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 혼돈의 전장 (5)
사타나일(Satanail).
데비쉬의 단주 ‘살라딘 쿠르드’가 벨리알에게서 받았던 검.
생전의 살라딘은 사타나일을 통해 벨리알의 권능 ‘흡혈’을 발현했고, 그 능력으로 여러 인간의 몸을 전생해 왔다.
살라딘이 그토록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다.
물론 셰이카에게 맥도 추지 못한 채 목숨을 잃고 말았지만.
그 사타나일이.
벨라의 손을 매개체로.
콰드득.
카스피의 심장에 꽂혔다.
“살쾡이 암살자아아!”
오토의 눈이 뒤집어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껏 벨라를 동료라 생각해 왔다.
게다가 벨라는 카스피를 남달리 보호했다.
마치 어미가 새끼를 위험으로부터 지키는 것처럼.
그런데 왜.
“사, 살쾡……, 크헉……!”
오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카르타고의 검이 그의 옆구리를 베었다.
그러나 큰 상처는 아니었다.
루미니우스는 오토의 강철갑주에 빛의 마력을 주입했다.
그것이 카르타고의 마기를 상당 부분 튕겨 냈다.
- 재미있는 상황이 펼쳐졌군.
카르타고도 벨라와 카스피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봤다.
벨리알의 힘을 지닌 그 역시 사타나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
카르타고의 투구가 웃는 것처럼 진동했다.
- 그렇군. 셰이카 라딤이 귀살자 카스피를 성장시킨 이유는 모두 저것을 위해서였나.
카르타고는 오토를 더욱 압박했다.
주인의 의지를 전달받은 아에스투스도 사력을 다해 루미니우스를 막았다.
루미니우스는 오토의 정신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동료의 손에 당한 동료.
게다가 그 피해자가 카스피였으니까.
“…… ……, ……!”
오토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핏발이 돋아난 안구와 얼굴을 들이밀며 어떻게든 카스피에게 가려 했다.
그러나 의지만으로 할 수 없는 일도 있었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카르타고가 그렇게 만들었다.
카르타고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목적을 이룬 셰이카는 더 이상 자신들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혹여 방해를 한다 해도,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카르타고는 기대했다.
눈앞의 오토마이어를 쓰러뜨린 뒤, 더욱 강해진 셰이카와 검을 겨루게 될지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
“벨…… 라……. 어째서…….”
카스피가 흔들리는 눈으로 벨라를 봤다.
이 순간에도 카스피는 지금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카스피와 벨라는 서로에게 단 하나뿐인 혈육이다.
게다가 벨라는 그동안 카스피의 스승 역할을 했다.
카스피는 벨라에게서 스승인 사바흐와, 기억할 리 없는 어머니의 향기를 느꼈다.
그러나 카스피를 보는 벨라의 표정은 차가웠다.
“내가 전에 말했었지? 꼬마.”
아니,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귀살자에겐 특별한 힘이 숨겨져 있다고.”
흐릿해지는 카스피의 정신이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귀살자에겐 숨겨진 힘이 있다. 벽을 넘어서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아주 특별한. 그리고 그 힘은 너와 날 더욱 위대한 존재로 만들 것이다.’
‘그렇기에 난 너를 살려 둔 것이다.’
특별한 힘.
그리고 위대한 존재.
그래서 벨라는 날 살려 뒀어.
‘카스피에게 무슨 수작을 부릴 생각인가.’
‘궁금했을 뿐이다. 그리고 꼬마는 내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지.’
‘동료들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너희가 살아 있어야 꼬마가 더욱 성장할 테니까.’
‘카스피의 성장이 네게 무언가 이득이 된다는 뜻인가?’
아틸라의 마지막 질문에 벨라는 대답 없이 웃었었다.
그 웃음의 의미는 뭐였을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난 사타나일을 통해 네 몸으로 전생할 것이다. 오직 그 목적 하나만을 위해 나는 널 단련시켰다.”
