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 대격변 (5)
퍼어어엉!
도롱뇽의 초 레어 송곳 브레스가 스토라스를 공격했다.
스토라스는 어렵지 않게 그것을 피했지만 아틸라가 발현한 검기에 한쪽 날개를 손상당했다.
그러나 치명상은 아니다.
스토라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날개를 수복시켰고, 직전보다 더욱 빨라진 날갯짓으로 도롱뇽을 습격했다.
“카앗! 빌어먹을! 이 미물 악마 놈들이 나만 공격한다!”
당연한 일이다.
나베리우스와 스토라스는 자유로운 비행이 가능한 악마.
도롱뇽을 먼저 전투불능으로 만든다면 아틸라와의 전투에서 상당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그러나 도롱뇽도, 아틸라도, 그리고 간간이 공격을 명중시키는 펀치도 두 고위악마에겐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특히 아틸라에게서 그들은 강한 위협을 느꼈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자.
그것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아틸라는 드라칼리온과 무휼을 휘둘렀다.
아틸라는 무의식에 세계에 빠져 있다.
그는 나베리우스와 스토라스를 상대하며, 마음속에선 카르타고와도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카르타고의 목소리가 들렸다.
- 북부 대륙에 용계와 요툰헤임이 겹친 것처럼 남부 대륙도 많은 것이 변했다. 네가 알던 중간계는 사라지고 있다.
그 말대로 남부 대륙은 많은 것이 변했다.
마계와의 겹침 현상은 남부의 삼림을 죽이고 강물을 마르게 했다.
중간계는 병들어 가고 있다.
- 악마왕조차도 대격변을 막을 수는 없다. 다만 그는 대격변으로 겹쳐질 수많은 세계와 전쟁을 치를 것이고, 승리할 것이다. 그렇게 그는 변모되어 살아남은 중간계의 새로운 질서가 될 것이다.
이전의 마지막 대결에서 카르타고가 했던 말들.
그러나 카르타고는 샤를의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못했다.
누가 보아도 저 고위악마들은 중간계 전체와 전쟁을 치르려는 게 아니다.
“어이 야만 미물! 저거 보여? 악마 미물 군단이 나타났다!”
도롱뇽의 말대로, 지상엔 두 고위악마가 불러낸 것으로 짐작되는 악마들로 가득했다.
악마 군단은 아인하르트 군에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놈들은 오직 연합군만을 공격하고 있었고, 그 여파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피핀은 자신의 군대를 필사적으로 후퇴시키고 있다.
왜일까.
왜 악마 군단은 연합군만을 타깃으로 삼고 있는 것일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샤를이 아몬의 힘을 완전히 각성한 것이다.
“히익! 저 고위악마 새끼들 또 온다! 야, 야만 미물! 너 지금 저거 보고 있는 거 맞지! 그렇다고 말해 빨리! 카아아앗!”
대악마 아몬은 악마들의 우두머리다.
물론 아몬 말고도 대악마는 존재하지만 주신 전쟁을 일으킨 주동자는 아몬이다.
마계의 모든 악마는 아닐지라도, 많은 악마들이 아몬을 따른다는 의미.
그리고.
악마의 군대를 맞닥뜨린 지금의 상황은 연합군에게 다시없을 위기였다.
카아아앙!
무휼과 드라칼리온이 두 고위악마의 공격을 막았다.
버서커의 힘을 발현했음에도 만만치 않다.
당연한 일이다.
고위악마는 한때 신이었던 존재.
물론 아틸라는 신이 결코 완벽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신은 혼돈이 창조한 존재다.
정확히 말하자면 ‘엘로힘(엘)’을 본떠 만든 모조품에 불과하다.
‘혼돈은 자신의 분신 엘로힘과 닮은 여러 생명을 추가로 창조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신이라는 이름을 부여했지. 신들의 임무는 혼돈이 분열하며 파생된 파편들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그 파편에서 비롯된 힘이 오늘날 너희가 신력이라 부르는 힘이다.’
엘이 했던 이야기다.
그 말대로 신은 혼돈의 파편을 지키던 존재였고, 파편에서 발생된 힘을 흡수해 권능을 얻었다.
