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 왕의 귀환
키릴의 전투 함성이 전장의 공기를 달궜다.
화려하게 빛나던 그녀의 갑주는 핏물로 가득했다.
성기사단장의 상징인 백금빛 독수리의 아밍 소드도 본래의 색을 잃었다.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 진겨어어억!”
“우오오오오!”
키릴이 검을 뻗으며 외치자 성기사들도 검과 방패를 들며 화답했다.
하얀 입김을 뿜으며 백마들이 진군했다.
성기사들의 광명검이 적군의 목을 베었다.
“사악한 악마의 힘에 현혹된 어리석은 자들이여!”
“회개하라! 빛의 신 포이베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키릴은 아인하르트 제국에 맞서 싸우는 4개 왕국 연합군의 총사령관이다.
당연히 그녀의 주력 부대는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
전임 단장이었던 다리우스는 전사했다.
부단장이었던 요한도 죽었다.
그들만이 아니다.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의 전력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뿌우우우우!
뿔피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쿵쿵, 지면이 흔들렸다.
연합군의 병사들은 저 울림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전투 코끼리 부대다!”
“물러서! 우리 같은 보병으론 상대가 안 돼!”
보병의 입장에서 전투 코끼리는 재앙이나 다름없다.
놈들을 상대하려면 고도로 숙련된 기사 집단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전투 코끼리를 상대하는 데 10인의 마상 기사가 요구된다.
그러나 크레센시아 성기사단은 달랐다.
“1조부터 8조는 전투 코끼리 부대를 상대한다! 나머지는 현장을 지켜라!”
“우오오오!”
키릴의 명을 받은 성기사들이 말머리를 돌렸다.
크레센시아 성기사단의 각 조는 6인으로 구성돼 있다.
6명이서 코끼리 한 마리를 상대한다.
금사자 기사단과 더불어 대륙 최강의 기사단이라 불리는 무력을 갖췄기에 가능한 일이다.
“2조! 진겨어억!”
“3조도 움직인다!”
“우와아아아!”
각 조의 조장들이 팀원들을 이끌고 움직였다.
일사불란한 움직임.
발키리 부대를 제외한다면, 연합군 내에서 그들보다 전투 코끼리를 효율적으로 상대하는 집단은 없다.
두두두두두두.
성기사단과 전투 코끼리 부대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성기사들의 선두를 달리는 1조은 특별했다.
1조의 구성원은 오직 한 명.
그러나 다른 그 어떤 조보다도 뛰어난 무력을 지녔다.
그 하나의 구성원이 바로 키릴 크레센시아이기 때문이다.
“빛의 신이시여!”
키릴의 아밍 소드가 눈부신 빛을 발했다.
검을 추켜든 그녀의 몸 전체가 밝게 빛났다.
크레센시아 성기사단과 전투 코끼리 부대가 서로의 무기를 부딪쳤다.
파카카카캉!
전장의 다른 곳에선 나바라 왕국의 기사들이 금사자 기사단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금사자 기사단은 아인하르트 제국 최강의 살육 집단.
나바라의 기사들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우라질. 아무래도 오늘이 우리 제삿날인 것 같군.”
“이런 때까지 오토 대장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냐고!”
“빌어먹을. 누가 피핀 저놈만 좀 처리해 줘도 숨통이 트일 텐데.”
아론, 로버트, 던컨이 킬킬대며 말했다.
그들은 이런 불리한 형국에서도 살아남았다.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연이은 전쟁을 겪으며 그들의 실력은 몰라보게 발전했다.
“어이 던컨! 조심해!”
“제, 젠장! 이, 이번엔 진짜 죽을 뻔했다!”
세 기사는 금사자 기사단에 밀리지 않는 실력을 지녔다.
나바라 왕국군의 총지휘관인 로잘린 란틴크 경도 그들의 무력을 인정했다.
“언제까지 입으로 싸울 거냐 애송이들! 닥치고 검이나 휘둘러라!”
“아, 로잘린 누님 또 저러시네.”
“저게 다 노처녀 히스테리라고.”
“그러게 말이야. 이번 전쟁이 끝나는 대로 시집이라도 보내야지 원.”
“이봐 아론! 그러고 보니 네가 관심 있다고 하지 않았어?”
“누, 누가 그런 헛소리를! 로잘린 누님과 같이 살면 숨이 막혀 하루 만에 뒈질 거다!”
