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397화 (397/425)

397. 대격변 (7)

목이 잘렸지만 푸르손은 죽지 않았다.

아틸라는 푸르손의 머리 갈기를 움켜쥐고 달렸다.

몸통과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서였다.

고위악마는 절단된 몸을 이어붙일 수 있다.

나베리우스와 스토라스를 상대하며 학습한 내용이었다.

투틋, 투트트틋……!

머리와 몸통의 두 절단면에서 검은 마기가 뿜어졌다.

그것은 자력에 끌리는 쇳가루처럼 서로의 존재를 찾았고, 끌어당겼다.

쿵쿵쿵쿵! 머리 잃은 몸통이 네 발로 달려왔다.

그 와중에 잘린 머리통이 아틸라의 팔을 물었다.

아틸라는 검 손잡이로 사자 머리를 쾅쾅 내리쳤다.

사자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가리엔 아틸라의 찢긴 살점과 근육이 물려 있었다.

아틸라는 놈의 정수리를 힘껏 지르밟았다.

이어 코앞까지 달려든 몸통을 향해 검을 뻗었다.

쾅! 쾅! 콰아앙!

머리를 잃었지만 몸통의 공격은 여전히 파괴적이었다.

다만 정확도와 예리함이 줄었다.

상대를 보고, 듣고, 감각하는 기관이 몸에서 분리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 차이는 컸다.

아틸라는 직전보다 수월하게 푸르손을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눈앞이 흐려졌다.

몸의 반응 속도도 늦어졌다.

아틸라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와드득!

어느샌가 달려온 도롱뇽이 푸르손의 어깨를 물었다.

도롱뇽은 벌써 이 정도까지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

펄럭! 도롱뇽이 허공에 솟았다.

얌전히 끌려가지 않겠다는 듯 푸르손이 도롱뇽을 타격했다.

도롱뇽의 아가리 주변이 피투성이가 됐다.

그럼에도 도롱뇽은 푸르손을 놓지 않았다.

도롱뇽이 지금 이 순간 가장 걱정하는 건 펀치의 안위였다.

펀치는 푸르손에게 제대로 일격을 맞았다.

‘빌어먹을 곰탱이 새끼. 죽으면 안 돼!’

펀치는 신수 그리즐리의 힘을 얻은 후 이전보다 강해졌다.

그러나 그런 펀치도 푸르손의 상대는 될 수 없다.

저 아래 죽은 것처럼 엎어진 펀치가 보였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엔 두 자루 검을 푸르손의 머리에 꽂은 채 고군분투하는 아틸라가 있었다.

부드드듯, 부듯……!

푸르손의 두 팔이 도롱뇽의 아가리를 밀쳤다.

놈은 완력으로 도롱뇽의 입을 벌리고 탈출하려 하고 있었다.

도롱뇽은 악다문 턱에 더욱 힘을 주었다.

사정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죽어! 죽으라고 이 미물 악마 새끼야!’

푸르손은 더욱 팔에 힘을 주며 탈출하려 했다.

도롱뇽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러던 중 도롱뇽은 아틸라를 향해 낮게 날아가는 루미니우스와 오토를 봤다.

아틸라도 오토를 보고는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루미니우스의 아가리에서 빛의 브레스가 쏘아졌다.

퍼어어어엉!

루미니우스의 브레스가 푸르손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럼에도 푸르손은 죽지 않았다.

아틸라가 재차 달려가 푸르손의 머리를 난도질했다.

그 모습은 마치 먹잇감을 뜯어먹는 맹수 같았다.

머지않아 도롱뇽은 입안의 몸통이 더 이상 발악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푸르손의 몸통이 추욱 늘어졌다.

그러고는 검은 잿개비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비, 빌어먹을! 드디에 뒈진 건가!”

도롱뇽은 가장 먼저 펀치를 향해 날았다.

“죽은 거냐! 곰탱이 새끼!”

도롱뇽이 펀치의 몸을 뒤집었다.

펀치의 가슴은 희미하게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도롱뇽은 펀치를 입에 물고 루미니우스에게 달려갔다.

저 재수 없는 골드 드래곤에게 부탁을 한다는 건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히익! 퍼, 펀치야!”

오토가 먼저 놀라 호들갑을 떨었다.

