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 대격변 (8)
카스피의 이번 질문은 예리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아틸라는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내가 인간의 육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겠지.”
아틸라는 엘의 분신이지만, 그렇다고 엘과 동일한 힘을 지닌 것은 아니다.
아틸라를 분리할 당시 엘은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런 엘에게서 파생된 아틸라 역시 불안정했다.
심지어 아틸라의 탄생은 태아의 형태로 시작됐고, 이 세계로 건너오며 그의 영혼은 인간의 육체에 정착됐다.
그렇게 아틸라는 수차례 중첩된 불안정을 넘어, 인간의 육체가 지닌 한계성마저 갖게 되었다.
“아…….”
카스피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틸라가 인간의 몸에 갇혀 완전한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은 그녀 역시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렇게 카스피의 의문이 해소될 때쯤 발소리가 들려왔다.
키릴과 오토였다.
“시부럴 피곤해 뒈지겠수.”
두 사람은 긴 회의로 녹초가 된 모습이었다.
아틸라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회의는 끝난 건가?”
오토는 귀찮아 죽겠다는 듯 한 손을 휘휘 내저으며 털썩 자리에 앉았다.
키릴도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일행을 둘러보며 싱긋 웃었다.
소녀처럼 맑은 웃음.
키릴에겐 아틸라 일행과 함께할 때가 총사령관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후우……. 좀처럼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군요.”
“그렇겠지.”
“……몸은 괜찮은 건가요?”
“그럭저럭.”
아틸라는 바토리가 물었을 때와 똑같이 답했다.
“잠시 살펴볼게요.”
키릴이 말했고, 아틸라는 알겠다는 표시로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키릴은 뛰어난 치유사다.
물론 루키우스가 그녀 이상의 치유사이긴 했지만, 키릴은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버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아틸라의 몸을 살폈다.
그렇게 키릴이 알게 된 건 아틸라의 몸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
아틸라 역시 루키우스에게 들어 알고 있었기에 키릴에게 별다른 것은 묻지 않았다.
나머지 일행도 키릴의 표정을 보며 상황을 다시금 확인했다.
차라리 내가 저주에 걸렸어야 했는데, 라고 생각하며 키릴은 자책했다.
키릴도 푸르손과 싸웠다.
하지만 그녀는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
푸르손에게 치명상을 입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바토리 덕분이었다.
“회의 결과를 듣고 싶군.”
아틸라가 말했다.
키릴은 회의 내용을 일행에게 설명했다.
회의 내내 가장 무겁게 다룰 수밖에 없었던 의제는 각자의 왕국에 대한 것이었다.
왕국의 지휘관들은 깊은 우려를 표했다.
공간을 무시하며 모습을 드러내는 고위악마.
놈들이 그러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순식간에 4개 왕국을 초토화시킬 수도 있을 테니까.
이야기를 듣던 아틸라가 문득 말했다.
“아마 샤를은 그런 일을 벌이진 않을 거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아틸라.”
“난 샤를을 잘 알고 있으니까.”
이미 키릴도 아틸라와 샤를의 관계에 대해 들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전원은 아틸라를 포함한, 이 세계의 비밀을 알고 있다.
“샤를의 목적은 단순히 대륙을 피바다로 만드는 게 아니다. 녀석은 나름의 대의를 위해 움직이고 있지.”
“대의라고요?”
“샤를은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려 하고 있다. 그것을 위해 북부를 포함한 온 대륙을 통일하고 절대 군주가 되려는 거지.”
“모순이군요. 전쟁을 없애기 위한 전쟁이라니.”
“샤를도 모순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녀석은 멈출 수 없는 거다. 자신의 이상향을 위해.”
샤를은 전쟁에 미친 학살자가 아니다.
지금의 전쟁과 앞으로 벌어질 다른 세계와의 전쟁을, 녀석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런 샤를이 전투 능력이 없는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불필요한 학살을 벌이진 않을 것이라는 게 아틸라의 생각이었다.
