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394화 (394/425)

394. 대격변 (4)

바토리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을 봤다.

풍경은 팽이처럼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지만 감각이 곤두선 그녀의 눈은 그 광경을 느릿하게 인식했다.

흐르는 구름.

지면 위의 흙먼지.

흩날리는 핏물.

이것이 죽음이라는 감각인가, 바토리는 생각했다.

그녀에겐 일곱 개의 목숨이 있다.

아니, 초기화의 여유가 있다면 실상 그녀의 목숨은 무한대나 마찬가지다.

그것이야말로 관조자라는 존재가 지닌 놀라운 힘 중 하나였고, 대부분의 관조자는 그렇게 수없이 목숨을 잃어 가며 힘을 향상시킨다.

하지만 바토리는 다르다.

그녀는 영겁의 세월을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죽음에 이른 적이 없다.

그런 그녀에게 지금의 경험은 생소하고, 또 불안한 것이었다.

‘나는 죽는다.’

그러나 부활할 것이다.

‘리베르가 살아 있다면.’

바토리는 리베르의 기운을 감지했다.

죽음의 시간에 이르자 그 기운은 수십, 아니 수백 배는 증폭되어 바토리의 감각을 일깨웠다.

죽음에 이른 관조자는 파트너의 마력을 통해 제 몸을 수복한다.

그것에 물리적인 거리는 상관이 없다.

바토리는 리베르의 기운이 몸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렇게 몸의 수복이 시작됐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멈추었다.

‘……?’

바토리의 심장은 아직 뛰고 있다.

그것이 불안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수복이 시작됐던 몸이 다시 죽음을 향한다.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

더 이상 리베르의 기운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리베르.’

리베르를 불렀다.

대답은 없다.

다만 바토리는 깨달았다.

리베르는 위험에 처했다.

아니, 죽어 가고 있다.

‘……!’

바토리는 리베르의 기운이 급격히 쇠락하는 것을 느꼈다.

리베르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제서야 바토리는 자신을 공격한 미지의 존재에 대해 떠올렸다.

이 전장엔 자신과 리베르를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의 강자가 있다.

의도였는지 아니면 우연이었는지, 그 존재들은 자신과 리베르를 거의 동시에 타격했다.

바토리는 눈을 깜빡였다.

자신을 죽음으로 끌고 가는 습격자의 모습을 찾았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크르르르르…….

사자의 머리.

한 손엔 짐승의 뿔로 만든 거대한 나팔을 들었고, 다른 손엔 새빨간 피가 묻어 있다.

저 우악스러운 손이 자신의 허리를 절단했을 것이다.

바토리는 상대의 정체를 깨달았다.

‘푸르손.’

단정왕(端正王) 푸르손.

인간의 외형에 사자의 머리를 지닌 고위악마.

바토리는 고위악마가 이곳에 등장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면서 납득했다.

전장의 어딘가에서 리베르를 습격한 것 역시 다른 고위악마일 것이다.

바토리는 자신의 생명과 리베르의 생명이 거의 동시에 꺼질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

영원한 소멸.

영겁의 삶을 살아온 자신이 이렇듯 갑작스레 죽음을 맞게 될 줄은 몰랐다.

‘야만전사야.’

세상은 여전히 회전하고 있다.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세계를 눈에 담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바토리는 아틸라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틸라가 야속했다.

그는 왜 이곳에 자신을 두고 간 것일까.

왜 그런 결정을 내려, 죽음의 순간에 그의 모습을 볼 수 없도록 만든 것일까.

바토리의 시야가 흐려졌다.

부옇게 변해 가는 시선이 키릴에게 닿았다.

아틸라의 부탁으로 키릴은 선두가 아닌 바토리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키릴 또한 푸르손의 기척을 눈치챘다.

그러나 한발 늦었고, 그래서 바토리의 허리가 동강나는 광경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만 했다.

바토리의 눈에 부릅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아틸라가 왜 자신을 키릴의 곁에 두었는지 깨달았다.

키릴을 불렀다.

꺼져 가는 목소리를 억지로 내어 소리쳤다.

바토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키릴은 들었다.

