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 참전 (2)
“허나 북부인들은 제국과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니지 않느냐. 북부인의 입장에서 제국과 손을 잡고 언데드 군단과 싸운다는 건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일 것이다.”
“물론 그렇겠지. 북부인과 제국인의 갈등은 먼 옛날 요툰 전쟁에서부터 시작됐으니까.”
그리고 그 전쟁은 현시대에 재발했다.
울딘, 발더, 비욘, 시거드 등의 강경파 북부인은 용병 생활을 하며 제국의 용기사를 사냥하고 있었다.
또한 요툰헤임의 겹침 현상으로 인해 요르문간드를 위시한 요툰들이 제국을 침공하고 있다.
“하지만 북부와 제국이 척을 진 이유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보면.”
“흐응?”
바토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싱긋 웃었다.
그 모습이 제법 매력적이었기에 아틸라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왜 말을 하다 마는 것이더냐.”
“……그러니까 그 이유의 근원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북부인과, 정복이 익숙한 제국인의 문화 차이 때문이라 볼 수 있겠지.”
“북부인이 제국인을 무작정 싫어한다기보다는 이 세계를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상황을 싫어한다, 이 말이더냐.”
“물론 전에 만난 강경파 같은 놈들도 있겠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네 말은, 그런 북부인들에게 샤를의 언데드 군단은 요툰과 전쟁을 벌였던 과거의 고대인들 이상으로 위험한 존재라는 말이로구나.”
언데드 군단은 대륙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아틸라는 검은늑대의 족장에게 샤를과 언데드 군단에 대해 충분히 설명해 두었다.
높은 확률로 북부인들은 이번 전쟁에 참여할 것이다.
“그래.”
엘은 이번 전쟁에 북부인을 참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틸라와 바토리는 동료들과 헤어져 북부에 왔다.
“알아보라 했던 일은 어떻게 됐지?”
아틸라의 물음에 바토리가 미소했다.
“오랜만에 틈새로 들어가 수정구를 보니 감회가 새롭더구나.”
“케헷헷헷헤! 오랜만은 무슨! 너 같은 할망구에게 몇 년 정도의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
“도롱뇽에게 정신 교육이 필요한 것 같구나 야만전사야.”
“취, 취소! 취소다! 나 취소했다 바토리 할망구우! 야만 미무우우울!”
“그래서, 수정구를 통해 본 전장의 상황은 어떻지? 샤를은 어디에 있고.”
바토리는 이제 틈새에 진입할 수 있는 몸이 되었다.
그녀의 틈새엔 마력의 수정구가 있다.
아틸라가 야만 숲에 있던 시절부터 바토리는 그 수정구를 통해 아틸라를 관조했었다.
“북부 전장은 언데드 군단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하지만 철혈귀검과 카스피를 비롯한 우리 동료들이 참전한 뒤로는 호각의 모습을 보이고 있더구나. 그리고 샤를, 그 아이는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다.
바토리가 아무리 이전보다 강력한 관조자로 부활했다 해도 샤를의 힘에 비할 수는 없다.
지금의 샤를은 신과 악마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다.
샤를이 바토리의 관조를 막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니면 샤를이 현재 바토리의 관조 범위를 벗어난 위치에 있는 것이겠지.’
관조자의 관조 능력은 만능이 아니다.
그들의 관조 범위는 틈새에 진입한 시점의 물리적 위치에 큰 영향을 받는다.
또한 직접 경험한 적이 없는 장소는 현저하게 관조 능력이 떨어진다.
얼마 전 아틸라는 바토리를 통해서라면 문주크의 현 상황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토리의 수정구가 대륙의 몇몇 장소를 ‘특별 지정’해뒀기 때문이고, 그중 하나가 야만 숲이다.
바토리의 수정구는 그런 식으로 지정된 몇 군데 범위는 물리적 거리와 상관없이 관조할 수 있다.
‘마치 웹브라우저의 즐겨찾기처럼.’
“엘의 말대로 그린 드래곤 네트라비스는 언데드가 됐다. 네트라비스의 용기사는 수블라더구나.”