결국 신도, 인간도 혼돈의 창조물이란 이야기.
그러나 신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신의 다른 모습인 악마 또한 마찬가지.
아무리 단련된 인간이라 해도 고위악마와 자웅을 겨룰 수는 없다.
그럼에도 아틸라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사냥감을 발견한 짐승의 표정이었다.
* * *
키릴은 숨이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언데드 군단에 이어, 이젠 악마 군단이라니.’
사실 그동안 중간계엔 악마가 종종 모습을 드러냈었다.
하급 악마부터 상급 악마까지.
당연하게도 이들을 토벌하는 임무는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이 도맡았다.
키릴은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기에 직접 참여하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악마 토벌은 순조로웠다.
마계가 중간계에 겹쳐질수록 성기사의 성력도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고위악마 푸르손.
상급 악마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존재다.
게다가 푸르손의 뒤엔 악마 군단이 있다.
바토리의 기습으로 상당수가 소멸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수가 남아 있었다.
카아앙!
키릴의 아밍 소드가, 방패가, 푸르손의 발톱과 나팔에 부닥쳤다.
키릴의 몸엔 성스러운 오러가 둘러져 있었다.
바토리의 보호막도 씌워졌다.
덕분에 키릴은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면서도 그럭저럭 푸르손과 경합을 벌일 수 있었다.
키릴이 푸르손과 육탄전을 벌이는 동안 바토리는 마법으로 그녀를 지원했다.
그러면서 바토리는 악마 군단도 동시에 상대했다.
푸르손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버티며 키릴은 생각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바토리의 지원 사격이 없었다면 이미 한참 전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키릴은 씁쓸하게 웃었다.
아틸라 일행의 등장으로 그녀는 내심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함께 전투를 치르며, 키릴은 그들의 힘이 이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혼돈의 힘을 각성한 아틸라.
더욱 강력한 마법사로 변모한 바토리.
드래곤 마스터가 된 오토.
최강의 귀살자 카스피.
전성기의 힘을 되찾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거기에 더해 골드 드래곤 루미니우스까지.
키릴은 이번 전쟁이 승리로 귀결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희망을 짓뭉개듯, 고위악마 푸르손과 악마 군단이 등장했다.
- 제법이군. 인간.
푸르손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키릴의 무위에 감탄했다.
키릴은 강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다.
- 포이베의 힘.
푸르손은 키릴이 포이베의 화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또한 포이베의 힘이 마기에 반응할수록 더욱 강력해지는 힘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 의미에서 키릴은 푸르손에게, 아니 모든 악마들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대격변의 영향으로 중간계는 마계와 합쳐지고 있다.
그렇다면 눈앞의 이 성기사와, 그가 이끄는 성기사단의 힘은 귀찮은 존재가 될 것이다.
- 너희들은 모두 이곳에서 죽는다.
푸르손의 팔이 붉은빛으로 타올랐다.
인간의 손 모양에, 마치 맹수의 발톱 같은 것을 지니고 있던 그의 손.
그것이 사자의 앞발로 모습을 바꾼 순간 키릴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퍼어어엉!
키릴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키릴은 두 눈을 부릅뜨며 자신과 푸르손 사이에 끼어든 바토리를 봤다.
바토리는 무언가 마력을 발휘했고, 그것은 푸르손에게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그 대가로 바토리의 몸은 갈기갈기 찢겼다.
“바토리!”
키릴이 이를 악물며 지면을 밟았다.
몇 발자국 뒤로 밀려나는 푸르손을 향해 폭풍처럼 질주했다.
그러는 동안 키릴은 믿기 힘든 광경을 봤다.
갈가리 찢긴 바토리의 몸이 액체처럼 흐물흐물해지고, 붉은 핏물이 되어 허공으로 솟았다.
이어 하나로 뭉쳐진 그것이 기화되며 안개처럼 변했고, 푸르손을 추격했다.
‘저게 무슨……!’
길게 생각할 틈은 없었다.
키릴은 어느새 푸르손 앞에 도달했다.