벨라의 어투가 변했다.
카스피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중성적인 목소리였다.
“또한 그 목적을 위해 네 동료들을 살려 두었다.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그들이 살아 있어야 네가 더욱 성장할 테니까.”
카스피는 그런 벨라에게서 낯섦을 넘어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필요 없어졌다. 난 네 몸을 취한 뒤, 가장 먼저 네 동료들을 죽일 것이다. 그 시작은 저기 있는 오토마이어가 되겠지.”
“하지…… 마……. 제발…….”
카스피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따다다닥……, 이를 떨었다.
심장에 박힌 날붙이가 차가웠다.
이대로 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카스피는 벨라를 완전히 미워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 말도 안 되는 감정의 정체가 두려웠다.
이것이 혈육의 정이라는 걸까.
혈육의 정은 자신의 목숨을 빼앗는 자에게서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인 걸까.
그렇다면.
그렇다면 왜 벨라는.
“그만 현실을 인정해. 소꿉놀이는 끝났어. 꼬마는 이만 잠에 빠져들 시간이라고. 다시는 깨지 못할, 영원한 잠 말이야.”
벨라의 목소리와 어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평소처럼 히죽 웃기까지 했다.
그 모습이 카스피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부드득.
사타나일이 카스피의 심장을 더욱 깊숙이 찔렀다.
신기한 점은 카스피가 육체적인 통증을 느끼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만 차갑고, 이물감이 느껴졌고, 구역질이 났다.
물론 가장 참기 힘든 건 정신적 고통이었다.
졸음이 밀려왔다.
‘그래. 그렇게 잠들면 되는 거야. 잠에서 깨어나면 새로운 삶이 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벨라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낯익은 존재감이 자신의 몸에 침투하는 것이 느껴졌다.
벨라의 영혼.
그래.
정말로 벨라는 내 몸을 빼앗을 생각이구나.
‘잠들고 싶어.’
카스피는 생각했다.
벨라의 말대로 하고 싶다.
이대로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털썩.
벨라와 카스피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미동조차 없었다.
오토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외침을 뱉으며 카르타고와 검을 부딪쳤다.
저만치 널브러졌던 수블라와 네트라비스가 몸을 일으켜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카스피도 몸을 일으켰다.
카스피의 왼손이 가슴에 박힌 사타나일을 뽑았다.
놀랍게도 검신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무심한 얼굴로 바닥의 벨라를 내려 봤다.
카스피의 얼굴 일부가 꿈틀거렸다.
잠시 후 그녀의 얼굴은 벨라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
카스피의 얼굴의 원래의 것으로 돌아왔다.
그 얼굴이 오토를 돌아봤다.
아무런 표정이 느껴지지 않는 공허한 얼굴.
오토는 절망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카스피의 표정.
타앗.
카스피가 질주했다.
오토는 자신을 보는 카스피의 눈빛에서 짙은 살기를 감각했다.
- 셰이카 라딤.
오토를 뿌리친 카르타고가 카스피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카스피는 카르타고를 그냥 지나쳤다.
카스피의 왼손에서 귀수가 뽑아졌다.
오토의 얼굴이 구깃구깃 일그러졌다.
그는 확신했다.
카스피의 영혼은 죽었다.
카스피는 단 한 번도 왼손으로 귀수를 뽑은 적이 없다.
“살쾡이 암살자아아아!”
오토의 강철검에 검기가 드리웠다.
어느새 그는 루미니우스의 마력을 검에 깃들일 수 있게 되었다.
루미니우스의 등에서 뛰어내린 그가 카스피에게 돌진했다.
빛의 검기를 발하는 검을 휘둘렀다.
카스피는 그림자처럼 몸을 늘여 그것을 피했다.
오토의 눈이 부릅떠졌다.
퍼엉! 카스피의 몸이 사라졌다.
“어디냐!”
오토가 빠르게 고개를 돌려 그녀의 행방을 찾았다.