“다른 드래곤은 아직 제국의 수중에 있나?”
“화이트 드래곤 프릴루이나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었다. 하지만 벨라가 막아 냈지.”
“벨라가?”
“벨라는 수블라를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수블라가 틈새를 미리 열어놓지 않았다면 분명 벨라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하긴. 벨라야말로 수블라 같은 마법사를 죽이는 데 특화된 녀석이지.”
이 세계 마법사의 정점은 관조자들이다.
그런 관조자를 벨라만큼 많이 죽인 자는 없다.
‘아니지. 카르타고도 파우스트의 흑마술사들을 몰살했었던가.’
카르타고는 데스나이트로 부활한 상태에서 그 일을 행했다.
그러나 벨라는 아니다.
순수한 인간의 힘으로 그런 업적을 달성했다는 것 자체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아틸라 자신도, 바토리도, 샤를도, 순수한 인간은 아니다.
아틸라는 혼돈의 분신인 엘의 분신이고, 바토리는 신의 왼팔을 지닌 관조자이며, 샤를은 요정과 대악마의 혼혈이다.
‘하지만 벨라는 인간이다.’
아틸라는 벨라의 실력을 직접 경험했다.
그녀의 무력은 아틸라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카스피의 각성과 살라딘의 영향으로 더욱 강해졌을지도 모르지.’
게다가 벨라는 아직 자신의 모든 실력을 드러내지도 않은 것 같았다.
아틸라는 벨라야말로 패영전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최강의 인간’이리라 생각했다.
“……야만전사야. 혹시라도 오해할 것 같아 미리 말해 두지만, 난 벨라를 이길 수 있다.”
“호오. 그래?”
바토리가 흠칫 놀란 토끼 눈을 떴다.
“의, 의심하는 것이더냐. 서, 설마 내가 벨라에게 질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더냐.”
아틸라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래 뭐, 관조자가 된 지금이라면 네가 이길지도 모르겠군.”
“그, 그게 무슨 소리더냐! 난 관조자가 아닌 인간의 몸이었을 때도 벨라를 두려워한 적이 한 번도 없느니라! 이, 이거 안 되겠구나. 당장 리베르를 구슬로 만들어 내 말을 증명해야겠다! 어서 가자꾸나 도롱뇽아!”
* * *
리베르는 덜미가 오싹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뭐, 뭐지? 이 서늘함은.”
리베르가 손으로 덜미를 만졌다.
그는 틈새에 진입해 남부 대륙을 관조하고 있었다.
남부도 전쟁이 한창이었다.
“그렇군. 북부는 언데드 군단으로, 남부는 금사자 기사단을 위시한 인간 병력으로 몰아친다는 건가.”
아인하르트 제국은 남부를 통일하겠다는 천명을 공표했다.
아인하르트는 9개 왕국이 통합돼 건설된 제국.
게다가 아인하르트의 정예 병력엔 피핀의 금사자 기사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새 대마법사라 불리게 된 제롬 아그리피나와 그의 수제자들, 그리고 후마이야의 전투 코끼리 부대도 있다.
“제롬 아그리피나는 정말 압도적인 마법사가 됐군. 저래선 웬만한 관조자들도 녀석을 상대할 수 없겠는데?”
반면 아인하르트에 맞서는 왕국은 나바라, 샹크리스, 수오미, 탈리 왕국뿐이었다.
“흐음.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다 털리겠군.”
현재 왕국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키릴 크레센시아.
키릴은 강했다.
게다가 그녀가 지닌 특별한 힘은 언데드를 상대로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고작 4개 왕국으로 아인하르트 제국을 막는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적색 마탑, 청색 마탑, 황색 마탑의 존재가 없었다면 진즉 무너졌을 것이다.
“3개 마탑의 마법사들도 제롬 아그리피나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이군. 적마탑주 라일 플라마를 제외한다면 말이야.”
현재 마탑의 마법사들은 세대교체 중이다.
클레르 플라마와 쿨리 야르비를 비롯한 과거의 강자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하하하. 서리나무의 왕이 없으니 발키리들도 오합지졸이군. 드워프 놈들이야 뭐 언제나처럼 무식하게 싸우고 있고.”