주력이 더욱 빨라진 것을 감각하며 키릴은 아밍 소드에 성력을 주입했다.
그것이 신력으로 바뀌며 검기처럼 뻗쳤다.
푸르손은 바토리의 일격을 맞고 약간의 빈틈을 드러낸 상황.
지금이라면 저 고위악마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수 있다.
바토리는 자신을 대신해 죽었다.
그녀의 죽음을 헛되이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
키릴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푸르손의 등 뒤로 넘어간 붉은 안개가 인간의 형상으로 변했다.
살기 어린 눈을 뜬 바토리.
타오르는 그녀의 왼팔은 푸르손의 뒤통수를 똑바로 겨냥하고 있었다.
파아앙!
바토리의 손에서 뻗친 핏빛의 창날이 푸르손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와 동시에 키릴의 아밍 소드가 푸르손의 가슴을 베었다.
키릴은 검신을 타고 전해지는 촉감에 전율했다.
제대로 들어갔다.
퍼퍼퍼펏……!
푸르손의 뻥 뚫린 이마에서 검은 핏물이 쏟아졌다.
그제서야 키릴은 바토리가 발현한 창날이 푸르손의 머리를 꿰뚫은 뒤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어깨를 스쳤다는 것을 알았다.
직접 몸에 닿지 않았음에도 심장이 터질 듯 고동쳤다.
무시무시한 마법이다.
저런 마법에 직격 당하면 아무리 고위악마라 해도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키릴은 바토리를 봤다.
바토리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키릴!”
바토리가 발현한 무형의 마력이 키릴의 몸을 뒤로 날렸다.
그 덕분에 키릴은 푸르손의 공격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토리는 아니었다.
우드드득.
푸르손의 손아귀가 바토리의 목을 움켜쥐었다.
바토리는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푸르손의 구멍 난 이마를 봤다.
마치 구더기처럼 보이는 마기의 움직임이 무서운 속도로 상처를 수복하고 있었다.
- 인정하지. 나는 널 무시하고 있었다.
바토리의 입에서 왈칵왈칵 핏물이 흘렀다.
- 하지만 생각을 바꿨다. 넌 위험한 존재다.
바토리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사지를 버르적댔다.
- 넌 이미 내 손에 두 번 죽었다. 그렇다면 남은 목숨은 다섯.
푸르손의 안광이 번들대는 살기를 머금었다.
- 먼저 널 다섯 번 죽이겠다. 그러고 난 뒤 나머지 인간들을 처리하도록 하지.
푸르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일단은 하나.
부드드드득!
바토리의 머리가 몸에서 분리됐다.
시체가 된 바토리가 바닥에 떨어질 무렵 키릴이 푸르손을 공격했다.
푸르손은 어렵지 않게 그 공격을 막은 뒤, 부활한 바토리를 노렸다.
콰드드득!
- 둘.
키릴을 무시한 채 바토리만을 노리는 푸르손의 살기와 집중력은 대단했다.
- 셋.
연이은 죽음에서 되살아난 바토리는 푸르손에게서 압도적인 공포를 느꼈다.
- 넷.
“바토리!”
키릴은 푸르손의 목소리를 통해 바토리의 상황을 유추했다.
바토리에겐 일곱 개의 목숨이 있다.
또한 바토리는 이미 여섯 차례 죽음을 맛봤다.
그렇다면 남은 목숨은 하나.
“으아아아아아!”
키릴은 의식이 날아갈 정도로 신력을 방출하며 푸르손을 공격했다.
그 기세는 푸르손마저 잠시 주춤하게 만들었지만 그뿐이었다.
푸르손은 바토리와 키릴, 둘 모두를 동시에 제거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몸이 더욱 부풀었다.
한 손으론 바토리를, 다른 손으론 키릴을 타격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퍼어어어엉!
푸르손은 어디선가 날아온 둔탁한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강타하는 것을 느꼈다.
생각 외의 강력한 타격에 그의 몸이 주르르 옆으로 밀려났다.
푸르손은 자신의 몸을 가격한 뒤 바닥에 널브러진 물체를 봤다.
나베리우스와 스토라스의 잘린 머리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