이어 오토의 의지를 전해 받은 루미니우스가 아틸라와 펀치의 몸을 치유했다.

푸르손이 소멸하자 악마 군단은 와해됐다.

그들을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과 루미니우스가 협공했다.

“빛의 신이시여!”

“악마를 쓰러뜨릴 수 있는 힘을!”

그렇게 악마 군단은 전력의 대부분을 잃고 흩어졌다.

* * *

이번 전투에 등장한 고위악마는 모두 넷이었다.

용맹공 나베리우스.

아공자 스토라스.

단정왕 푸르손.

그리고 화염공 하보림.

리베르를 습격해 목숨을 빼앗은 존재가 바로 하보림이었다.

‘화염공(火焰公)’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하보림은 마법사형.

특히 화염을 앞세운 파괴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악마다.

리베르는 하보림에게 다섯 번 살해당했다.

운이 좋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바토리와 죽음의 시간이 겹쳤다면 리베르와 바토리 모두는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푸르손을 상대할 당시의 바토리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즉 바토리 입장에서 남은 목숨을 담보 삼아 푸르손과 전투를 벌인 건 위험한 도박이었다.

다행히 바토리에겐 운이 따랐다.

그리고 늦지 않게 도착한 아틸라가 푸르손과 맞붙으며, 그녀는 위태로운 줄타기에서 해방됐다.

한편 하보림도 다른 고위악마와 마찬가지로 소멸했는데.

하보림의 목숨을 끊은 건 우연찮게 그곳을 찾은 카스피였다.

물론 카스피 혼자만의 힘은 아니었다.

아무리 카스피가 마법사 잡는 것에 최적화된 살수라 해도.

또 최강의 귀살자였던 벨라의 힘을 이어받았다 해도 고위악마를 단독으로 쓰러뜨릴 수는 없다.

하보림의 죽음은 카스피, 리베르, 슈시아, 그리고 발키리 부대가 함께 만든 결과였다.

그 과정에서 리베르와 슈시아는 카스피의 진면목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누가 뭐래도 하보림에게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이는 카스피였다.

“몸은 좀 어떠하느냐.”

바토리가 아틸라에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흔들리는 모닥불 탓에 더욱 그렇게 보이는지도 몰랐다.

“그럭저럭.”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틸라의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아틸라는 지난 전투에서 상당한 부상을 입었다.

루미니우스의 치유가 아니었으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걱정 마 바토리. 아틸라는 금세 다 나을 테니까. 그치? 아틸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카스피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했다.

고위악마의 등장으로 연합군 진영은 재배치가 필요해졌다.

고위악마는 균열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전선이 크게 의미가 없어졌다는 이야기.

게다가 고위악마가 재차 등장한다면 대부분의 병력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키릴과 오토를 포함한 지휘관들은 지금도 그 문제를 놓고 회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아틸라는 잠든 펀치의 이마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전투의 후유증이 있는 건 펀치 또한 마찬가지다.

“할 수 있는 치유는 다했소. 하지만 고위악마의 저주까지 몰아내는 건 무리였지.”

오랜만에 인간의 모습을 한 루미니우스, 아니 루키우스가 말했다.

루키우스의 치유 능력은 키릴을 상회한다.

왕국 연합군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치유사라는 의미다.

하지만 그런 그도 고위악마의 저주까진 어쩌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고위악마는 드래곤보다 상위의 존재다.

“근데 고위악마의 저주라는 건 대체 뭐야?”

혼잣말처럼 묻는 카스피에게 루키우스가 답했다.

“고위악마는 본래 영생을 살 수 있는 존재요. 그런 고위악마가 소멸했다는 것은 즉, 강력한 부작용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지.”

“그럼 바토리와 리베르는?”

“바토리 에르제베트와 리베르 파테르는 죽음과 부활을 반복했소. 그러면서 자연스레 저주의 기운이 사라진 것이겠지.”

“흠…….”

카스피의 눈이 바토리와 리베르를 봤다.

두 관조자는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카스피가 이번엔 도롱뇽에게 물었다.

“근데 도롱뇽. 넌 왜 그렇게 멀쩡한 거야?”

“뭐?”

펀치의 털 속에 파묻혀 있던 도롱뇽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넌 바토리와 리베르처럼 죽고 살아난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어떻게 고위악마의 저주를 피할 수 있었던 거냐고.”

