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 혼돈의 전장 (4)
- 루미니우스다.
도롱뇽이 말했다.
아틸라와 바토리도 짐작은 했다.
그러나 도롱뇽의 말은 그 짐작에 확신을 주었다.
- 저렇게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존재는 루미니우스뿐이다. 저것이야말로 놈의 장기니까.
“장기라고?”
아틸라의 되물음에 도롱뇽이 답했다.
- 물론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힘은 아니다. 적어도 수백 년은 빛의 힘을 응축해야만 시전할 수 있는 기술이지. 지금 사용했으니 또 수백 년은 힘을 모아야겠군.
“하지만 루미니우스는 황도를 떠나지 않는다 하지 않았더냐.”
- 그건 아마도 엘 때문이었을 거다. 엘은 황도를 떠날 수 없는 몸이었고, 그래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골드 드래곤을 황도에 묶어 둔 것이겠지. 어쩌면 아자젤의 짓인지도 모른다. 골드 드래곤의 관리는 녀석이 하고 있었던 것 같으니.
아틸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근데 이 새끼가 아까부터 왜 근엄한 척을 하고 있어.”
아틸라가 도롱뇽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와 함께 약간의 정신 교육을 시전하자 도롱뇽이 꽥! 소리를 지르며 목소리를 바꿨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원래대로 하면 되잖아!”
“루미니우스가 향하는 곳이 어디냐.”
“향하는 곳이 아니야. 그 재수 없는 놈은 벌써 도착했을 거라고.”
도롱뇽의 동공이 세로로 좁혀졌다.
“종복 미물이 있는 곳에.”
* * *
퍼어어어엉!
네트라비스의 몸이 날아갔다.
그 엄청난 광경은 주변의 모든 것을 정지하게 만들었다.
숨 막히는 접전을 벌이던 벨라와 카르타고도.
형편없이 날아가는 네트라비스를 보며 경악하는 수블라도.
그 광경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직관한 카스피 또한 마찬가지로.
“여……, 영주 나리…….”
카스피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
오토의 강철검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아니, 그의 몸 전체가 태양처럼 빛났다.
마치 하늘에서 천사라도 강림한 듯한 모습.
카스피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러나 그 두근거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사, 살쾡이 암살자!”
오토가 달려왔다.
순간 카스피의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고, 그래서 카스피는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금 눈을 뜬 카스피의 눈앞엔 오토가 있었다.
그의 몸에선 더 이상 빛이 나지 않았다.
강철검만이 은은하게 루미니우스의 축복을 발하고 있을 뿐이다.
“여, 영주 나리가 한 거야……?”
“뭐, 뭘 말이우?”
카스피는 대답 대신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루미니우스를 가리켰다.
뒤를 돌아본 오토가 기겁해 소리쳤다.
“히, 히익! 뭐요! 저 드래곤이 왜 여기 있는 거요! 설마 저놈도 언데드가 된 건……!”
하지만 아니었다.
누가 봐도 루미니우스는 언데드가 된 모습이 아니다.
- 오토마이어 나바라.
루미니우스가 말했다.
- 넌 나와 같은 심장을 공유할 운명을 지녔다.
“뭐, 뭐? 그게 무슨…….”
- 난 사도 엘을 통해 그것을 들었다. 그래서 엘과 함께 황도에서 머물며 너의 각성을 기다렸다. 네가 각성해 날 부른다면, 난 언제든 네게 날아갈 수 있었으니까.
오토는 루미니우스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무슨 이유에선지 루미니우스가 1군단에 왔고, 일행의 편에서 싸우려 하고 있다.
- 오토마이어 나바라. 난 너의 미래를 알고 있다. 그 미래가 불변의 것이라면, 넌 오늘 이곳에서 죽지 않을 것이다.
오토와 달리 카스피는 루미니우스의 말을 알아들었다.
아니 사실 오토도 루미니우스의 말뜻을 알았다.
다만 그 놀랍고도 엄청난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 이 어린 용족은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루미니우스가 요롱이의 시체를 바닥에 내려놨다.
요롱이는 처음 만났을 때의 체구로 돌아가 있었다.