키릴의 두 손이 밝게 빛났다.

쇄도하는 푸르손의 2차 공격을 방패로 막으며, 키릴은 바토리의 절단된 상체를 받았다.

퍼어어엉!

키릴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그 와중에도 키릴은 바토리의 상체에 치유의 주문을 흘려 넣었다.

바토리는 몸 안에 약간의 생기가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물론 아무리 키릴이라 해도 허리가 동강난 자를 살릴 순 없다.

그러나 약간이면 된다.

아주 조금만 죽음을 늦출 수 있다면.

그래서 리베르가 바토리보다 먼저 목숨을 잃게 된다면, 바토리는 리베르를 되살릴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이후 바토리가 죽는다 해도, 되살아난 리베르의 마력으로 그녀 또한 부활할 수 있다.

바토리는 기원했다.

‘나의 친구 리베르야.’

빨리 죽으려무나.

‘……빌어먹을 공주 전하.’

리베르의 투덜대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렇게 아주 약간의 생을 연명한 바토리는 리베르의 죽음과, 부활을 느꼈다.

그것을 확인한 바토리도 만족의 미소를 지으며 생애 첫 죽음을 받아들였다.

* * *

키릴은 혼란스러웠다.

불현듯 등장한 악마.

악마의 기운을 감지하자마자 키릴은 뒤를 돌았고, 바토리의 허리가 동강나는 것을 봤다.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

그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여유롭게 웃으며 승리를 쟁취할 것만 같던 그녀가 단 한 번의 일격에 허리가 절단됐다.

바토리의 하체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잘린 상체는 타격의 반동으로 빙글빙글 회전하며 허공을 날았다.

키릴은 바토리의 상처가 치유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자신의 성력이 빼어나다 해도,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자를 살릴 순 없다.

키릴은 아틸라를 떠올렸다.

아틸라는 자신에게 바토리의 보호를 부탁했었다.

저 무시무시한 마법사의 보호를 부탁할 정도로 자신을 믿고, 또 인정한다는 사실에 키릴은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바토리를 안전하게 지키겠노라 다짐하며, 처음으로 전장의 선두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지키지 못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죽을 것이다.

키릴마저 바토리의 생을 포기한 순간 바토리의 외침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키릴은 바토리에게 추가 공격을 가하려는 악마를 봤다.

바토리의 상체를 받아들며 방패를 뻗었다.

퍼어어엉!

키릴의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 와중에도 키릴은 바토리를 치유했다.

조금 전 바토리는 자신을 치유하라고 외쳤다.

평소의 아름다운 음성이 아닌, 마치 쇳가루를 삼키며 외치는 듯한 갈라진 목소리로.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하지만 키릴은 그렇게 했다.

“크흐윽……!”

치유의 성력을 발하자 흐트러져 가던 키릴의 정신도 돌아왔다.

키릴은 바토리에게 다시 한번 성력을 주입하며 바닥에 내려놨다.

그러고는 재차 달려드는 악마를 향해 마주 달려갔다.

“다, 단장!”

그제서야 성기사들이 상황을 알아챘다.

푸르손이 등장해 바토리의 허리를 절단하고.

놈의 2차 공격을 방패로 막은 키릴이 바토리를 치유하고.

다시 키릴이 푸르손에게 마주 달려갈 때까지의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했다.

그 와중에도 키릴은 자신의 성력이 더욱 강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악마 때문이다.

놈은 키릴이 지금까지 마주한 그 어떤 적보다도 강대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카아앙!

키릴의 아밍 소드가 악마의 나팔과 부닥쳤다.

악마의 엄청난 힘에 키릴의 몸이 다시금 뒤로 밀려났다.

약간이지만 악마의 몸도 뒤로 밀렸다.

사자의 얼굴이 일순 당황을 머금었고, 사납게 으르렁댔다.

그러고는 손안의 나팔을 불었다.

빠아앙! 빠아아아앙!

멋들어진 사자 갈기의 위용을 뽐내던 그의 나팔에서 뿜어졌다기엔 다소 가벼운 소음.

그러나 나팔 소리에 이어 등장한 존재들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키에에!

키헤에에에……!