세 기사가 으하하! 대소하며 검을 휘둘렀다.
아론의 공격에 금사자의 기사 하나가 낙마했다.
“지난번에 키릴 경이 피핀을 좀 베어 줬어야 했는데.”
“그러게 말이야. 거의 죽일 뻔했는데, 아쉬웠지.”
“제롬 그 새끼가 방해만 하지 않았다면.”
“빌어먹을 제롬. 대장의 말 등 위에 포박돼 끌려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제롬 아그리피나.
아니 대마법사 제롬.
그의 마법 실력은 어마어마했다.
라일 플라마를 비롯한 마탑의 마법사들이 없었다면 아군은 이미 전멸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행이지. 서리나무의 왕이 돌아왔으니.”
얼마 전 슈시아 세이나자르가 돌아왔다.
그녀의 귀환 소식을 들은 그들은 아틸라 일행 전부가 돌아온 것으로 착각하고 환호성을 질렀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돌아온 건 슈시아와 웬 낯선 마법사 하나.
그런데 그 마법사, 리베르의 실력이 대단했다.
소문으론 제롬 아그리피나가 리베르를 상대하다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뭐, 그래 봐야 금세 회복했겠지만.
아무튼 슈시아의 복귀로 발키리 부대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말도 안 되는 전력 차에도 연합군이 괴멸되지 않은 것엔 슈시아와 리베르의 공이 컸다.
하지만 그것도 영원할 순 없었다.
연합군은 지금 이 순간에도 축소되고 있다.
제국의 황제, 샤를 아인하르트가 아직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사실 우리를 갖고 노는 것이 아닐까. 샤를 그 녀석은.”
“그럴지도 모르지. 듣자 하니 녀석은 신에 필적하는 힘을 얻었다고 하던데.”
“아키텐 백작령의 신출내기 용병단장에 불과했던 꼬마가 이젠 제국의 황제라니. 크흑……! 그동안 오토 대장은 뭘 한 거야.”
“뭘 하긴 새끼야! 대장도 이제 일국의 왕 아니겠냐!”
“그러니까, 그 왕이 왜 도통 코빼기도 안 보이냐고!”
“으힉! 피, 피핀 저놈이 우릴 보고 있다!”
“힉! 이쪽으로 오잖아!”
“이 빌어처먹을 던컨 놈아! 네가 샤를을 욕해서 그런 거잖아!”
“에라이 멍청한 던컨 새끼! 피핀 저 변태 같은 놈이 샤를이라면 죽고 못 사는 걸 몰라서 그리 입을 턴 거냐!”
“아 시발, 왜 나만 갖고……!”
길게 대화할 틈은 없었다.
피핀이 살기 어린 눈을 뜨고 세 기사에게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으악! 우린 이제 죽었다!”
피핀 에드발.
아인하르트 제국의 대장군.
샤를을 제외한다면, 아인하르트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무력을 지닌 괴물 중의 괴물이다.
“재수 없는 아론 새끼! 오늘이 제삿날인 거 같다고 초 치는 소릴 내뱉더니, 진짜 그렇게 됐다!”
“저 새낀 왜 또 날 갖고 지랄이야!”
“키, 키릴 총사령관님 어디 계시냐! 우릴 구해 주실 분은 그분뿐이다!”
호들갑 떠는 목소리와 달리 그들의 눈빛은 진지했다.
세 기사는 근처에 있던 로잘린을 보호하듯 늘어섰다.
가장 앞쪽에 있던 아론이 피핀의 검을 받았다.
퍼어어엉!
아론과 그의 군마가 지면에 박혔다.
로버트, 던컨, 로잘린이 이를 악물며 피핀을 협공했다.
그러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피핀은 샤를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인물.
샤를이 강해지면 피핀도 강해진다.
지금 연합군에서 피핀과 대적할 수 있는 전사는 오직 키릴뿐이다.
콰콰쾅!
피핀이 휘두른 검이 로버트, 던컨, 로잘린을 낙마시켰다.
로잘린과 던컨은 복부에 제법 깊은 부상을 입었다.
“비, 빌어먹을……! 던컨! 로잘린 누님!”
아론과 로버트가 다시금 피핀에게 달려들었다.
피핀이 검을 들었다.
