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 대격변 (1)
아론은 놀랐다.
로버트도 마찬가지였고, 깊은 부상으로 의식을 잃어가던 로잘린과 던컨도 그 순간만큼은 고통을 잊고 머리 위를 올려 봤다.
황금빛 드래곤이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그 드래곤의 공격으로 스켈레톤 드래곤은 저만치로 나가떨어졌다.
“대, 대장……?”
아론이 중얼거렸다.
로버트, 던컨, 로잘린도 오토를 발견했다.
오토는 황금빛 드래곤의 척추 위에 위풍당당한 자세로 서 있었다.
오토가 아래를 보며 씨익 웃었다.
골드 드래곤도 그들을 봤다.
이어 드래곤의 눈에서 광채가 번득였고, 로잘린과 던컨은 놀란 눈으로 복부의 상처를 내려 봤다.
“상처가……!”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아론과 로버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 광경을 봤다.
“저게 무슨……!”
나바라의 병사들도 갑작스레 등장한 골드 드래곤과, 그 위에 우뚝 선 강철갑주의 전사를 봤다.
바람에 휘날리는 망토는 나바라 왕가를 상징하는 청록빛.
병사들의 눈이 흔들렸다.
그들 모두는 이 위기의 순간에 극적으로 나타난 전사의 정체를 깨달았다.
전사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외쳤다.
“나바라의 병사들이여!”
목소리의 울림은 대단했다.
병사들은 심장이 터질 듯 박동하는 것을 느꼈다.
왕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금빛으로 일렁이는 강철검을 뻗으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돌겨어어억!”
나바라의 병사들이 포효했다.
그들의 전투 함성이 쩌렁쩌렁 공기를 울렸다.
나바라는 왕에 대한 신뢰가 남다른 왕국.
그렇다고 왕의 책무를 다하지 않는 왕에게 모든 백성들이 우호적인 생각을 지녔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왕은 돌아왔다.
태양처럼 빛나는 드래곤을 타고서.
“왕께서 돌아오셨다!”
“우리를 지키기 위해 오셨다고!”
“우와아아아아!”
왕과 드래곤이 스켈레톤 드래곤을 향해 날았다.
그 아래를 로잘린과 세 기사가.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기사들이.
그리고 보병들이 따라 달렸다.
지면을 구르던 스켈레톤 드래곤이 몸을 일으켰다.
달려드는 나바라의 군대를 향해 쩌억 아가리를 벌렸다.
“브, 브레스다!”
“상관 말고 달려! 왕께서 돌격을 명하셨다!”
“그래 이 새끼들아! 주저 말고 달려! 달리라고!”
아론이 킬킬대며 소리쳤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론은 스켈레톤 드래곤의 브레스가 자신들을 해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을 했다.
그건 다른 기사와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들의 전열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키랴랴랴랴랴랴!
놈이 브레스를 뿜었다.
막상 쇄도하는 브레스를 보자 기사와 병사들은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군마들도 공포에 질려 날뛰었다.
그 순간 그들의 눈앞에 금빛 장벽이 펼쳐졌다.
파드드드드드……!
루미니우스가 생성한 빛의 방패가 브레스를 막았다.
스켈레톤 드래곤, 아니 언데드 드라칸은 강하다.
네트라비스나 아에스투스 같은 네임드 드래곤의 강함에 결코 밀리지 않는다.
그러나 놈의 브레스는 루미니우스의 방벽을 뚫지 못했다.
드라코리치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아니라면, 그 어떤 드래곤도 일대일로 루미니우스를 제압할 수 없다.
“달려라! 왕가의 수호룡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왕께서 우릴 보호하고 있어!”
“우오오오옷!”
나바라 병사들의 사기가 치솟았다.
오토는 루미니우스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주인 없이 달리던 군마 위에 안착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싸우겠다! 가자! 나바라의 병사들이여!”
안전한 드래곤의 등에서 벗어나 함께 말을 달리는 왕의 모습에 병사들은 감동했다.
오토는 말에 박차를 가해 진영의 선두로 나아갔다.
나바라의 왕은 모든 전투의 선두에 선다.
그것이야말로 왕이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이유다.
병사들은 전신에서 활력이 샘솟는 걸 느꼈다.