자리에 있던 이들이 도롱뇽을 돌아봤다.

카스피의 말대로다.

도롱뇽은 루미니우스의 치유도 받지 않았고, 스스로 제 몸을 치유하고 수복시켰다.

그런데도 도롱뇽에게선 고위악마의 저주가 느껴지지 않았다.

도롱뇽이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니냐 살쾡이 미물.”

“뭐가?”

“이몸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다.”

“응?”

“그러니까, 난 저기 루미니우스처럼 어쭙잖은 인간 행세나 하는 하찮은 ‘미물 등급’이 아니라 ‘드라코니안’이다, 이 말이야.”

‘미물 등급’이라는 말에 루키우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게다가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Polymorph)’할 수 있는 드래곤은 모든 드래곤을 통틀어 루미니우스가 유일했다.

그런 루키우스를 보며 도롱뇽이 “뭘 꼬나봐 노랑 미물 새끼야” 하고 말했다.

카스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어찌 됐든 도롱뇽도 드래곤인 거잖아. 고위악마보다 약하잖아.”

도롱뇽이 발끈했다.

“무슨 소리! 내가 마음만 먹었으면 그깟 미물 악마 놈들쯤이야 한 입 거리도 안 된다고!”

그렇게 한차례 허풍을 떨어댄 도롱뇽이 오만하게 턱을 들었다.

“게다가 난 굳이 따지자면 고위악마보다 낮은 등급이라 할 수 없는 존재다.”

“응? 왜?”

“후……. 이젠 다들 아는 이야기지만 내 부모는 신과 요툰이다. 그것도 전쟁의 신이라 불리던 아레스와, 요툰의 왕 이미르 사이에서 태어났지. 그리고 요툰은 말이야. 신과 드래곤의 중간쯤에 위치한 존재다.”

그 말에 카스피는 요르문간드를 떠올렸다.

요르문간드는 분명 드래곤보다 강한 존재였다.

아니, 요르문간드는 하보림보다도 약하지 않았다.

사실 카스피가 고위악마 하보림를 죽일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가 귀살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타나일에 잠재된 힘, ‘요르문간드의 저주’ 덕분이었다.

‘넌 앞으로 사타나일을 통해 요르문간드의 저주를 발현할 수 있을 거야.’

벨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것만으로 카스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카스피는 슬픔에 침잠되지 않기 위해 도리도리 고개를 털었다.

도롱뇽이 이어 말했다.

“그중에서도 요툰의 왕 이미르는 신에 필적하는, 아니 어쩌면 신보다도 강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나 역시도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되는 거고. 그런 이유로 난 고위악마의 저주 정도는 어찌어찌 몰아낼 수 있다는 거야.”

“그럼 도롱뇽이 아틸라와 펀치의 저주를 몰아내줄 수는 없는 거야?”

“그게 안 되니까 지금 이러고 있는 거 아냐.”

도롱뇽이 잠든 펀치의 얼굴을 물끄러미 봤다.

실제로 도롱뇽은 펀치의 몸에 각인된 저주를 어떻게든 몰아내 보려 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루미니우스처럼 치유의 힘을 지녔다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도롱뇽에겐 그런 힘이 없었다.

오직 자가복원으로 스스로의 몸만을 치유할 수 있을 뿐이다.

아틸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잠깐, 도롱뇽 새끼. 네가 언제 내 몸에서 저주를 몰아내려 했다는 거냐.”

“힉! 그, 그게……!”

“이 새끼가 진짜 뒤질라고.”

“아, 아니야! 곰탱이 새끼한테 여러 번 시도해 봤다고! 하지만 되지 않았……! 꾸에에에엑!”

정신 교육을 받고 쓰러진 도롱뇽이 잠시 후 눈물을 글썽이며 아틸라의 저주를 몰아내 보려 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실패했다.

도롱뇽은 그것 보라며 한껏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아틸라를 봤다.

아틸라는 못 본척했다.

무언갈 골몰히 생각하던 카스피가 문득 물었다.

“가만. 아틸라는 엘의 분신이잖아. 엘은 보통의 신보다 높은 존재고. 근데 왜 아틸라는 도롱뇽처럼 고위악마의 저주를 몰아낼 수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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