불길한 기운을 직감한 카르타고도 카스피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카스피가 모습을 드러낸 곳이 오토의 곁도, 카르타고의 곁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팡! 파앙! 콰드드득!
뼈와 근육이 찢기는 소음이 공기를 울렸다.
소리가 나는 곳엔 카스피의 귀수에 무자비하게 절단 당하는 수블라가 있었다.
수블라는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모르는 듯했다.
“이게…… 무슨…….”
차아앙!
수블라의 머리가 반으로 쪼개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썩은 고깃 조각이 된 수블라가 와르르 바닥에 떨어졌다.
다음은 네트라비스의 차례였다.
네트라비스의 앞발이, 날개가, 몸통이 연이어 잘렸다.
네트라비스는 루미니우스와 벨라의 일격을 맞고 상당한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게다가 자신의 주인이 순식간에 살해당했다.
그래서 네트라비스는 카스피의 파상적인 공격에 맥도 추지 못하고 당했다.
카스피의 눈이 카르타고를 노려봤다.
카르타고를 향해 질주했다.
카스피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루미니우스의 등에 올라탄 오토도 무서운 기세로 카르타고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 재미있군. 셰이카 라딤.
카르타고는 처음부터 셰이카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오토마이어를 죽이려는 척하다가 기습적으로 수블라를 난도질했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기대감에 차올랐다.
카르타고에겐 전사의 영혼이 있다.
강한 자와의 승부를 원하는 건 피할 수 없는 본능이다.
- 너 역시 전사의 본능이 꿈틀대는 것이겠지.
카르타고는 이제 오토와 루미니우스에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인간의 몸으로서 정점에 오른 전사, 셰이카 라딤만을 바라봤다.
아에스투스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아에스투스는 주인의 의지를 따라 오토와 루미니우스의 앞을 막았다.
아에스투스는 루미니우스를 상대로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주 잠시면 되었다.
카르타고는 직전부터 하늘 위에 솟아나는 균열을 감지하고 있었고, 그 균열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알았다.
루미니우스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서둘러 아에스투스를 쓰러뜨리려 하는 것이겠지.
그그그그그그……!
하늘의 균열이 쩌억 갈라졌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뼈만 남은 파충류의 거대한 아가리였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능가하는 괴물 중의 괴물.
- 드라코리치.
루미니우스가 몸을 떨었다.
드라코리치의 존재감은 루미니우스로 하여금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의 공포를 반추하게 했다.
키랴랴랴랴랴랴랴!
드라코리치의 입에서 흑염의 브레스가 뿜어졌다.
브레스의 범위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넓었다.
루미니우스는 본능적으로 날개를 펼쳐 오토를 보호했다.
파드드드드드드!
루미니우스의 몸이 어둠에 덮였다.
루미니우스가 네트라비스에게 기습적으로 빛의 브레스를 발현했던 것과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네트라비스는 루미니우스와 상극의 힘을 지녔고, 루미니우스보다 약했다.
그래서 치명상을 입었다.
그것이 그대로 루미니우스에게 돌아왔다.
드라코리치는 루미니우스와 상극의 힘을 지녔다.
그리고 드라코리치는 루미니우스보다 강하다.
즉, 루미니우스로서는 막아 낼 재간이 없었다.
파캉! 카아앙!
빛의 브레스도, 빛의 방패도 소용없었다.
그것들은 시전되자마자 흑염의 브레스에 삼켜졌다.
드라코리치의 브레스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아에스투스를 감각하며, 카르타고는 전신에 마기를 불태웠다.
아에스투스도 어느 정도 휘말리긴 했지만 루미니우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루미니우스는 저대로 소멸할지도 모른다.
살아남는다 해도 더 이상 아에스투스를 막을 기력은 없을 것이다.
카르타고는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셰이카 라딤을 봤다.
카르타고의 안광이 순간 가늘어졌다.
그는 무언가 이질적인 감각을 느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카르타고는 원인을 찾았다.
상대의 귀수가 오른손에 발현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