오토가 지닌 왕의 기개가 나바라의 병사들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오토의 강철검에 검기가 맺혔다.
그것이 스켈레톤 드래곤에게 휘둘러졌고, 검기에 얻어맞은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인간의 몸으로 드래곤에게 일격을 가하는 왕을 보며 병사들은 더욱 흥분했다.
“오토마이어 나바라 왕 만세!”
“왕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아아아아아!”
오토의 공격에 이어 루미니우스가 스켈레톤 드래곤을 습격했다.
그렇게 공중에서 두 드래곤의 혈투가 벌어졌다.
원래대로라면 오토는 루미니우스와 함께하는 편이 낫다.
페어링된 드래곤은 용기사와 함께할 때 가장 강력하니까.
그러나 오토는 병사들과 함께하는 것을 택했다.
루미니우스의 전투 능력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상관없다.
그는 병사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며, 함께 땀 흘리고 싶었다.
그것이 이제서야 돌아온 왕의 마땅한 책무라고 생각했다.
뿌우우우우우.
언데드 코끼리가 쿵쿵대며 달려왔다.
오토의 강철검이 다시금 빛의 검기를 머금었다.
목이 터져라 외쳤다.
“나는 나바라의 왕이다!”
츠컹!
섬광처럼 휘둘러진 강철검이 언데드 코끼리를 갈랐다.
* * *
활약하는 오토를 보며 아틸라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오토가 변화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변화한 것이 아니다.
오토는 원래부터 두 개의 가면을 갖고 있었다.
지금은 좀처럼 꺼내지 않는 왕의 가면을 썼을 뿐이다.
“흐응. 제법 왕 다운 기개를 보이고 있지 않느냐.”
바토리와 아틸라는 도롱뇽의 등에 올라타 있었다.
도롱뇽은 스켈레톤 드래곤의 머리를 지근지근 짓밟는 중이었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이 미물 놈들, 다른 드래곤과는 다르다.”
“뭐가 다르단 말이더냐.”
“코르키코스의 권속이니까 말이야. 엄밀히 말해 ‘드래곤’이 아니라는 거지.”
도롱뇽의 말에 바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이 아니라 ‘드라칸(드라콘)’이란 말이로구나.”
“그래. 앞으로는 이놈들을 언데드 드라칸이라 부르는 편이 낫겠다.”
드라칸과 드래곤은 다르다.
드래곤은 드라칸을 참고해 만들어진 피조물.
아틸라는 도롱뇽의 등 위에서 오토의 전투를 봤다.
오토는 놀라울 정도로 강해졌다.
이전에도 꾸준한 성장세를 보였지만 루미니우스의 마스터가 되며 급속도로 발전했다.
이제 대륙에서 오토를 상대할 수 있는 이는 흔치 않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영웅 등급의 강자라 할지라도.’
아틸라는 이곳의 언데드 드라칸을 쓰러뜨린 뒤 오토를 지원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지금 나바라의 모든 병사들은 오토의 등을 보고 있다.
오토와 루미니우스는 잘하고 있다.
굳이 끼어들어 공적을 가로챌 필요는 없다.
“이제 어떻게 할 테냐, 야만전사야.”
아틸라는 오토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눈앞의 전장을 내려 봤다.
아까부터 카스피와 펀치가 맹활약을 펼친 덕에 이곳의 전장 역시 순조롭게 제압되고 있었다.
물론 바토리의 지원 사격이 가장 큰 이유이긴 했다.
“다른 언데드 드라칸을 찾는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인 거 같군.”
“흐응. 단둘이서 하늘 위의 데이트로구나.”
“단둘은 무슨! 이몸도 있다!”
“넌 그저 탈것에 불과하니라.”
“뭐라고! 카아아앗!”
분노한 도롱뇽이 언데드 드라칸의 머리를 완전히 부쉈다.
그러고는 놈의 몸속의 핵을 찾아 파괴했다.
“이런 놈들이 얼마나 더 있을 것 같으냐.”
“글쎄.”
아틸라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나오는 추세를 보니 적지는 않을 듯하구나.”
“그럴지도.”