요롱이의 시체를 본 순간 오토는 현실을 직시했다.
그 순간 유성처럼 날아든 아에스투스의 앞발이 루미니우스를 공격했다.
파캉!
하지만 루미니우스도 앞발을 뻗어 그것을 막았다.
공격한 쪽은 아에스투스였지만, 더욱 크게 밀려난 것 또한 아에스투스였다.
벨라와의 대결을 멈추고 달려오는 카르타고가 보였다.
아에스투스가 그를 향해 날았다.
오토도 본능적으로 루미니우스를 향해 달렸다.
루미니우스가 마주 달려왔기에, 오토와 카르타고는 거의 동시에 드래곤의 등에 올라탈 수 있었다.
“영주 나리!”
퍼억! 루미니우스의 옆구리에 네트라비스의 발톱이 박혔다.
위력은 강하지 않았다.
네트라비스는 루미니우스의 브레스를 정면으로 맞았다.
빛의 속도로 날아와 등장한 루미니우스였기에 네트라비스는 아무런 방어태세도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네트라비스는 치명상을 입었다.
- 어둠에 물든 형제여.
루미니우스의 몸에서 광채가 뿜어졌다.
그것에 놀란 네트라비스가 몸을 뒤로 물렀다.
빛의 드래곤 루미니우스는 언데드 드래곤과 상극의 존재.
게다가 루미니우스는 드라코니안을 제외한 모든 드래곤 중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개체였다.
- 이젠 대답조차 할 수 없는 것인가.
루미니우스가 네트라비스의 몸을 들이받았다.
그 섬광 같은 일격에 네트라비스가 수십 미터 뒤로 밀려났다.
네트라비스와 교대하듯 아에스투스가 브레스를 뿜었다.
오토는 자신의 머릿속으로 루미니우스의 의지가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루미니우스의 의지를 받아들인 오토가 자신의 의지를 발현했다.
오토의 의지가 골드 드래곤의 권능과 만나 형상을 이뤘다.
마법진을 닮은 거대한 빛의 방패가 눈앞에 생성됐다.
그것이 아에스투스의 브레스를 막았다.
퍼퍼퍼퍼펑!
- 그대들은 본연의 힘을 잃었다. 그린 드래곤 네트라비스. 블루 드래곤 아에스투스.
루미니우스의 힘은 대단했다.
원래부터 강한 드래곤이었지만, 오토와 함께하며 더욱 강해진 것 같았다.
브레스가 막힌 아에스투스가 근접전을 시도했다.
루미니우스가 그에 응했다.
루미니우스 역시 강력한 마법을 연이어 발현한 상황이었기에 약간의 충전을 필요로 했다.
퍼걱! 퍽! 콰드득!
두 드래곤이 앞발과 날개를 휘두르고, 서로의 비늘을 물었다.
아에스투스와의 근접전은 네트라비스와의 그것과는 달랐다.
네트라비스는 루미니우스의 기습으로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고, 수블라와의 동조율 또한 그리 좋지 않았다.
반면 아에스투스는 기력과 체력을 온전히 보존했다.
게다가 자의는 아니지만 아에스투스는 나름 오랜 시간을 카르타고의 환수로 지내 왔다.
동조율이 높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아에스투스가 네트라비스보다 강한 가장 큰 이유라면 역시, 카르타고의 무력 때문이었다.
카르타고의 검과 오토의 강철검이 부닥쳤다.
오토의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는 카르타고와 검을 섞은 것이 처음이었다.
‘비, 빌어먹을 무슨 힘이……!’
아틸라를 마주하는 것 같다.
아니, 위압감으로만 따지자면 아틸라보다도 위다.
오토는 카르타고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검을 섞는 과정에 여실히 드러났다.
그 상황은 루미니우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 두려움을 지워라 오토마이어.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존재다. 네가 지켜야 할 것들만을 생각해라.
루미니우스가 육성으로 말한 것인지, 아니면 정신적 의지인지 오토는 몰랐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오토의 정신을 환기시켰다.
숨이 멎은 요롱이의 목을 밟으며 뛰어내렸던 일을 상기했다.
