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 대격변 (9)
아틸라도 살레오스를 봤다.
그리고 살레오스의 손에 시커먼 창자루가 쥐여지는 것을 봤다.
“도롱뇽!”
아틸라의 의지를 전해 받은 도롱뇽이 초 레어 송곳 브레스를 쐈다.
하지만 살레오스를 가로막듯 등장한 또 다른 고위악마가 그것을 막았다.
두 자루의 쌍신검을 사용하는 비행종 악마.
약탈후(掠奪候) 샥스.
“전군! 산개하라!”
키릴의 명에 성기사들이 신속하게 방사형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살레오스의 공격은 이미 시작됐다.
이제 와 회피는 불가능하다.
키유웅.
성기사들의 머리 위에서 묘한 소음이 들렸다.
놀랍게도 살레오스의 마창은 그들을 타격하지 못했다.
“저, 저건……?”
바토리가 시전한 균열의 막.
그것이 성기사들의 머리 위 허공에 생성되며 내리꽂히는 마창의 날을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살레오스는 웃었다.
- 바토리 에르제베트.
살레오스의 팔이 울퉁불퉁하게 커졌다.
창자루를 쥐고 있던 오른팔뿐만 아니라 왼팔까지 괴완으로 변했다.
거대한 악마의 손이 균열의 막을 쥐고, 찢어 버렸다.
균열 속에 침잠됐던 창날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키요오오오!
약탈후 샥스가 하늘 위로 솟았다.
샥스의 안광이 가늘게 좁혀졌다.
그는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의 등 위에서 버서커 아틸라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깨달음과 동시에 가공할 충격파가 샥스의 척추에 꽂혔다.
충격파의 정체는 도약을 발현한 아틸라.
본래의 아틸라라면 연합군이 받게 될 피해를 우려해 시전을 꺼렸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틸라는 샥스의 척추를 짓밟으며 드라칼리온을 꽂았고, 그대로 살레오스를 덮쳤다.
그렇게 살레오스의 몸은 도약의 충격파로부터 아군을 구하는 방어벽이 됐다.
지면에 처박힌 두 고위악마에게 루미니우스의 브레스가 쏘아졌다.
퍼퍼퍼펑!
루미니우스의 가세를 예상한 아틸라는 이미 아군 병사에게 돌진해 몸을 뺀 상태였다.
브레스가 지나간 곳 위로 마멸의 칼날이 난입했다.
살레오스와 샥스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일행의 연계 공격에 당했다.
바토리는 가능하다면 이대로 두 고위악마의 숨통을 끊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고위악마는 역시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다.
- 재미있군.
살레오스의 왼손이 마멸의 칼날을 붙잡았다.
이어 오른손의 마창을 휘둘러 부숴 버렸다.
남아 있던 세 자루 마멸의 칼날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괴완공 살레오스.
과연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존재였다.
완력과 파괴력만으로 보자면 푸르손 이상의 힘을 가진 전사형 악마.
살레오스가 등허리를 젖히며 포효했다.
약탈후 샥스도 두 자루 쌍신검을 들고 일어섰다.
살레오스가 전사라면 샥스는 살수다.
그것도 자유로운 비행이 가능한 살수.
바토리를 포함한 연합군의 마법사들에겐 재앙과도 같은 존재다.
그러나 아틸라는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곳의 인원이라면 제압할 수 있다.
‘버서커의 힘 없이도 가능하다.’
아틸라는 버서커의 힘을 가급적 발현하지 말아야 했다.
샤를과의 대결을 대비해 긍정적인 몸 상태를 유지해야 했고.
또 고위악마의 저주 탓에 버서커의 힘을 발현하는 건 위험이 따를 수 있다고 루미니우스가 말했기 때문.
아틸라는 드라칼리온과 무휼을 들었다.
흑철검, 흑철방패, 흑철갑주는 이미 부서져 없어졌다.
그럼에도 아틸라는 불안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방어구를 벗어던진 지금의 모습에서 오히려 검은늑대의 정기를 느꼈다.
“아우우우우우!”
아틸라가 달렸다.
그러면서 그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두 마리의 드래곤과, 그 위에 올라탄 바토리와 오토를 봤다.
어느새 지면으로 내려왔는지 카스피도 매서운 귀기를 뿜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아틸라!”
