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 대격변 (2)
마계(魔界).
아득히 먼 옛날, 주신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것에 성공한 악마들의 은신처.
당시 악마들을 부추겨 주신 전쟁을 일으킨 건 대악마 아몬이다.
그러나 아몬은 전쟁 이후 마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중간계에서 무언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것만을 악마들은 어렴풋이 느꼈을 뿐.
헤아릴 수 없는 자.
그런 연유로 생겨난 아몬의 이명이다.
악마들은 마계의 어둠 속에 도사린 채 기다렸다.
아몬은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야말로, 마계의 악마들은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 주겠다.’
달콤한 목소리가 악마들을 유혹했다.
악마들은 언젠가부터 마계와 중간계가 겹침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그것이 대악마 아몬과 연관이 있으리라 여겼다.
‘오너라. 마계의 악마들아.’
악마들은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향해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악마들이 뒤를 따랐고, 악마들의 행렬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길어졌다.
그렇게 도달한 장소에서 악마들은 보았다.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은 성.
휘날리는 깃발.
금사자의 문양이 각인된.
‘나의 이름은 마왕(魔王) 아몬.’
악마들은 백금빛 갑주를 입은 금발의 사내를 봤다.
그에게서 지금껏 자신들이 기다려왔던 존재를 느꼈다.
악마들이 무릎을 꿇었다.
마왕의 푸른 눈이 칼날 같은 광채를 뿜었다.
* * *
원래 아틸라는 클라우디우스 제국의 언데드들을 물리친 뒤, 그대로 전선을 뚫고 남하해 샤를에게 직진하려 했었다.
하지만 언데드 군단을 물리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요툰들이 대거 등장했다.
특히 아틸라가 이동하려던 경로엔 더욱 많은 요툰들이 나타났다.
‘아틸라 님! 저, 저게 뭐요!’
‘뭐긴 뭐야 영주 나리! 요툰이잖아!’
아틸라는 계획을 수정했다.
요툰들을 정면으로 뚫고 지나가기엔 위험 요소가 많았고, 그럴 시간도 없었으니까.
아틸라는 대국경의 관문을 통해 남부 대륙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 그런데 이대로 떠나도 괜찮을까 아틸라? 제국에 요툰들이 너무 많은 것 같던데.’
‘마, 맞수. 제국엔 그 뭐시냐, 아틸라 님의 부친도 계시고…….’
카스피와 오토의 염려와 달리 아틸라는 제국과 요툰과의 전쟁에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급한 건 샤를의 야망을 무너뜨리는 것.
그리고.
‘중간계를 혼돈의 영향으로부터 독립된 세상으로 만드는 것.’
다행인 점은 아에스투스와 네트라비스가 죽으며 새로운 블루 드래곤과 그린 드래곤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두 드래곤은 제국에 우호적이었다.
게다가 북부인들이 제국과 힘을 합쳐 요툰과 싸우기로 했다.
북부인들은 아틸라에게 감화됐다.
또한 이제 와 중간계를 침범하는 요툰들이 오히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긴 세월이 흐르며 북부인은 변했다.
‘지금의 북부인은 요툰이 이 세계의 주인이었던 시절을 기억 못하는 자들.’
물론 모든 북부인이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다.
그러나 아틸라와 함께했던 전사들, 그리고 그들이 속한 부족의 족장들은 아틸라의 의지를 따랐다.
그렇게 남부로 넘어온 아틸라 일행은 연합군을 위기에서 구했다.
이후의 전투에서도 일행은 크게 활약했고, 연합군의 사기는 점점 높아졌다.
아틸라는 슬슬 연합군에서 벗어나 샤를을 찾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도 샤를의 위치는 특정할 수 없는 건가.”
“내 아무리 관조하려 해도 보이질 않는구나.”
소모전만을 반복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샤를을 만나야만 끝낼 수 있는 전쟁이다.
아틸라는 눈앞의 전쟁만 마무리한 뒤, 샤를을 찾아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수도에 있을 확률이 높겠지.’
이번 전쟁에서 아틸라의 목표는 피핀과 제롬이었다.