“방어전을 펼치는 건 도움이 되지 않아. 오히려 전선이 뒤로 밀리며 각 왕국에 불필요한 피해가 생길 거다.”
키릴의 생각도 같았다.
그래서 키릴은 병력을 한데 모아 아인하르트의 수도로 쳐들어가자는, 다소 위험한 주장을 했다.
역시나 다른 지휘관들의 생각은 부정적이었다.
‘그렇게 무작정 전진하다가는 사방에서 협공을 당할 수도 있지 않겠소.’
‘게다가 고위악마는 아무 곳에서나 모습을 드러내는 괴물들이고 말이오.’
‘내 생각도 같소. 너무 위험한 작전이오.’
‘우린 전선 후방의 왕국들도 생각해야 하오. 이곳의 병사들은 각자의 왕국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모인 자들. 그런 그들에게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왕국의 위험을 뒤로하고 무작정 돌격하라는 건 어불성설이오.’
키릴은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지만, 그렇다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것은 아니다.
게다가 지휘관들의 말 또한 틀린 것은 없었다.
이대로 전군 돌격을 외친다 한들 병사들의 사기가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으니까.
사실 키릴도 아틸라의 생각처럼, 적들이 전선을 무시하고 왕국을 습격할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다.
키릴은 그동안 그 어떤 언데드도, 최근 등장했던 언데드 드라칸조차도 전선을 넘어 왕국을 습격한 일이 없었다는 것을 예로 들며 지휘관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반응은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흠. 지금까지는 그랬다 해도,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르는 일이 아니오.’
‘맞소. 게다가 언데드 드라칸과 고위악마는 완전히 다른 존재요. 그렇다면 공격 성향 또한 다르겠지.’
오직 오토만이 키릴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나 일국의 왕인 오토도 회의석상에선 한 명의 지휘관에 불과했고, 그래서 치우친 분위기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만약 그 자리에 슈시아, 크누트, 라일이 함께 있었다면 상황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이곳과는 다른 진영에 있다.
그렇다고 언제 적들이 등장할지 알 수 없는 이 위급한 시기에 모든 지휘관을 소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런 상황에 키릴도 확신할 수 없는 주장을 무작정 관철할 수는 없었다.
애초부터 키릴은 권력자보다는 조력자에 어울리는 성향을 지녔다.
“그렇다면 정해졌군.”
“아틸라. 그게 무슨……?”
“전진할 이들은 전진하고, 나머진 왕국으로 돌려보낸다.”
아틸라의 눈이 키릴을 똑바로 바라봤다.
“어차피 언데드 드라칸이나 고위악마를 상대로 병사의 숫자는 의미가 없다. 왕국의 수호를 원하는 자들이 있다면 돌려보내는 것도 나쁜 선택이 아니라는 거다.”
“…….”
“그러는 편이 기동성도 확보된다. 적국의 수도에 진입하는 것도 한결 수월해지겠지.”
“하지만 아틸라.”
“내가 샤를과 조우하기 전까진 끝나지 않을 전쟁이다.”
아틸라는 샤를을 만나야 한다.
원래 아틸라는 전선을 벗어나서라도 샤를을 찾으려 했었다.
그러던 중 고위악마의 습격이 있었고, 아틸라는 부상을 입었다.
고위악마의 저주는 조금씩이지만 아틸라의 육체를 갉아먹고 있다.
더는 시간이 없다.
움직여야 한다.
* * *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회군 병력과 진군 병력이 나뉘었다.
오토가 루미니우스를 타고 전선을 날아다니며 빠르게 상황을 전달한 덕분이었다.
아틸라 일행은 당연히 진군하는 쪽이었다.
키릴을 포함한 크레센시아 성기사단도 진군 병력에 포함됐다.
샹크리스 왕국으로 돌아가는 성기사도 일부 있었다.
그들의 뜻이었다기보다는, 키릴이 그렇게 하도록 유도했다.
‘왕국을 수호하는 기사들도 있어야 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키릴은 총사령관직을 내려놨다.