키릴도 무리에 가세했다.
그녀의 지휘에 기사와 기병들은 산개를 마쳤다.
그때 이변이 벌어졌다.
치치치치칫……!
산개한 기병들의 앞에 추가로 고위악마가 나타났다.
놈이 휘두른 둔기가 군마째 기병들을 날렸다.
“고, 고위악마다! 모두 산개…… 크헉!”
“끄아아아아……!”
추가 등장한 고위악마는 하나가 아니었다.
사방의 허공을 찢으며 고위악마들이 연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무슨……!”
바토리가 얼빠진 얼굴로 그 광경을 봤다.
전세는 단번에 뒤집혔다.
등장한 고위악마는 살레오스와 샥스를 포함해 모두 일곱.
연합군에 저 정도 숫자의 고위악마를 쓰러뜨릴 여력은 없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흐물거리는 지면을 뚫고 악마 군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장 곳곳에 위기감이 엄습했다.
그 상황에서 가장 침착함을 드러낸 건 라일이었다.
라일의 안엔 메피스토가 있다.
그리고 메피스토는 고위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또 다른 자아다.
슈우욱! 퍼퍼퍼펑!
라일의 지시를 받은 마탑의 마법사들이 악마 군단을 타격했다.
그러면서 라일은 가장 가까운 곳에 등장한 고위악마를 노려봤다.
라일의 안구가 검게 변하며 안력이 향상됐다.
그의 오른손에 붉은 기운이 응집됐다.
길고 거대한 창날의 형태로 변했다.
그그그그그그……!
창자루를 쥔 라일의 팔이 등 뒤로 당겨졌다.
전장 5미터에 달하는 화염 창날.
카르타고와의 대결에서 그의 주무기로 쓰였던 이 창날은 그사이 더욱 길고 예리해졌다.
‘던져라! 라일!’
메피스토의 목소리와 함께 라일이 창날을 던졌다.
맹렬하게 쏘아진 창날이 고위악마의 등에 꽂혔고, 가슴을 뚫으며 튀어나왔다.
악마는 가슴을 비집고 나온 화염 창날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위로 라일의 2차, 3차 공격이 이어졌다.
펏퍼퍼펑!
멀지 않은 다른 곳에선 발키리 부대의 마력 화살이 악마들의 몸을 타격했다.
간혹 강한 악마가 화살비를 무력화하며 접근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더욱 빠르고 강력한 마력 화살이 날아와 그것을 저지했다.
슈시아의 화살.
“서리나무의 왕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위대한 발키리들의 수장! 슈시아 세이나자르!”
“오오오오오!”
슈시아는 그림 같은 동작으로 전장을 누볐다.
그녀의 목표는 조무래기 악마들이 아니었다.
‘군단을 지휘하는 고위악마.’
허공으로 몸을 날린 슈시아가 고위악마를 향해 활을 겨눴다.
일곱 개의 마력 화살이 시위를 떠나 고위악마의 몸에 꽂혔다.
펏퍼퍼퍼퍼펑!
그 시각 황금바위 드워프들은 제 앞에 나타난 악마 군단을 상대하고 있었다.
당연히 선두는 크누트였다.
그의 옆을 보에몽이 악착같이 따라붙었고, 나머지 전사들이 킬킬대며 뒤를 따랐다.
“보에몽이 크누트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아주 발악을 하는데?”
“그래도 제 아비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지! 누음앗핫핫핫하!”
“가자고 크누트!”
“호우호우!”
드워프들에겐 마법력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악마 군단에게 충분히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다.
드워프의 도끼가 악마의 팔다리를 자르고, 정수리를 쪼갰다.
그러나 악마 군단의 수는 드워프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크누트는 저만치 보이는 고위악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금니를 내보이며 웃던 그가 고위악마를 향해 천둥벼락을 시전했다.
콰아앙!
드라칼리온이 살레오스의 마창과 부닥쳤다.
아틸라는 자신의 몸이 무겁게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조바심이 밀려든다.
많은 고위악마가 나타나 전장을 헤집고 있다.
거기에 더해 놈들은 각각 자신의 악마 군단을 이끌고 왔다.
‘이대로라면 전멸이다.’
아틸라는 산개한 연합군에게 지원 병력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라일, 슈시아, 크누트라면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고위악마와 악마 군단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은 무리다.
