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 대격변 (3)
악마는 한때 신이었다.
그리고 신은 먼 옛날 지구를 살아가던 인간의 모습을 참고해 만들어졌다.
물론 이 시대의 악마는 한때 신이었던 대악마와 고위악마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대악마와 고위악마에 의해 탄생되고, 혹은 그들의 영향을 받아 타락한 상급, 중급, 하급 악마 모두를 통칭한다.
신계에 천사들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와, 악마는 원래 신과 같은 인간의 외형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바뀌었다.
악마는 신을 이기고 싶었고, 또한 주신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육체를 변화시켰다.
그것은 진화였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타락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펄럭.
검은 날개를 움직이는 거대한 검은 형체.
그것은 하늘 위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기척을 감지한 건 도롱뇽이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아틸라도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도롱뇽이 지면에 처박혔다.
크르르르르르……!
도롱뇽이 고개를 좌우로 털며 몸을 일으켰다.
도롱뇽은 자신을 기습한 상대가 누구인지 알았다.
- 고위악마 나베리우스.
아틸라도 녀석을 알아봤다.
고위악마 나베리우스.
‘용맹공(勇猛公) 나베리우스’라고도 불리는 비행종 악마.
놈이 지닌 세 개의 머리가 각기 다른 포효를 뱉었다.
이어 아틸라와 도롱뇽을 향해 날아들었다.
“전군! 후퇴하라!”
피핀은 퇴각을 결정했다.
이곳은 지상군 위주로 짜인 전장.
이 상황에서 아틸라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그리고 나베리우스라 불린 저 고위악마가 맞붙는다면 엄청난 후폭풍이 불어닥칠 것이다.
피핀의 예상대로 되었다.
그리고 인간과 군마의 발은 악마의 날개보다 빠르지 않다.
콰아아아앙!
폭탄처럼 공기가 터졌다.
악마의 발톱과 드라칼리온이 부닥치며 만든 변화였다.
아틸라는 어깨가 삐걱대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완력.
과연 용맹공이라 불릴만한 악마였다.
힘을 되찾은 도롱뇽이 허무하게 바닥에 처박힌 것도 납득이 갔다.
아틸라의 몸 근육이 부풀었다.
그는 용력의 권능을 발현해 용맹공을 밀쳤다.
“일어나라! 도롱뇽 새끼!”
아틸라가 도롱뇽의 등에 올라탔다.
기다렸다는 듯 도롱뇽이 하늘로 솟았다.
“아까부터 일어나 있었다! 그, 그리고 내가 당한 건 저놈이 비겁하게 기습을 했기 때문이야! 원래는 내가 이긴다고!”
도롱뇽의 허세다.
물론 도롱뇽은 고위악마 하나 정도와는 충분히 자웅을 겨룰 수 있다.
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기는 건 쉽지 않다.
카아앙!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나베리우스가 도롱뇽을 습격했다.
도롱뇽도 이번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앞발을 뻗어 상대의 발톱을 막았다.
이어 초 레어 송곳 브레스를 발현해 반격했다.
퍼어어엉!
브레스에 적중된 나베리우스가 하늘 저편으로 날아갔다.
치명상은 아니다.
아틸라는 오감을 곤두세웠다.
감지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고, 불온한 기척이 있는지 확인했다.
마계의 고위악마는 나베리우스만이 아니다.
녀석만 중간계에 등장했다고 확신할 수 없다.
이 다급한 상황에서도 도롱뇽은 입을 털고 있었다.
“봤냐! 봤냐봤냐 야만 미물! 내가 놈의 공격을 막고 멋지게 반격에 성공하는 걸 봤느냐 이 말이다!”
“닥치고 냄새나 맡아라. 나베리우스 말고 다른 악마들이 나타났는지.”
도롱뇽이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러나 나베리우스는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변칙적인 비행 기술을 발휘하며 재차 도롱뇽을 습격했다.
도롱뇽이 나베리우스를 막고, 아틸라가 검기로 반격했다.
그러면서 아틸라는 곁눈으로 지상을 봤다.