무거운 감투를 벗어던진 키릴의 표정은 한결 후련해 보였다.
슈시아와 발키리 부대도 진군 병력에 포함됐다.
라일을 포함한 다수의 마법사와 크누트의 황금바위 드워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아틸라 일행 중 유일하게 리베르만이 회군 병력으로 편입됐다.
바토리와 동시에 죽임 당하게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이도 했고.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곳에 있어야 양쪽의 상황을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많은 병사들이 진군하는 쪽에 서는 것 같수.”
오토의 말대로, 제법 많은 병력이 진군의 뜻을 내비쳤다.
그들 대부분은 아틸라와 오토에게 감화된 자들이었다.
이윽고 진군의 날이 밝았다.
두두두두두두.
군마들이 말발굽 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이전만큼 우렁차진 않다.
연합군은 덩치를 줄였다.
그러나 병사들의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웠다.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음에도 스스로 진군을 택한 이들이다.
“어이 야만 미물. 괜찮은 거냐.”
연합군 위의 하늘을 날며 도롱뇽이 물었다.
“뭐가.”
“뭐긴 뭐야. 고위악마의 저주 말이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똑바로 날기나 해라.”
“그래. 똑바로 날기나 하려무나.”
아틸라는 펀치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주위를 살폈다.
저만치에선 오토와 카스피를 태운 루미니우스가 마찬가지로 주위를 경계하며 날고 있었다.
“이상하구나. 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게 말이다.”
아틸라도 그렇게 생각했다.
진군을 시작하고 며칠이 지났지만 적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골골대며 누워만 있던 펀치가 불현듯 귀를 쫑긋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가장 반긴 건 도롱뇽이었다.
“곰탱이 새끼! 이제야 정신이 드는 거냐!”
도롱뇽의 등 위에서 펀치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코를 킁킁댔다.
펀치가 왜 저런 모습을 보이는지 아틸라와 바토리는 알 수 없었다.
펀치와 문제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한 도롱뇽도 마찬가지였다.
펀치는 가만히 주위를 살피기만 했다.
그러던 중 도롱뇽이 이상을 감지했다.
“아래다! 아래를 봐! 야만 미물!”
아틸라와 바토리도 이변을 알아챘다.
진군하는 연합군을 둘러싸며 검은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상의 연합군은 그 사실을 몰랐다.
연합군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벌어진 이상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높은 하늘을 날고 있는 아틸라, 바토리, 도롱뇽의 눈엔 똑똑히 보였다.
그것은 속이 빈 거대한 원의 형태였고, 이동하는 연합군을 제 몸의 중심에 두며 함께 움직였다.
거기에 더해 시시각각 테두리 모양이 세밀해지기까지 했다.
바토리가 속삭였다.
“아무래도 마법진 같구나.”
“내려간다.”
아틸라의 말에 도롱뇽이 하강했다.
루미니우스도 하강을 시작했다.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마법진이 빠르게 모습을 갖춰 갔다.
아틸라는 저것이 악마의 마법진일 거라 추측했다.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마법진의 중심엔 연합군의 모든 병력이 있다.
“키릴!”
아틸라의 외침을 들은 키릴이 고개를 들었다.
키릴의 눈에 부릅 힘이 들어갔다.
아틸라 때문이 아니다.
키릴은 아틸라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녀와 아틸라 사이의 허공이 종이처럼 찢기는가 싶더니, 그 안에서 검은 왕관과 갑주를 착용한 거구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키릴은 그 존재의 정체를 알아봤다.
진군을 앞둔 어느 날, 아틸라는 키릴을 포함한 지휘관들에게 몇몇 고위악마들에 대한 정보를 전한 적이 있었다.
“괴완공(怪腕公) 살레오스!”
츠츠츠츠츠……!
살레오스의 괴완(괴이한 팔)에 거대한 창자루가 쥐여졌다.
그것이 연합군의 무리를 향해 벼락처럼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