리베르의 시야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호오. 나바라 왕국은 왕의 부재에도 나름 선전 중인 건가? 아니지. 애초부터 왕의 존재감이 작았던 걸지도.”
아틸라가 리베르에게 맡긴 임무는 남부의 상황을 보다 자세하게 관조하는 것이었다.
바토리는 현재 아틸라와 함께 북쪽 끝단에 위치한 탓에 남부 대륙의 관조가 용이하지 않았다.
그래서 리베르는 잠시 일행과 헤어져 제국 남쪽의 수해 근방으로 이동했다.
그는 ‘까마귀 군주’라는 이명답게 까마귀로 변신해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리베르가 피식 입가를 올렸다.
“아무래도 몇몇 인물은 다시 남부로 내려 보내야 할 것 같군.”
* * *
밤하늘은 별빛이 휘황했다.
벨라는 높은 나무 위에 올라 하늘을 보고 있었다.
“벨라.”
“어이. 꼬마.”
카스피가 근처 나무 위로 올라왔다.
벨라가 히죽 웃었다.
“밤이 깊었어. 꼬마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는 거 몰라?”
“나 꼬마 아니야. 벌써 스물여섯 살이라고.”
“호오. 벌써? 그 코 흘리던 꼬맹이가 벌써 스물여섯 살이야?”
“그럼. 이제 시집가도 된다고.”
“오토마이어에게?”
카스피의 얼굴이 붉어졌다.
“무, 무슨 소리야! 누, 누가 그런 아저씨랑……!”
그렇게 외치던 카스피가 입을 다물었다.
벨라가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스피는 벨라의 웃는 눈이 좋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최근 엘의 환술 세계를 경험하며 알게 되었다.
“벨라.”
“후우. 이제 너도 알게 된 거지? 꼬마.”
벨라가 엷은 한숨을 뱉었다.
숨기려고 했었다.
그러던 중 요르문간드에게 크게 당하는 바람에 아틸라에게 심중을 읽혀 버렸다.
하지만 아틸라는 카스피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눈치였다.
그런데 이번에, 사도 엘을 만나며 비밀은 밝혀졌다.
“정말 벨라가 내 어머니를 낳은 거야?”
카스피는 엘의 환술 세계를 통해 귀살의 일족이 멸망하는 광경을 봤다.
하싸씬의 단주 셰이카 라딤.
그녀만의 특수부대, 암부.
그리고 마스터들.
그들은 귀살의 일족을 습격했고, 멸망시켰다.
그 와중에 셰이카는 큰 감정의 변화를 겪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딸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아이샤!’
사실 과거 셰이카가 일족을 떠난 계기는 딸의 죽음이었다.
당시 셰이카는 일족 안에서도 독보적인 강자였다.
그것은 그녀가 일족의 지도층으로부터 상당한 견제와 차별을 받는 원인이 됐다.
셰이카는 그런 고충을 묵묵히 견뎠다.
그녀의 어린 딸, 아이샤 때문이었다.
‘아이샤의 훈련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참아야 해.’
귀살의 일족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는 일정 나이가 되면 부모와 헤어져 고도의 훈련을 받는다.
아이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셰이카는 아이샤가 훈련 중 사고로 죽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아이샤의 시체를 보며 셰이카는 절규했다.
그러고는 아이샤의 장례를 마치자마자 일족을 떠났다.
‘날 다시 만난다면, 그때야말로 이 보잘것없는 일족이 멸망하는 날이 될 것이다.’
셰이카는 강한 힘을 지녔다는 이유로 자신을 차별하고, 또 아이샤를 죽게 만든 일족을 저주했다.
그러나 그건 지도층의 계략이었다.
아이샤는 죽지 않았다.
그들은 아이샤가 죽은 것으로 위장해 셰이카로 하여금 제 발로 일족을 떠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셰이카는 성장한 딸의 시신을 마주했다.
그리고 사바흐가 죽은 딸의 아기를 숨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