아틸라는 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두 드라콘의 탄생은 예기치 못한 일이었고, 또한 미래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전조였다. 머지않아 혼돈도 두 드라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혼돈은 드라콘을 복제해, 요툰을 몰아낼 우수한 전쟁 병기를 만들려 했다.’
혼돈의 복제 능력은 뛰어나다.
혼돈은 도롱뇽과 코르키코스를 복제해 많은 드래곤을 만들었다.
또한 지금의 상황으로 미루어, 샤를은 혼돈의 복제 능력을 각성한 게 틀림없다.
‘얼마큼의 힘을 각성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건 시간이 흐를수록 언데드 드라칸은 계속 늘어날 거라는 거다.
아틸라는 펀치를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도롱뇽에게 의지를 발현해 하늘 위로 떠올랐다.
“뭐, 뭐야 아틸라! 나만 두고 어디 가려고!”
카스피가 당황해 외쳤지만 아틸라는 그저 씩 웃었다.
놀란 토끼 눈을 뜬 카스피를 보며 아틸라는 얼마 전의 일을 되돌아봤다.
아틸라는 카스피의 마음을 읽었다.
동료들에겐 심안의 힘을 발현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그였지만, 그때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벨라가 카스피의 몸을 빼앗았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확인한 카스피는 역시, 카스피였다.
그녀에게서 벨라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울러 아틸라는 카스피가 사타나일을 소중히 간직하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사타나일은 벨라의 영혼이 정착된 후 모습이 바뀌었다.
데비쉬를 상징하는 파형 단검에서, 보다 일반적인 형태의 단검으로.
카스피를 위한 벨라의 마지막 배려였을 것이다.
“언데드 드라칸들을 찾아라. 도롱뇽.”
아틸라와 바토리는 도롱뇽을 타고 전장의 하늘을 누볐다.
언데드 드라칸이 보이면 제압했고, 꼭 언데드 드라칸이 없더라도 수세에 몰리는 아군이 있으면 도왔다.
도롱뇽의 브레스와 바토리의 마법은 짧은 시간에 전황을 뒤집기 충분했다.
그 와중에 아틸라는 황금바위 드워프들을 만났다.
“드디어 돌아온 겐가 아틸라! 오, 바토리 아가씨도 오셨구려! 누음앗핫핫핫하!”
크누트가 반갑게 외쳤다.
그의 아들 보에몽도 활짝 얼굴을 폈다.
골든핑거는 박살난 흑철갑주를 보며 푸욱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강철바위의 왕 하워드 스틸숄더에게 개조를 받았다는 말을 들은 뒤엔 전투는 나 몰라라 한 채 흑철갑주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대단하군! 하워드 스틸숄더의 대장술이 그렇게 뛰어나다더니, 결코 허언이 아니었네! 누음앗핫핫핫하!”
“닥치고 싸움이나 해! 골든핑거!”
“시끄러! 나 하나 빠졌다고 질 싸움이라면 왕의 지휘가 잘못된 거지! 안 그런가 아틸라? 음핫핫핫핫하!”
아틸라는 나중에 골든핑거를 찾아가겠다고 말한 뒤 다시 도롱뇽의 등에 올랐다.
아틸라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는 아직 많다.
“검은늑대의 아틸라다!”
“아틸라가 돌아왔어!”
연합군에서 아틸라는 이미 전설적인 전사였다.
아틸라의 모습을 본 자는 많지 않아도, 그의 무용담만큼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다.
아틸라와 바토리의 활약으로, 그리고 오토와 카스피의 활약으로 전장의 분위기는 반전됐다.
그럼에도 아인하르트의 저력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언데드 군단도 끝없이 밀려들었다.
“기병대! 찔러!”
“드워프 부대의 지원이다!”
“호우호우!”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건 저녁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피핀이 군세를 이끌고 퇴각했다.
언데드 군단도 함께 모습을 감췄고, 그제서야 연합군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날 밤 총사령관 키릴의 주도로 회의가 열렸다.
아틸라 일행도 함께였다.
돌아온 아틸라 일행을 보며 키릴은 좀처럼 보이지 않던 환한 미소를 지었다.
키릴은 그들의 등장이 전쟁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며칠이 채 지나기도 전에 키릴은 생각지도 못한 국면을 마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