연합군과 제국군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으으으……! 악마다! 저건 악마야!”
“사, 살려……! 끄아아아악!”
그 와중에도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아무리 하늘 위에서의 전투라 해도 지상에 피해가 없을 수는 없다.
‘용맹공 저 새끼가 냄새 맡을 틈을 안 준다! 계속 킁캉킁캉하고는 있는데 저 새끼 고약한 냄새에 다 가려진다!’
도롱뇽이 마음의 목소리로 외쳤다.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펀치가 나베리우스에게 달렸다.
아틸라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펀치!”
아틸라는 펀치에게 의지를 전달했다.
펀치의 몸이 거대하게 변했다.
우어어어어!
두 앞발을 힘차게 들어 올린 펀치가 나베리우스의 머리통 하나를 타격했다.
꽈아앙! 두개골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나베리우스가 몸을 움찔했다.
펀치는 아자젤의 권능을 부여받은 신수(神獸).
고위악마를 상대로도 어느 정도 공격이 통했다.
나베리우스가 거칠게 포효했다.
아틸라는 무휼에 성력을 집중했다.
악마를 상대하는 덴 드라칼리온보다 무휼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무휼의 검신이 늘어나며 긴 창날의 형태로 변했다.
내뻗친 무휼의 날이 나베리우스의 또 다른 머리통을 관통했다.
그 공격으로 아틸라는 확신했다.
‘상대할 수 있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그리고 도롱뇽과 펀치가 있다면 고위악마도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다.
부웅.
나베리우스가 몸을 빼며 거리를 벌렸다.
녀석도 이대로라면 위험하다는 것을 감지한 듯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도롱뇽이 코를 발름댔다.
그러고는 경악했다.
“야, 야만 미물!”
도롱뇽의 머릿속을 읽은 아틸라의 표정도 변했다.
생각대로다.
중간계에 모습을 드러낸 고위악마는 나베리우스만이 아니다.
아틸라는 동료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았다.
도롱뇽에게 서둘러 자리를 이탈하라는 의지를 전했다.
그러나 나베리우스가 방해했다.
“빌어먹을 악마 새끼! 카앗!”
도롱뇽이 성질을 내며 앞발을 휘둘렀다.
나베리우스의 공격 패턴이 변했다.
놈은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보다는 이곳에 붙잡아 두는 것에 주력하려는 것 같았다.
“아 뭐 이런 찰거머리 같은 미물 새끼가 있어! 넌 고위악마로서의 품격도 없는 거냐! 카아아앗!”
아틸라는 놈을 쓰러뜨리지 않고서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버서커의 힘을 발현해야 한다.
아틸라는 가급적 버서커의 힘을 발현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자신이 아무리 강해졌다 해도 버서커의 힘을 사용하면 후유증이 있다.
당연히 연이어 버서커의 힘을 사용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는 샤를과의 전투를 위해 몸 상태를 최고조로 유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동료들이 위험하다.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다.
아틸라의 안구에서 검은자위가 사라졌다.
그곳에서 우툴두툴 혈관이 돋아났고, 느슨하게 벌어진 갑주 사이로 핏줄기가 솟았다.
드라칼리온의 검신이 몸을 불렸다.
카르타고를 쓰러뜨렸을 때처럼.
확장된 검신에 첨예한 검기가 맺혔다.
아틸라는 나베리우스를 향해 드라칼리온을 휘둘렀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나타난 무언가가 그를 기습했다.
* * *
바토리는 기척을 숨긴 채 크레센시아 성기사단에 속해 있었다.
그녀는 아틸라가 자신을 두고 간 것에 대해 조금 토라진 상태였다.
“이곳은 별로 재미가 없구나 야만전사야.”
성기사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언데드들이 죽어 나갔다.
크레센시아 성기사단은 언데드를 상대하는 데 특화된 무력 집단.
게다가 그들을 이끄는 키릴은 못 본 사이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다.
“그래. 중간계에 마기가 날뛸수록 넌 더욱 강해지는 거겠지.”