푸르손의 뒤로 악마 군단이 나타났다.

지면을 뚫고 솟아나기도,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나타나기도, 하늘 위에서 내려오기도 했다.

엄청난 숫자였다.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은 졸지에 언데드 군단과 악마 군단 사이에 낀 형국이 됐다.

푸르손이 키릴에게 달려왔다.

그에 따라 악마 군단도 저마다의 날개와 다리를 휘두르며 진격해 왔다.

키릴은 망연자실했다.

‘이렇게…… 끝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키릴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몸 안의 성력을 끌어올렸다.

수많은 악마들의 등장으로 그녀의 성력은 한 번 더 강화됐다.

이곳에 있는 다른 성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 진겨어어억!”

목이 터져라 소리치며 키릴이 달렸다.

그녀의 뒤를 따라 성기사들도 달렸다.

“빛의 신이시여!”

키릴의 아밍 소드에서 눈부신 광채가 피어났다.

그것이 푸르손의 나팔과 몸을 섞었다.

그 순간 키릴은 푸르손의 몸에서 검은 핏물이 분출하는 것을 봤다.

자신의 공격 때문이 아니다.

아밍 소드는 악마의 나팔과 맞부딪친 상태다.

그렇다면 저 악마는 왜.

퍼어엉!

푸르손의 등에서 폭발하듯 핏물이 터졌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새빨간 마력의 칼날.

그것이 악마들의 진영을 헤집으며 피의 살육을 벌이고 있었다.

키릴의 눈이 부릅떠졌다.

키릴은 저 칼날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실로 아슬아슬했구나, 키릴.”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푸르손의 몸이 뒤로 튕겨났다.

키릴은 떨리는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언제 허리가 동강났느냐는 듯 멀쩡한 모습의 바토리가 거기 있었다.

“……어떻게.”

“흐응. 역시 몰랐던 것이더냐.”

“그게 무슨…….”

“설명은 나중에 하자꾸나. 일단은 푸르손을 막아야 할 것 같으니.”

바토리의 얼굴 표정이 차가워졌다.

단정왕 푸르손.

당연한 말이지만 고위악마는 드래곤보다 강력한 존재다.

거기에 더해 푸르손은 고위악마 중에서도 독보적인 강자다.

‘그야말로 대격변이로구나.’

그럼에도 바토리는 푸르손과 악마 군단과의 전투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곳엔 키릴이 있다.

크레센시아 성기사단이 있다.

또한 바토리는 관조자에게 고위악마보다 월등한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무리 고위악마라 해도 결국은 혼돈의 피조물.

신도, 악마도 목숨은 하나다.

죽이는 것이 어려울 뿐이지, 일단 죽고 나면 되살아날 수 없다.

그러나 바토리에겐 아직 여섯 개의 목숨이 남아 있었다.

바토리의 핏빛 입술이 투쟁의 미소를 그렸다.

* * *

아틸라는 등에서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나베리우스에게 드라칼리온을 휘두른 순간 무언가가 등을 타격했다.

그의 충혈된 안구가 뒤를 돌아왔다.

부엉이의 머리와 날개.

그 아래서 번득이는 은빛의 발톱.

아틸라는 기습자의 정체를 알아봤다.

아공자(鴉公子) 스토라스.

용맹공 나베리우스와 마찬가지인 고위악마.

“뭐, 뭐야! 저놈은 또 왜!”

도롱뇽도 제법 당황했다.

아무래도 나베리우스가 전투법을 바꿔 아틸라를 이곳에 묶어 둔 이유는 아공자 스토라스를 기다리기 위함인 듯했다.

“비, 빌어먹을! 고위악마 미물 새끼들이 두 마리나 등장했다! 뭐, 뭐? 우린 셋이라고? 그게 지금 말이냐 방구냐 미친 곰탱이 새끼야!”

도롱뇽은 투덜대면서도 빠르게 날개를 움직여 위치를 바꿨다.

아틸라는 등의 상처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버서커의 힘을 발현한 상태.

깊은 통증은 오히려 쾌감으로 치환된다.

두 악마를 노려보는 아틸라의 잇새로 짐승의 포효가 새어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