둘은 각각 샤를의 오른팔과 왼팔.
그들이라면 샤를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거다.
그래서 아틸라는 바토리에게 피핀과 제롬을 찾아보라고 했다.
대답은 의외였다.
“그러지 않아도 내 벌써 시도해 보았느니라. 허나 그 두 아이에게도 샤를의 힘이 미치는 것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럼 리베르는.”
바토리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아틸라를 봤다.
“내가 찾지 못하는 것을 리베르라고 찾을 수 있겠느냐.”
하긴 그렇군.
아틸라는 샤를이 자신의 생각을 읽고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녀석에겐 무언가 목적이 있는 거다.
그러니까 이렇게 숨어서, 거기에 더해 제 측근들까지 기척을 지워서 전쟁에 내보내는 것이겠지.
하지만 방법은 있다.
샤를과 달리 피핀과 제롬은 꾸준히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고, 그렇다면 전장의 하늘을 날며 육안으로 찾으면 그만이니까.
아틸라는 그렇게 했다.
놀랍게도 그가 하늘을 비행하는 것만으로도 아군은 사기가 올랐다.
“검은늑대의 아틸라다!”
“아틸라가 왔어!”
“와아아아아!”
오토는 루미니우스와 함께 나바라의 진영에서 싸웠다.
오토와 함께하는 나바라 군대의 무력은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을 능가할 정도였다.
카스피는 홀로 마법사를 암살하러 다녔다.
그것은 그녀에게 딱 맞는 임무였다.
벨라의 힘마저 흡수한 카스피의 기습을 버틸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카스피는 제롬을 발견하면 알리겠다며 시공추적의 반지 하나를 가지고 갔다.
바토리는 키릴의 곁에 두었다.
“어이 야만 미물. 저쪽이 조금 의심스러운데.”
아틸라가 합류한 이후 피핀은 더 이상 금사자 기사단을 이끌지 않았다.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일반 기사들의 틈에 섞여 무쌍을 찍고 다닌다고 한다.
그것을 알고 있는 도롱뇽이 이상을 감지했다.
아틸라는 도롱뇽이 말한 방향을 보며 안력을 높였다.
그의 입술이 만족의 미소를 그렸다.
* * *
피핀은 야망이 큰 사내가 아니다.
다만 그는 샤를의 친우였고, 어릴 적부터 샤를의 꿈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며 성장했다.
‘난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 거야.’
언제부턴가 샤를의 꿈이 그의 목표가 됐다.
피핀은 샤를이 꿈을 이루는 과정을 지켜보고 싶었다.
지금까지와 같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러는 과정에 피핀은 강해졌다.
샤를이 강해지면 피핀도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신선하고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피핀은 자신과 샤를이 운명의 실로 연결돼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샤를과 자신 사이에 끼어든 것이 카르타고였다.
- 악마왕이시여.
실은 그전엔 제롬이 그런 위치에 있었다.
피핀과 제롬은 견원지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수많은 전투를 함께 치르며 둘은 서로를 의지하는 사이가 됐다.
그런 두 사람 모두 카르타고를 경계했다.
카르타고는 본래 샤를의 적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샤를의 측근이 됐고, 샤를에게 엄청난 규모의 언데드 군단을 안겨 주었다.
언데드 군단.
보기만 해도 끔찍한 존재들.
피핀과 제롬은 샤를이 언데드 군단을 운용하는 것을 반대했었다.
하지만 샤를은 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언데드 군단은 내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야.’
언데드 군단은 북부 제국으로 보내졌다.
샤를은 남부를 넘어 북부 대륙까지도 정복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얼마 전 피핀은 북부를 침공했던 언데드 군단이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따로 있었다.
‘죽었다고? 그 카르타고가?’
카르타고를 쓰러뜨린 건 아틸라였다.
피핀은 아쉬움을 느꼈다.
그는 언젠가 카르타고를 제 손으로 처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지만, 지금의 피핀은 달랐다.
그는 카르타고는 물론이고, 아틸라를 상대한다 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파카카캉!