바토리는 안력을 높여 나바라 왕국군의 진영을 봤다.
“철혈귀검이 아주 신이 난 게로구나.”
왕의 기개를 뿜으며 적진을 누비는 오토.
그런 오토를 보며 바토리는 웃었다.
누가 보아도 오토는 왕이었다.
그는 왕의 가면을 썼다.
아니 왕의 얼굴이야말로 그의 본모습이고, 평소 일행과 함께할 때의 모습이 오히려 가면이라는 것을 바토리는 알고 있었다.
다만 오토는 그 가면을 너무 오래 썼다.
그래서 가면을 자신의 얼굴이라 착각하고 있다.
바토리는 문득 하늘을 올려 봤다.
수많은 화염구들이 성기사들을 향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마, 마법사다!”
“제국의 마법사들이 이쪽에 있었어!”
바토리는 성기사들의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 저 다량의 화염구는 마법사의 손에서 펼쳐졌다.
하지만 여러 명이 아니다.
저 모든 화염구는 오직 한 사람의 손끝에서 발현됐고, 바토리는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일 수 있는 자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바토리가 길게 입술을 찢었다.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더냐. 애송이 제롬.”
바토리가 팔을 뻗었다.
기이한 울림과 함께 허공이 일그러졌다.
일그러진 허공이 마치 그물처럼 화염구들을 받았고, 그대로 삼켰다.
화염구들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성기사들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바토리를 돌아봤다.
키릴이 크게 외쳤다.
“우리에겐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있다! 진격하라!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이여!”
“우오오오오오!”
성기사들의 사기가 높아졌다.
바토리도 그들과 함께 말을 달렸다.
제롬이 등장했다.
더 이상 기척을 감출 필요는 없다.
“이히테 페로 노음니하.”
바토리의 손에서 거대한 불화살이 발사됐다.
그녀는 직전의 화염구로 제롬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곳을 향해 불화살이 무서운 속도로 쇄도했다.
그러나 화살은 목표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파괴됐다.
제롬이 방어 마법을 펼친 것이다.
예상보다 손쉽게 소멸된 자신의 마법을 보며 바토리는 웃었다.
“그래. 그 정도는 해 줘야 재미가 있지 않겠느냐.”
이번엔 제롬의 차례였다.
그는 보란 듯이 바토리가 시전한 불화살과 동류의 마법으로 바토리를 공격했다.
바토리가 그것을 막고, 이번엔 빙속성 마법을 발현했다.
제롬 역시 어렵지 않게 방어한 뒤, 마찬가지로 빙속성 마법으로 반격했다.
바토리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제자의 성취를 반가워하던 스승의 여유가 사라졌다.
제롬 때문이 아니다.
바토리는 주위 공기에서 불온한 기운을 느꼈다.
“아무래도 여기서 끝을 봐야겠구나. 애송이 제롬.”
바토리의 안력이 제롬의 모습을 찾아낼 정도로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다.
바토리가 왼팔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마멸의 칼날 세 자루가 탄환처럼 발사됐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던 그것이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며 제롬을 습격했다.
이번만은 제롬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제롬은 바토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화염구 다발을 발현했었다.
그러나 그곳엔 바토리가 있었고, 그 결과로 자신은 위험에 처했다.
제롬은 자신이 지닌 최강의 방어 마법을 발현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미리 만들어 두었던 마법진의 힘까지 빌렸다.
카카카카카캉!
날카로운 소음이 공기를 울렸다.
제롬은 마멸의 칼날을 막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마멸의 칼날은 단순한 마법이 아니다.
먹이를 습격하는 뱀처럼 방어벽을 우회했다.
그 순간 바토리는 심장이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
제자를 쓰러뜨린다는 죄책감 때문이 아니다.
조금 전 감지했던 불온한 느낌.
그것이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이것은……!’
바토리는 마멸의 칼날을 회수했다.
그와 동시에 두 자루 마멸의 칼날을 추가로 생성했다.
그러나 상대의 공격이 더욱 빨랐다.
콰드드득!
바토리의 허리가 무참히 절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