그것이 불과 수 분 전의 일이다.
그런데 또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오토가 키들대며 웃었다.
“……그래 오토마이어. 이 한심한 놈아.”
스스로에게 말했다.
오토의 기운이 달라졌다.
그의 강철검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졌다.
그것이 카르타고가 발하는 마기를 집어삼켰다.
- 너는.
그 상황은 카르타고마저 조금 당황하게 만들었다.
오토마이어 나바라는 강해졌다.
전신에서 발하는 빛의 기감.
결코 아벨 카리누스보다 아래가 아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카르타고는 그 이상의 압도적인 강자였다.
카르타고는 자신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그가 샤를 아인하르트에게 고개를 숙인 이유는 오직 하나.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오직 그뿐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바꿔 말하면.
샤를 아인하르트를 제외한다면.
- 내가 쓰러뜨리지 못하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카르타고의 검에서 더욱 강한 마기가 방출했다.
버서커의 기운도 폭풍처럼 거세졌다.
검은 마기의 폭풍이 오토를 몰아쳤다.
오토는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다.
겁을 먹은 까닭이 아니다.
오토는 이미 공포를 극복했고,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모습으로 카르타고를 상대하고 있다.
다만 카르타고가 더욱 강했다.
용기사 간의 승부가 갈리자 드래곤들의 전투도 영향을 받았다.
페어링된 드래곤은 마스터와 한 몸이나 마찬가지다.
“영주 나리!”
카스피가 오토를 도우려 했다.
그녀의 앞을 네트라비스가 가로막았다.
“승부는 마저 내야 하지 않겠나. 귀살자 카스피.”
네트라비스의 등 위에서 수블라가 말했다.
수블라는 루미니우스를 공격하는 것을 포기했다.
지금의 네트라비스는 루미니우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또한 카르타고와 아에스투스가 잘 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두 귀살자를 막아서는 편이 낫다.
“비켜 꼬마!”
벨라가 카스피를 스치며 달렸다.
벨라의 귀기는 곧 꺼질 것처럼 흐릿했다.
“벨라!”
카스피가 벨라의 뒤를 쫓았다.
벨라가 네트라비스의 등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수블라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고, 벨라의 귀기는 이전 같지 않았다.
수블라가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번에야말로 죽여 주지. 셰이카 라딤.”
수블라의 손에서 마기의 화살비가 발사됐다.
네트라비스의 등을 밟으며 벨라가 웃었다.
퍼엉! 벨라의 몸이 사라졌다.
수블라는 당황한 얼굴로 준비했던 방어 마법을 모두 발동했다.
이것이라면 상대가 어느 곳에서 공격해 와도 한 번은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수블라는 불필요한 일을 했다.
벨라의 목표는 수블라가 아니었다.
카스피는 불현듯 눈앞에 나타난 벨라의 등에 흠칫 놀랐다.
벨라는 오른손에 엄청난 귀기를 담고 있었다.
분명 남은 귀기를 모조리 쏟아부은 것이었다.
퍼어어어엉!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몰랐다.
벨라의 손끝에서 발한 강력한 폭발에 네트라비스가 뒤로 날아갔다.
비틀대던 벨라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벨라!”
쓰러지려는 벨라를 카스피가 붙잡았다.
벨라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원래도 망가져 있었지만, 조금 전의 공격으로 온몸의 뼈가 부서졌다.
카스피가 바들바들 이를 부딪쳤다.
그러다 떠올렸다.
루미니우스가 이곳에 있다.
카스피는 저 멀리 널브러진 네트라비스와 수블라를 봤다.
이어 카르타고와 아에스투스를 봤다.
이대로 놈들을 물리치는 것에 성공한다면.
그때까지 벨라가 벼텨 주기만 한다면.
루미니우스를 통해 벨라를 치유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생각을 하는 짧은 동안 카스피는 무방비했다.
그래서 벨라가 품 안에서 무언갈 꺼내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을 감지한 건 오토였다.
오토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직감을 느끼고 카스피를 돌아봤다.
그리고 보았다.
콰드득.
벨라가 카스피의 심장에 사타나일을 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