그 순간 새하얀 빛의 화살이 피핀의 검을 강타했다.
카아아앙!
피핀의 몸이 군마째 옆으로 밀렸다.
그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리듯 위를 향했다.
“슈시아 세이나자르.”
피핀은 아론과 로버트를 무시하고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달렸다.
그의 뒤를 금사자 기사단이 따랐다.
다리가 풀린 로버트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론이 로버트의 군마 위에 오르며 외쳤다.
“로버트! 로잘린 누님과 던컨을 지켜!”
아론은 피핀의 뒤를 쫓았다.
그러던 중 그는 등 뒤에서 낯선 기운을 느꼈다.
병사들의 비명이 들린다.
인간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기괴한 포효가 함께였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떨리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뼈만 남은 거대한 드래곤 한 마리가 전장을 휩쓸고 있었다.
“비, 빌어먹을 저게 무슨……!”
그것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던 언데드 군단이 등장했다.
그간 언데드 군단은 클라우디우스 제국의 침공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등장했다는 건.
“……설마 북부 제국을 모두 집어삼켰다는 건가.”
그럴 리가 없다.
현재 북부엔 아틸라, 바토리, 카스피, 오토가 있다.
아론은 불길한 생각을 떨쳐 내며 말머리를 돌렸다.
지금은 언데드 군단으로부터 나바라의 동료들을 지키는 것이 먼저다.
슈시아와 발키리들은 그리 쉽게 피핀과 금사자 기사단에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키에에에!
키랴랴랴랴랴랴!
스켈레톤 드래곤과 언데드들의 등장으로 전장은 대혼란에 빠졌다.
심지어 언데드 중엔 전투 코끼리도 있었다.
썩은 살점을 흘리며 연합군을 짓밟는 언데드 코끼리는 공포, 그 자체였다.
“로잘린 누님!”
로버트가 던컨을 말 위에 얹는 모습이 보였다.
아론도 로잘린을 말 등 위에 태웠다.
두 사람 모두 상처가 깊다.
살아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나는 됐다 아론. 어서 로버트와 함께 도망…….”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우쇼! 내가 로잘린 누님을 죽게 내버려 둘 것 같소!”
아론은 로잘린 대신 후퇴 명령을 내렸다.
이대로라면 전멸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다음 전투를 기약해야 한다.
전쟁 내내 장난기 가득했던 아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로버트도 마찬가지였다.
던컨의 갈라진 복부 사이로 시뻘건 내장이 보였다.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퇴각! 모두 퇴각해!”
나바라의 군마들은 쉬지 않고 달렸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드래곤은 그보다 더욱 빠르다.
스켈레톤 드래곤의 날개가 병사들의 등에 어둠을 드리웠다.
아론은 이를 악물며 뒤를 돌아봤다.
그제서야 아론은 저 멀리에서 또 다른 스켈레톤 드래곤이 연합군을 습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 마리가 아니었어?”
기사와 병사들만으로는 드래곤을 상대할 수 없다.
‘마법사들은 어디에…….’
답은 뻔하다.
그들은 전장 어딘가에서 적과 싸우고 있다.
이미 그쪽에도 스켈레톤 드래곤이 나타났을지 모른다.
그러던 중 아론은 저 멀리 스켈레톤 드래곤에게 날아드는 한 쌍의 검은 날개를 봤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한눈에 알아봤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아틸라의 드래곤.
아틸라가 왔다.
그렇다면 바토리도, 카스피도, 오토도 저곳에 있을 터다.
“……빌어먹을 대장. 이쪽으로 먼저 와야지.”
키에에에에에!
아가리를 들이미는 눈앞의 언데드 드래곤을 보며 아론은 킬킬 웃었다.
자신들은 지금 이곳에서 모두 죽을 것이다.
‘하지만 아틸라 님이 왔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반전의 여지가 있다.
나바라 왕국은 존속이 가능할지 모른다.
“……그래 와라. 뼈다귀 새끼야.”
아론은 말머리를 돌리고 검을 뽑았다.
눈앞의 언데드 드래곤을 향해 달리며 마지막 울분을 토했다.
“우라질 이쪽으로 왔어야지 이 멍청한 대장 새끼야아아아아!”
“왔잖아 이 시부럴 놈아!”
“응?”
머리 위를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눈부신 빛이 언데드 드래곤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