나 아틸라에겐 광폭의 힘이 있다.
그것이야말로 샤를의 ‘완전함’에 대항할 수 있는 ‘불완전함’의 정수(精髓).
아틸라는 문득 샤를이 대악마 아몬보다는 혼돈에 가까운 힘을 지닌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킁킁. 냄새가 점점 가까워진다.”
도롱뇽은 계속 날개를 움직였다.
도롱뇽은 아몬의 냄새와 샤를의 냄새 모두를 알고 있다.
아틸라는 습관처럼 펀치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런 아틸라에게 팔짱을 끼며 바토리가 속삭였다.
“갑자기 추워진 것 같지 않느냐.”
또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바토리를 돌아보던 아틸라도 불현듯 추위를 느꼈다.
펀치가 훌쩍훌쩍 콧물을 흘렸다.
도롱뇽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아틸라는 도롱뇽의 심리 상태가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도롱뇽의 비늘이 빳빳하게 곤두섰다.
휘이이이잉.
새하얀 풍경이 일행을 맞았다.
일행은 수해를 벗어나 칼날 산맥에 있었다.
아틸라와 바토리가 보기엔 이전과 다를 것 없는 산맥.
하지만 도롱뇽에겐 달랐다.
도롱뇽은 눈앞의 풍경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인간이라면 감지하기 어려운, 어떤 동물적인 초감각.
‘난 너의 형제야.’
갑작스레 들려온 환청에 도롱뇽은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환청은 계속해서 도롱뇽을 괴롭혔다.
이상을 감지한 바토리가 물었다.
“무슨 일이더냐 도롱뇽아.”
아틸라도 도롱뇽에게 무어라 말했다.
그러나 도롱뇽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난 성스러운 숲 코르키코스를 지키는 자, 드라칸 코르키코스야.’
‘네 이름은 뭐니?’
익숙한 목소리.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피하려 해도 계속해서 들려왔다.
구역질이 이는 것을 삼키며, 도롱뇽은 저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답했다.
난 성스러운 샘물 이스메니오스를 지키는 자,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야.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넌 나의 하나뿐인 형제야.’
목소리는 해맑게 웃는 듯했다.
그러고는 비수처럼 폐부를 찔렀다.
‘난 오랫동안 이곳에서 널 기다려 왔어.’
콰아아아앙!
머리 위에서 폭음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도롱뇽은 환청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콰콰콰콰콰콰콰……!
산맥 꼭대기에서 눈사태가 일고 있었다.
쏟아지는 눈사태 아래로 도롱뇽은 낯익은 광경을 봤다.
거대한 괴수(怪獸).
아주 오래전, 칼날 산맥에서 만났던 무시무시한 괴수가 코르키코스에게 앞발을 휘두르고 있었다.
퍼거걱!
가슴을 가격 당한 코르키코스가 데굴데굴 지면을 굴렀다.
도롱뇽의 부릅뜬 눈이 먼 과거를 훑었다.
코르키코스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괴수와 맞서고 있다.
하지만 역부족이다.
도롱뇽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코르키코스!’
괴수를 향해 브레스를 뿜으려 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브레스를 발현하려는 의지와, 그래선 안 된다는 의지가 도롱뇽의 내면에서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어 검고 거대한 것이 도롱뇽의 시야를 덮었다.
펄럭.
느릿하게 움직이는 뼈 날개.
괴수와 코르키코스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 대신 드라코리치로 변모한 위압적인 존재가 제 주인을 태운 채 눈앞에 떠 있었다.
“드디어 왔구나. 아틸라.”
마왕의 푸른 눈이 칼날처럼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