피핀의 검신에서 검은 오러가 뿜어졌다.
그것에 강타 당한 연합군 무리에 거대한 피의 가르마가 생성됐다.
“으, 으힉……! 저, 저게 뭐야!”
“괴물이다! 괴물이야!”
피핀이 이런 힘을 갖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아틸라가 연합군에 합류한 이후, 그리고 그것을 감지한 샤를이 황성에 틀어박혀 무언가에 집중하기 시작한 직후였다.
피핀은 당분간 이 힘을 사용하는 건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임무는 아틸라 일행이 황성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
샤를은 피핀과 제롬에게 아틸라 일행과 직접적으로 맞붙는 일은 피하라고 당부했다.
그 이유 때문에 피핀은 금사자 기사단을 떠나 이곳에 있다.
그런데 피핀의 조금 전 오러 공격을 가장 보지 말아야 할 자가 보고 말았다.
피핀은 문득 덜미에서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었다.
상대를 확인한 그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아틸라!”
콰아앙! 아틸라의 검과 피핀의 검이 맞부딪쳤다.
아틸라는 도약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곳에 모인 수많은 아군 때문이었다.
“거, 검은늑대의 아틸라!”
“아틸라다! 아틸라가 왔다고!”
“아틸라가 대장군 피핀을 쓰러뜨리러 왔다!”
순식간에 공간이 열렸다.
피핀은 아틸라에게서 카르타고를 넘어서는 기감을 느꼈다.
“어이. 피핀.”
아틸라의 입가에 송곳니가 드러났다.
“샤를 그 빌어먹을 놈은 어디에 있지?”
피핀은 샤를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샤를은 절대 아틸라 일행과 싸우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피핀은 아틸라를 코앞에 둔 채 퇴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가능할 리 없다.
아틸라라면 자신의 퇴각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피핀은 이 결투의 당위성을 부여했다.
눈을 감았다.
다시금 눈이 떠졌을 때, 피핀의 오러는 뱀처럼 아틸라의 급소를 습격하고 있었다.
‘마기?’
아틸라는 조금 놀랐다.
피핀의 검에서 마기의 오러가 쏘아졌다.
영웅 등급의 전사이긴 하지만 평범한 인간일 뿐인 피핀이 마기 오러라니.
아틸라는 원인을 유추했다.
애초부터 피핀은 샤를의 영향을 받아 영웅이 되는 인물.
또한 샤를이 성장하면 같이 성장하는 인물이다.
‘그래. 악마의 힘까지 따라 한단 말이지.’
믿기 힘든 일이다.
마기를 운용하지 않는 자가 마기 오러를 발현한다니.
아틸라는 웃었다.
쇄도하는 피핀의 오러를 향해 드라칼리온을 뻗었다.
카카캉!
드라칼리온에서 발현된 검기가 피핀의 오러를 절단했다.
검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부릅뜬 눈의 피핀을 향해 뇌전처럼 뻗쳤다.
“이게 무슨……!”
피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러를 두른 검을 가슴으로 당기며 방어자세를 취했다.
퍼어어엉!
폭탄이 터지는 소음과 함께 피핀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그 한 번의 공방으로, 피핀은 왜 샤를이 아틸라와 싸우지 말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아틸라는 강하다.
지금의 자신은 이길 수 없는 상대다.
그럼에도 피핀은 물러서지 않았다.
어차피 놈에게서 달아날 수는 없다.
게다가 하늘 위엔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까지 있다.
“아틸라아아아!”
피핀이 아틸라를 향해 달렸다.
그런데 아틸라는 다소 당황한 얼굴로 하늘을 보고 있었다.
피핀의 시선도 저절로 위를 향했다.
콰아아아앙!
고개를 드는 피핀의 정면으로 시커먼 것이 떨어졌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조금 전까지 위풍당당하게 하늘에 떠있던 그것이 무언가의 충격으로 지면에 추락했다.
피핀은 저 무시무시한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떨어뜨린 존재를 확인했다.
낯설다.
그럼에도 피핀은 확신했다.
그건 악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