게다가 추가로 등장한 고위악마는 다섯.
라일, 슈시아, 크누트가 하나씩 붙잡는다 해도 둘이 남는다.
아틸라의 눈이 살레오스와 샥스를 봤다.
살레오스는 몰라도 샥스는 비행종 악마.
그렇다면 이쪽에도 비행이 가능한 드래곤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
“오토!”
“알겠수!”
오토는 아틸라의 생각을 읽었다.
바토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바토리는 다소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아틸라를 본 뒤, 날아오는 루미니우스의 등으로 뛰어내렸다.
바토리를 태운 오토가 곧장 카스피에게 날아갔다.
아직 싸우지도 못했는데 왜 그러냐고 반문하는 카스피를 오토가 억지로 루미니우스의 등에 태웠다.
“우린 다른 고위악마를 막으러 가는 거요.”
자리를 이탈하려는 루미니우스를 샥스가 쫓았다.
도롱뇽이 앞을 가로막으며 앞발 공격을 펼쳤지만 샥스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피했다.
-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그러나 샥스의 상대는 도롱뇽만이 아니었다.
키릴의 신력이 샥스에게 쏘아졌고, 샥스는 쌍신검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아틸라는 살레오스와 싸웠다.
푸르손보다 강하진 않다.
그러나 아틸라의 몸엔 고위악마의 저주가 흐르고 있었고, 그래서 푸르손을 상대할 때보다 어려움을 느꼈다.
다행인 점은 도롱뇽과 키릴이 샥스를 상대로 제법 선전하고 있다는 것.
푸르손이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와 함께 주위 지면이 흔들렸고, 악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껏 등장하지 않았던 살레오스와 샥스의 군단병.
아틸라는 더는 버서커의 힘을 아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부드득.
아틸라의 어금니가 악다물어졌다.
전신의 근육이 팽창했다.
검은자위가 사라진 안구에 혈관이 돋았다.
그 순간 아틸라는 심장에서 통증을 느꼈다.
고통에 익숙한 아틸라마저 일순 몸을 경직할 정도의 강렬한 통증.
아틸라의 몸이 돌처럼 굳어졌고, 전신을 장악해가던 버서커의 힘이 사라졌다.
아틸라는 당황했다.
다시금 버서커의 힘을 발현하려 했다.
하지만 되지 않았다.
퍼걱!
아틸라의 복부에 살레오스의 괴완이 꽂혔다.
아틸라는 뒤로 날아가 바닥을 굴렸다.
끼아옹! 다급한 외침을 흘리며 펀치가 달려왔다.
아틸라가 펀치에게 의지를 전했다.
그러나 펀치의 몸은 신수 그리즐리의 힘을 발현하지 못했다.
아틸라는 직감했다.
고위악마의 저주.
그것이 자신과 펀치의 힘을 제한하고 있다.
“펀치!”
아틸라의 눈이 부릅떠졌다.
살레오스가 펀치를 노리며 접근하고 있었다.
아틸라는 돌진을 발현해 살레오스의 뒤를 잡았다.
드라칼리온을 휘둘렀다.
부웅.
드라칼리온은 살레오스를 타격하지 못했다.
살레오스가 회피한 것이 아니다.
마치 홀로그램을 타격하는 것처럼, 드라칼리온은 살레오스의 몸을 아무런 저항 없이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살레오스의 마창이 펀치의 머리에 꽂혔다.
아니, 그의 마창도 펀치의 몸을 저항 없이 뚫고 지나쳤다.
- 이것은.
살레오스의 눈빛이 변했다.
펀치가 자그만 몸을 부웅 날리며 살레오스에게 앞발을 뻗었다.
살레오스의 복부를 뚫고 나온 펀치가 아틸라의 품에 안겼다.
끼아옹? 펀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아틸라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틸라와 살레오스가 서로에게 무기를 뻗었다.
하지만 닿지 않았다.
드라칼리온과 마창은 상대의 몸을 무의미하게 통과했다.
그때였다.
와드드득.
커다란 조류의 앞발이 살레오스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것은 하늘 위 어딘가에서 벼락처럼 떨어졌고, 앞발의 주인은 놀랍게도 낯익은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년의 웃는 눈이 아틸라를 봤다.
“제가 조금 늦었네요. 김도현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